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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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과는 싸우지 말자!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뿐!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시학』에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비극'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세 명의 그리스 비극 작가를 소개합니다. 아이스퀼로스(BC525~BC456), 에우리피데스(BC484~BC406), 소포클레스(BC496~BC406)가 바로 그들인데, 그 중에서도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을 가장 완벽한 비극이라고 극찬합니다.
   소포클레스는 123편의 작품을 썼고, 비극 경연대회에서 무려 18회나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2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작품은 겨우 7편 밖에 남지 않게 됐습니다.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는 현존하는 그의 모든 비극(다른 세계문학전집에는 실리지 않았던)이 실려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천병희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그 이후 그의 자식들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행 중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 「오이디푸스 왕」은 선왕을 죽인 살해범을 찾기 위해 부른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로부터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다시 전해 듣습니다. 원래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자랐지만, 포이보스(아폰론)로부터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며,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60쪽) 신탁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오이디푸스는 사악한 신탁이 이뤄지지 않도록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가 또다시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언급하였고, 심지어 선왕을 죽인 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합니다.
   선왕의 왕비이자 현재 오이디푸스의 왕비이기도 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위로하기 위해 그 옛날 자신들에게 내려진 신탁을 피하기 위해 선왕인 라이오스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들이 라이오스를 죽이게 될거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들을 버려 신탁을 피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서 운명은 빗겨나가지 않았습니다. 선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버린 아들이 바로 오이디푸스였고, 선왕을 죽인 살해범도 오이디푸스였으며, 선왕의 왕비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취해 자식들을 낳은 사람도 오이디푸스였습니다. 이에 좌절한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찔러 스스로 눈을 멀게 만듭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 크레온에게 자신의 불쌍하고 가여운 두 딸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부탁합니다. 아들도 둘이나 있었지만 아들들은 어디로 가든 제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거라며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착한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함께 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눈과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메네가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두 아들의 소식을 전합니다. 에우리피데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데, 그들을 말리고 테바이를 이 재앙에서 구해낼 수 있는 건 아버지 오이디푸스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그리워하기 보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는 두 아들을 원망합니다.
   마침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도 오이디푸스를 테바이로 데려가기 위해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의 속셈을 꿰뚫고 있습니다. "자네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은, 나를 집에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라, 국경 가까운 곳에 데려다놓음으로써 자네 도시가 이 나라로부터 재앙을 피하려는 것이네."(187쪽) 이렇게 말하며 돌아가길 거부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오라버니들의 임박한 살육을 막기 위해 테바이로 돌아간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그러나 두 오라비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죽음은 애도하되, 다른 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매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죽음으로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굴하지 않고 크레온 몰래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어찌됐든 폴뤼네이케스도 안티고네의 소중한 오라비니까요. 화가 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죽이려 하고, 안티고네를 사랑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와 함께 죽으려 합니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뤼디케 또한 죽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시작된 비극은, 이렇게 비극에 비극을 또 낳습니다.

  
필연(必然)과는 싸우지 말자꾸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63쪽

  
「아이아스」는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중 맨 처음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둘러싼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죽자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대해 그리스 장군들 사이에서 투표가 벌어지는데, 투표 결과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아이아스가 아닌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주어졌습니다. 이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아이아스가 늦은 밤 그리스 장군들을 습격해 그들을 죽이려 하지만, 아테나 여신의 힘으로 막히게 됩니다. 아테나 여신은 아이아스가 미쳐 장군들 대신 가축들을 도륙하게 만드는데, 정신이 돌아온 아이아스는 부끄러움을 느껴 헥토르에게 선물로 받은 헥토르의 칼로 자살합니다. 지략이 뛰어난 아니 얄미운 오뒷세우스는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아이아스가 죽고나자 그를 매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가멤논에게 청합니다.
   사실 아이아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뒷세우스는 지략은 뛰어나지만 결투에서는 약했으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머리로 싸움을 하는 오뒷세우스보다는 무공이 뛰어난 아이아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더 잘 어울리고 필요했을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오뒷세우스는 그리스 장군들 뿐아니라 아테나 여신의 보살핌까지 한 몸에 받고 있어서, 독자인 저도 얄미운 건 사실입니다.


   「아이아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 역시 『일리아스』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트로이로 전쟁을 떠났던 아가멤논은 돌아와서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됩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일부러 자신이 죽었다는 전갈을 집으로 보냅니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머니와 아이기스토스를 원망하고 있던 엘렉트라는 마지막 남은 희망인 오레스테스 마저 죽었다고 하자 혼자서 그 두 사람을 죽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때 오레스테스가 나타나 복수를 시작합니다.
   사실 정부와 함께 남편을 죽인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도 약간의 사정이 있었는데, 그 사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리스 명궁
「필록테테스」는 트로이 전쟁 때 트로이로 향하던 중 독사에 물려 무인도인 렘노스 섬에버려져, 헤라클레스에게 물려받은 활로 사냥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활이 없으면 트로이아가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는 예언을 듣고, 오뒷세우스는 네옵톨레모스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필록테테스의 환심을 산 후 필록테테스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네옵톨레모스는 오뒷세우스만큼 간악하지 못해서 사실을 고백하고,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의 혼백에게 계시를 받고 트로이아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오뒷세우스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결국 최후까지 남는 사람은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명장은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필록테테스」 439쪽

  
「트라키스 여인들」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여성들을 짓밟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가 죽자 그의 부인도 노예가 되었듯이, 전쟁이 터지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는 힘이 없습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긴 자의 뜻대로 이리저리로 끌려다녀야 합니다.
   아버지 에우뤼토스가 헤라클레스와의 싸움에서 지자 그의 딸 이올레도 포로가 되어 헤라클레스의 집으로 끌려옵니다. 다른 포로들과 겉모습이 남달랐던 이올레를 본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처음에는 연민을 느꼈지만, 남편 헤라클레스가 이올레를 얻기 위해 일부러 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 그녀는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켄타우로스가 알려준 방법대로 켄타우로스의 피가 묻은 옷을 남편에게 입히는데, 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옷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극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이를 알게 된 데이아네이라는 자살하고,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레스는 아들에게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켜 달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도 헤라클레스는 이올레를 걱정하며 아들에게 부탁하니, 남자는 정말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소포클레스의 7편의 비극에는 모두 신탁이 등장합니다. 오이디푸스처럼 그 신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신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신탁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예정되어 있는 삶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는 운명론자였을까요? 만약 운명을 믿는다면, 이것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믿는다면 삶은 참 편할겁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혹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운명이 정해져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그 운명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니, 그 운명을 따를수도, 맞서 싸울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다가 알게 된 운명 따위에 집착하며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지요.

   「아이아스」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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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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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오이디푸스 왕』을 극찬하게 되었을까!
   이데아를 중시한 플라톤(BC427~BC347)은 형이하학적인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이데아의 하급 위치에 있는 것이며, 작가와 예술가 역시 국가 건설에는 불필요한 존재라며 비판했습니다. 반면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예술은 인간 삶에 대한 모방'이라며 스승과 다른 견해를 펼쳤습니다.
   『시학』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론(인간의 삶을 모방한 예술 중 하나인 문학)을 담은 책으로, 오늘날까지도 문예 창작 이론서로 읽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모방을 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사실은 경험이 입증한다. 아주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시신의 형상처럼 실물을 보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도 더없이 정확히 그려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350쪽

   희극, 서사시 등 인간의 삶을 모방한 문학 장르는 다양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문학 옹호론을 펼칩니다.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해 우리에게 웃음을 주지만,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는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해 준다고 합니다. 지금도 고대 그리스의 희극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도 희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희극은 사람들에게 덜 중시되었던 탓이겠죠.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듣기 좋게 맛을 낸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종류별로 따로 삽입한다. 비극은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서술 형식을 취하지 않는데,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361쪽
 
   비극을 구성하는 요소는 볼거리, 성격, 플롯, 조사, 노래, 사상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짜임새, 즉 플롯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건과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363쪽)고 강조합니다. 특히, 플롯에 속하는 부분들 중에서도 '급반전과 발견'이 우리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소포클레스(BC496~BC406)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며 극찬합니다.

   급반전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변화 역시 앞서 말했듯이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왕에서 사자(使者)는 오이디푸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그를 모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오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 발견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등장인물이 행운을 타고났느냐 불행을 타고났느냐에 따라 서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발견은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급반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하다. 377~378쪽

  
모든 발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처럼 사건 자체에서 비롯되는 발견. 403쪽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볼거리에 의해서도 환기될 수 있고 사건의 짜임새 자체에서도 환기될 수 있는데, 후자가 더 훌륭한 방법이며 더 훌륭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 경과를 듣기만 해도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느끼는 감정이다. 389쪽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얻은 오이디푸스 왕은, 일련의 사건들이 평면적으로 나열되지 않고 '급반전'과 '발견'을 통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납니다. 게다가 오이디푸스 왕은 사악한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맞춰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 인물로, 우리보다 훨씬 나은 인간인데 그의 운명은 보통의 우리보다 불행하게 끝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비극의 적당한 분량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우가 사람들 앞에서 모방(연기)을 해야하는 비극은 당연히 시간적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러 번으로 끊어서 볼 수도 있겠지만, 극의 재미를 위해서 "가능한 한 태양이 1회전하는 동안, 또는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359~360쪽)을 지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 또한 그동안의 이야기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질 뿐이며, 무대 위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급반전'과 '발견'이 있는 부분입니다.

   한마디로, 『시학』은 비극 창작 이론서이며 『오이디푸스 왕은 그 이론을 가장 완벽하게 따르고 있는 교본인 셈입니다.
   사실 『시학』을 읽게 된 계기는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은 「오이디푸스 왕」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전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한 소포클레스의 여러 비극들이 실려있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을 읽고나니 소포클레스를 극찬한 『시학』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2천년 전에도 극찬한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어떻게 극찬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나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다는 '문학적 허세'도 살짝 작용하긴 했고, 적어도 소포클레스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나의 안목이 비슷하다는 자부심도 느낄 겸해서요.
   고대 그리스 사상가라고 하면 현학적인 글들로 정신을 빼놓는 경우다 많은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매우 쉽고 실용적입니다. 그러니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것일테지만요.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런 사건들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상호 간의 인과 관계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이 그처럼 일어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일어날 때보다 더 놀라운 법이다. 우연한 사건이라도 어떤 의도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보일 때 가장 놀랍기 때문이다. 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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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2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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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건 전개를 알고 있어도 훅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토지』 2권

예전에 구판으로 한번 읽은 적이 있어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1권보다 2권이 더욱 그러하다.

일단, 구천과 별당아씨를 쫓는 최치수. 정말 조마조마하다. 일부러 놓쳐주는 것 같기도 하고. 비록 아버지는 다르더라도 어머니가 낳은 동생이니까. 이렇게라도 자신의 의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니까. 산 속을 뛰어다니니 답답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풀렸으니까. 그래서 애써 잡으려하지 않았던 것일까.
서희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이후로 복수를 꿈꾸고 있는 귀녀. 그녀는 최치수의 아들을 낳아 면천하고자 한다. 자신을 종 부리듯 한 사람들을 반대로 부려 먹으며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치수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심지어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며 비웃고 있다. 하지만 귀녀의 집념이 더 컸던 탓인지, 최치수의 아들을 낳았다고 완벽하게 꾸미기 위해 살인까지 계획하는 귀녀와 김평산.
이런 귀녀를 사랑하는 강포수. 그는 용기내어 최치수에게 귀녀를 달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최치수는 때가 되면 알아서 해줄테니 산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산에서는 날아다녀도 역시 사람들 속에서는 바보인가보다. 곰같이 둔한 강포수는 이런 최치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채 평생 최치수를 원망한다.
2권에서는 아들에게 냉정했던 윤씨 부인과 그런 어머니 때문에 냉정해졌던 최치수의 속내까지 드러난다.

역시 2권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최치수다. 비록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구천을 잡아 죽이겠다고 이 산 저 산 누비고 다녔지만, 결국 계략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귀녀와 결혼시켜주겠다고 강포수에게 직접적으로 말해줬더라면 죽어서라도 강포수에게 원망 듣는 일은 없었을텐데. 계집종의 일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말고 어머니에게 맡겼더라면 그렇게 죽는 일도 없었을텐데.
현명하고 강직한 윤씨 부인과 충성스러운 봉순이네 덕분에 이 비극의 전말은 밝혀졌지만 나이든 윤씨 부인과 어린 서희 밖에 없는 이 집안이 걱정이라서 3권도 참 궁금하다.



어떤 분이 『토지』를 읽으면서 올린 평을 보니 재미있는 구석을 하나도 못 찾겠다고 하던데, 반대로 나는 잠도 물리칠만큼 너무 재미있어서 어느 부분이 그렇게 재미없었는지 궁금하다.
소설이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구어체처럼 툭툭 튀어나오는 『토지』를 타 지역이나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읽을까, 이것도 궁금하다. 아무래도 어른들로부터 같은 말씨를 듣고 자란 내가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1~2권 주요 사건별 인물 정리

■ 윤씨 부인 : 최 참판가의 안주인이며 최치수의 어머니. 큰 키, 곧은 상체, 두드러진 뼈대에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여성으로 당당하게 집안의 권위와 재산을 지켜나간다.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기도드리러 갔다가 휴양차 와 있던 김개주에게 겁탈당한다. 문 의원과 월선네의 도움으로 무사히 김환을 낳고 이 사건은 집안의 비밀로 묻어버린다. 불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치수에게 냉정한 어머니가 되며, 김환에 대한 어미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찾아온 그를 하인으로 곁에 두며, 며느리 별당아씨와의 불륜을 용인한다.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저울의 추처럼 갈등을 안겨주어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김개주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 최치수 : 호는 석운. 최 참판가의 당주. 불륜에 대한 죄의식으로 냉엄한 어머니에 의해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며 방약무인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또한 부정적이고 인간혐오적인 선비 장암 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아 매사에 냉소적이다. '온갖 신경질과 우수가 감도는 모습', '당장에 눈을 부릅뜨고 고함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을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여자를 혐오하여 별당아씨를 냉정하게 대하며, 조준구와 어울려 자학적으로 여자들을 상대함으로써 남성을 잃는다. 또한 속박 당하지 않기 위해 집안의 재산관리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별당아씨가 구천과 도망한 후, 총을 구해 그들을 찾아나서지만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만다. 귀녀의 음모를 눈치채고 강 포수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김평산에게 살해되고 만다.

■ 김환 : 구천. 윤씨 부인이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들. 준수한 용모에 고귀한 풍모와 인품을 지녔으며, 우관은 '삭발 안 한 비구요 투구 없는 장수'로 비유한다. 연곡사에서 성장하다 동학혁명 당시 아버지인 김개주를 따라다닌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추척의 눈을 피해 방랑하다가 윤씨 부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최 참판가에 찾아간다.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갔을 때 성만을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무주구천동에서 왔다 하여 구천이로 불린다. 별당아씨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윤씨 부인의 도움을 얻어 산으로 도망한다.

■ 김개주 : 호는 해월(海月). 중인출신이며 우관 스님의 동생. 형인 우관 선사가 있는 연곡사에 휴양차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 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는다.

■ 간난 할매 : 바우 할아범의 처. 윤씨 부인의 몸종으로 최 참판가에 와서 일생을 보낸다. 자식이 없어 조카뻘이 되는 김이평의 둘째 영만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는다. 최치수 부친의 죽음과 삼수 할아버지(쇠돌)의 죽음, 최 참판가의 손이 귀하게 된 까닭 등의 내력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윤씨 부인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 김환의 정체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 김길상 : 고아로 구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라며, 금어(金魚)인 혜관에게서 그림을 배워 자신도 금어가 될 꿈을 키운다. 최 참판댁의 심부름꾼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 귀녀 : 최 참판댁의 계집종. 상전인 어린 서희의 모욕에 '원한과 저주가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눈길'을 쏟을 만큼 노비 신분에 대한 열등감과 양반에 대한 원한이 가득하다. 별당 아씨가 사라지자 최치수의 사랑을 얻어 아이를 낳음으로써 면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김평산, 칠성과 모의하여 보복의 의지를 불태운다. 임신을 위해 자수당에서 칠성과 '추악하고 비인간적인' 밀회를 거듭하던 중, 뒤따라 온 강 포수와 하룻밤을 보낸다. 귀녀의 임신사실과 음모를 눈치 챈 최치수가 강 포수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에 사무쳐, 서둘러 김평산으로 하여금 최치수를 교살하게 한다. 최치수가 성불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최치수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윤씨 부인에게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당당하게 사실을 실토한다. 강포수의 헌신적인 옥바라지에 감동하여 모든 죄를 뉘우치고 옥중에서 아들 강두메를 낳은 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는다.

■ 김평산 : '개다리'(무반) 출신의 몰락양반으로 학식도 경제력도 없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는 인물. 게으르며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중인출신의 아내 함안댁을 수시로 구타하고, 손버릇이 나쁜 큰아들 거복의 행동을 은근히 조장하는 등 악행을 일삼아 마을사람들로부터 천시당한다. 최치수에 대해 같은 양반 출신으로서의 이상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조준구의 암시를 받아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귀녀와 함께 최치수 살해모의를 하고 삼끈으로 교살하나, 윤씨 부인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잡힌 후에 자신의 죄를 끝까지 부인하며 떠넘기는 등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 조준구 : 몰락양반의 후예로 최치수의 재종형. 작가가 지적한, 『토지』의 가장 속악한 인물이다. 기질적으로 간교하고 음험하며 교만하다. 먼 친척인 최 참판가에 유하면서 김평산에게 최치수의 살해를 넘지시 암시하여 최치수 살해에 간접적으로 관여한다.

강포수 : 지리산 일대에 이름난 명포수. 무성한 구레나룻에 완강한 골격, 힘줄이 솟은 큰 손등을 가졌다. 이 빠진 주막집 할머니가 주어다 길러 그 성을 따라 강씨이다. 노루사냥설화로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 최치수가 구천을 쫓으러 산에 갈 때 수동과 함께 동행하며, 오발사고로 수동을 다치게 한다. 이 일로 최 참판가에 머물면서 귀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귀녀가 옥에 갇힌 후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바치다가 옥중에서 출생한 아이를 거두어 사라진다.

박수동 :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우직하고 정이 깊으며 사려 깊다. 마음이 혼란한 구천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으나, 구천이 달아나자 그를 잡으러 최치수의 산행에 따라가는 운명에 처한다. 산행중에는 젊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기도 한다. 구천을 발견하자 놓아주고 강 포수의 오발사고로 성난 산돼지에게 다리를 다친다.

또출네 : 평사리의 미친 여자. 아들이 동학당으로 포살되자 실성하여 마을을 떠돈다. 최치수가 살해당하던 날 그곳에 불을 질러 함께 죽는다.


■ 이용 : 평사리의 상민. 부드럽고 자상하며 인색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 주는 성품. 월선을 사랑하나 신분차이로 헤어지고, 강청댁과 결혼하나 정을 못 붙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간다.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월선을 바라보고만 사낟. 하동에서 주막을 하던 월선이 강청댁의 질투로 떠나버리자 심한 갈등을 겪으며 일시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 공월선 : 무당 월선네의 딸로, 백부 공 노인이 사는 용정으로 서희 일행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용과 평생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인물로서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다. 이용과 서로 사랑하나 천민의 딸이라는 이유로 헤어지고, 이용은 강청댁과 결혼한다. 20살 연상의 봇짐장수에게 시집갔으나 살지 못하고 돌아와, 하동 읍네에서 주막집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웃집 사내아이인 천석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기도 한다. 가끔 용이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강청댁의 행패에 못 이겨 백부인 공 노인을 따라 용정에 가기도 한다.

※ 출처 : 『박경리대하소설 토지 인물사전』
이 인물 사전에는 더 많은 내용들이 실려 있지만, 2권에 나왔던 내용들로만 정리했다. 왜냐하면 이 인물 사전에는 엄청난 스포일러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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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06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ow

목나무 2018-11-07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정말이지 대하소설에는 눈조차 안돌아가네.... 그래도 이십대때는 대하소설들 꽤나 읽었었는데....
<토지>와 <혼불>은 꼭 완독하고 싶은 소설인데 언제나 손이 갈지...ㅎㅎㅎㅎ;;;
다행히 뒷북소녀에게는 <토지>가 재미있다 하니 곧 완독할 듯... ^^

뒷북소녀 2018-11-07 12:39   좋아요 0 | URL
저도 있어요. <토지>, <혼불>, <임꺽정>까지.
저는 요즘 나오는 소설들에 흥미가 떨어져서요... <열하일기>부터 시작해서...그리스 고전까지... 고전들만 파고 있어요. <토지>는 예전에 읽어서 줄거리도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또 재미있더라구요.
우리 다음에 꼭 <혼불> 같이 읽어요.

레삭매냐 2018-11-07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쓸에 나오는 월선이가 맨 끝줄의 동일인물
이던가요?

대하소설은 정말 끈기가 없으면 읽지 못할
듯 싶네요.

뒷북소녀 2018-11-07 22:22   좋아요 0 | URL
제가 알쓸을 안 봐서요...월선이가 맨 끝줄의 동일인물?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저도... 끈기는... 없지만... 그래도... 없는 끈기라도 강제로 만들어 가면서 읽고 있어요.
 
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지』 1권은 <수학의정석> 책에서 집합과도 같다.
벌써 몇 번을 읽었는지 인물들이 주고 받은 대화까지 고스란히 기억할 정도다.
하지만 2권으로 바로 넘어갔던 적은, 『토지』를 처음 읽었을 때, 그 한번 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1권은 더이상 읽고 싶지 않다. (물론 이번에는 반드시 완독을 할테지만) 혹시 다음에 또 읽게 된다면, 다음에는 2권에서부터 시작하리라. 그래서 정리해 본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을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토지』 1권, 39쪽


   『토지』는 이렇게 한가위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경남 하동의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 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인데, 1권은 크게 3개의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최참판 댁 별당 아씨가 근본도 모르는 구천과 야반도주를 했다. 그의 남편 최치수는 재종 조준구를 서울로 보내 엽총을 구해 오라고 하는 한편, 사냥으로 이름 난 강포수도 데려오라고 한다. 욕심이 많은 귀녀는 최치수의 아들을 낳아 신분상승을 꿈꾸며 이름만 양반인 김평산과 계략을 꾸민다.
   최참판 댁 윤씨 부인은 갈수록 시름이 깊다. 20여년 전 김개주로부터 치욕을 당했을 때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하고 그의 아들 김환을 낳았다. 구천이 환이라는 사실은 윤씨 부인의 죽음을 막았던 간난 할매와 바우 할아범, 문의원, 연곡사의 우관스님만 알고 있다.
   최참판 댁 밖에서는 월선과 이용의 기구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당 딸에게는 절대 장가 보낼 수 없다는 어머니 때문에 강청댁과 결혼한 이용. 하지만 월선이 10년 만에 다시 하동 읍내로 돌아와 주막을 차리게 되자 강청댁은 하루가 멀다하고 남편에게 강짜를 부린다. 심지어 월선을 찾아가 행패를 부려 월선이 또다시 마을을 떠나게 만든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천과 별당아씨는 거지와도 같은 행색으로 지리산을 떠돌아 다닌다고 한다. 과연 윤씨 부인의 선택이 옳았던 것일까? 아들을 생각했다면, 하인으로라도 곁에 붙잡아두고 지켜봐야 했던게 아닐까.
   1권에서 가장 답답했던 인물은 두 여자 사이에서 우유부단했던 이용이다. 어머니가 월선이를 반대했고,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다면 마음을 다잡았어야 했는데 월선과 강청댁 사이에서 흔들리는게 너무 답답해 보였다. 강청댁을 버리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월선을 잡지도 못하고. 아마 강청댁이 가장 답답했던 부분도 이 부분이리라. 그러니까 매일 그렇듯 강짜를 부리지.

 

 


1권 주요 사건별 인물 정리

■ 윤씨 부인 : 최 참판가의 안주인이며 최치수의 어머니. 큰 키, 곧은 상체, 두드러진 뼈대에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여성으로 당당하게 집안의 권위와 재산을 지켜나간다.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기도드리러 갔다가 휴양차 와 있던 김개주에게 겁탈당한다. 문 의원과 월선네의 도움으로 무사히 김환을 낳고 이 사건은 집안의 비밀로 묻어버린다. 불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치수에게 냉정한 어머니가 되며, 김환에 대한 어미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찾아온 그를 하인으로 곁에 두며, 며느리 별당아씨와의 불륜을 용인한다.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저울의 추처럼 갈등을 안겨주어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김개주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 오류인듯. '윤씨 부인은 아무런 변화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굳은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1권 369쪽)

■ 최치수 : 호는 석운. 최 참판가의 당주. 불륜에 대한 죄의식으로 냉엄한 어머니에 의해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며 방약무인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또한 부정적이고 인간혐오적인 선비 장암 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아 매사에 냉소적이다. '온갖 신경질과 우수가 감도는 모습', '당장에 눈을 부릅뜨고 고함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을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여자를 혐오하여 별당아씨를 냉정하게 대하며, 조준구와 어울려 자학적으로 여자들을 상대함으로써 남성을 잃는다. 또한 속박 당하지 않기 위해 집안의 재산관리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별당아씨가 구천과 도망한 후, 총을 구해 그들을 찾아나서지만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만다.

■ 김환 : 구천. 윤씨 부인이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들. 준수한 용모에 고귀한 풍모와 인품을 지녔으며, 우관은 '삭발 안 한 비구요 투구 없는 장수'로 비유한다. 연곡사에서 성장하다 동학혁명 당시 아버지인 김개주를 따라다닌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추척의 눈을 피해 방랑하다가 윤씨 부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최 참판가에 찾아간다.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갔을 때 성만을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무주구천동에서 왔다 하여 구천이로 불린다. 별당아씨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윤씨 부인의 도움을 얻어 산으로 도망한다.

■ 김개주 : 호는 해월(海月). 중인출신이며 우관 스님의 동생. 형인 우관 선사가 있는 연곡사에 휴양차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 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는다.

■ 간난 할매 : 바우 할아범의 처. 윤씨 부인의 몸종으로 최 참판가에 와서 일생을 보낸다. 자식이 없어 조카뻘이 되는 김이평의 둘째 영만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는다. 최치수 부친의 죽음과 삼수 할아버지(쇠돌)의 죽음, 최 참판가의 손이 귀하게 된 까닭 등의 내력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윤씨 부인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 김환의 정체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 김길상 : 고아로 구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라며, 금어(金魚)인 혜관에게서 그림을 배워 자신도 금어가 될 꿈을 키운다. 최 참판댁의 심부름꾼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 귀녀 : 최 참판댁의 계집종. 상전인 어린 서희의 모욕에 '원한과 저주가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눈길'을 쏟을 만큼 노비 신분에 대한 열등감과 양반에 대한 원한이 가득하다. 별당 아씨가 사라지자 최치수의 사랑을 얻어 아이를 낳음으로써 면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김평산, 칠성과 모의하여 보복의 의지를 불태운다.

■ 김평산 : '개다리'(무반) 출신의 몰락양반으로 학식도 경제력도 없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는 인물. 게으르며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중인출신의 아내 함안댁을 수시로 구타하고, 손버릇이 나쁜 큰아들 거복의 행동을 은근히 조장하는 등 악행을 일삼아 마을사람들로부터 천시당한다. 최치수에 대해 같은 양반 출신으로서의 이상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조준구의 암시를 받아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귀녀와 함께 손을 잡는다.

■ 조준구 : 몰락양반의 후예로 최치수의 재종형. 작가가 지적한, 『토지』의 가장 속악한 인물이다. 기질적으로 간교하고 음험하며 교만하다.

■ 이용 : 평사리의 상민. 부드럽고 자상하며 인색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 주는 성품. 월선을 사랑하나 신분차이로 헤어지고, 강청댁과 결혼하나 정을 못 붙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간다.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월선을 바라보고만 사낟. 하동에서 주막을 하던 월선이 강청댁의 질투로 떠나버리자 심한 갈등을 겪으며 일시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 공월선 : 무당 월선네의 딸로, 백부 공 노인이 사는 용정으로 서희 일행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용과 평생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인물로서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다. 이용과 서로 사랑하나 천민의 딸이라는 이유로 헤어지고, 이용은 강청댁과 결혼한다. 20살 연상의 봇짐장수에게 시집갔으나 살지 못하고 돌아와, 하동 읍네에서 주막집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웃집 사내아이인 천석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기도 한다. 가끔 용이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강청댁의 행패에 못 이겨 백부인 공 노인을 따라 용정에 가기도 한다.

※ 출처 : 『박경리대하소설 토지 인물사전』
이 인물 사전에는 더 많은 내용들이 실려 있지만, 1권에 나왔던 내용들로만 정리했다. 왜냐하면 이 인물 사전에는 엄청난 스포일러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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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06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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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되지 않은 이별,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첫 이별은 담담했지만, 여러 번의 이별이 거듭될수록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물을 참느라 눈알이 아플 정도였다.
빨리 읽히는게 너무 아쉬웠던 책. 2016년, 왜 소설가들이 뽑은 최고의 소설이었는지 읽고나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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