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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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178쪽

전쟁 때 학살로 가족들을 모두 잃은 시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누군가의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향한다. 하와이에서 고된 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을 때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난다. 독일의 유명 화가였던 그는 영수증에 낙서처럼 그린 그녀의 그림을 보고는, 자신과 함께 독일로 가자고 한다. 마티아스가 가는 곳마다 그런 제안을 해 데려온 여자가 여럿인 줄 몰랐던 시선은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따라 뒤셀도르프로 향한다. 뒤셀도르프에 도착하고나서야 마티아스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시선은 폭력적인 마티아스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 앞에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요제프 리가 나타난다. 그는 시선이 진짜 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이것을 알게 된 마티아스는 더욱 교묘하게 시선을 괴롭혔고 급기야 시선은 마티아스를 떠나기로 한다. 시선이 떠나자 마티아스는 유서를 남겨놓고 자신의 집 4층에서 뛰어내려 죽는다.

사랑했기에 나의 배신을 견딜 수 없었다 썼고, 그럼에도 그림과 집과 모든 재산을 내 앞으로 남겼으므로 나는 온 유럽의 증오를 받아내야 했다.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가 되었다. 미디어는 지금보다 느렸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금 사람들 못지않게 가십을 사랑했다. 조롱헤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훨씬 짧았고 말이다. 창문으로 날아드는 깨진 판석, 집 앞에 버려지는 오물, 길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위협들이 도를 넘어섰다. 마티아스가 바란 대로였다. 아무도 그의 의도를 해득하지 못했고, 돌바닥에 깨진 그의 머리가 마지막으로 계획한 것들은 차곡차곡 실행되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178쪽

"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어"(61쪽)서 사람들은 마티아스의 유서만 믿었고, 시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보려하지 않았다. 시선은 그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요제프 리와 함께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선으로부터,』는 시선의 10주기를 앞두고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절대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던 시선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10년만에 처음으로 그들만의 특별한 '제사상'을 준비한다. 그들은 한때 시선이 머물렀던 하와이를 여행하며 각자 가장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들을 제사상에 올리기로 한 것.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시선'을 추억하며 그녀의 생각을 더듬어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선'의 삶은, 20세기를 살았던 여느 여성들과는 달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티아스와의 관계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비록 그 관계 때문에 더이상 그림은 그릴 수 없게 됐지만, 여느 여성들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가 없었다면 매일 육체 노동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선' 자신 또한 그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심시선'이라는 이름은 정세랑 작가의 돌아가신 할머니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바꾼 것이라고 하는데,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작가의 말」)고 한다.

20세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런 '운'을 가지기 힘들었다. 작가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시선'처럼 살 수 없었던 20세기 여성들의 삶일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

173쪽

한편, 함께 여행을 간 가족들 중에는 시선의 손자 '규림'이 있다. '규림'은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학원을 그만두고 학교를 옮기고 싶어했다. 규림은 '도영'과 여사친 '한빛'이 부딪칠 때마다 특별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는데, 규림의 휴대전화가 꺼져있던 사이 규림 역시 포함되어 있던 단톡방에서 사건이 터졌다. 도영이 한빛의 사진을 합성해 남자 아이들이 있던 단톡방에 올린 것이다. 도영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 규림은 아무것도 모른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한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규림에게 서운함을 표현했다. 규림이 억울하다고 하자 한빛은 평소 그의 태도를 지적하며,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무마시키는 미소였다고, 도영보다도 꼴 보기 싫었다고"(172쪽) 한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멍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173~174쪽

어떤 인과는 명확히 기억되어야 한다.

303쪽

최근 정치, 문학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직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 대신 "피해 호소인" 혹은 "문제 제기하신 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 또한 이런 쪽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여기저기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2차 가해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한 권의 책에, 최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모든 입장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반갑다. 당연히 그 입장은 내가 조리있게 정리할 수 없었던 내 생각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 166쪽

이런 문장도 마음에 들었고, 세심하게 출처를 밝힌 작가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 속에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직업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직업과 관련하여 인터뷰를 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지만 혹 누가 될까 소중한 이름들을 가려두고자 한다"(「작가의 말」)는 이런 마음 씀씀이도 좋았다. 사적으로 나눈 대화를 그대로 소설에 쓰거나 소설로 타인의 삶을 강제로 아웃팅한 작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들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작가로서 그녀의 문장들이 아직 완숙되지 않았다는 것. 읽다보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이 튀어나왔다. 지금껏 조금 다른 장르의 글들을 써왔고, 나와 관심사가 달라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래도 영화와 미디어를 즐기지 않는 탓일까.) 앞으로 나아갈 그녀의 행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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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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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십니까」 _157쪽

원래부터 집순이는 아니었다. 주말이 되면 산으로, 바다로 꼭 뛰쳐나가야 했고 계절마다 색색이 피는 꽃들을 모두 보고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요즘처럼 매일 집과 회사를 쳇바퀴처럼 돌고 있어도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6월에는 꼭 제주도를 가보고 싶었다. 6월이면 곳곳에 만개하는 수국을 보고 싶었고, (원래는 생일에 맞춰 올라가고 싶었지만 제주도의 장마는 좀 더 일찍 찾아온다고 하니) 장마가 오기 전에 한라산도 다녀오고 싶었다. 이때쯤이면 끝날거라고 생각해서 예매해뒀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내년 6월에는 꼭 다녀올 수 있기를 바라며.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이달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0'원일지도 모르겠다. 자가용만 이용해서도, 일 없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서도 아니다. 되도록 동네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평소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장기화되면서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예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전의 일상이 점, 선, 면의 방식이었다면 선은 지우고 면은 축소해 '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요즘. 관계와 사회적 접촉면의 확장 속에 있던 우리는 이제 일상의 다른 국면을 맞았다. 157쪽

몇 달 째 나의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0'원이다. 집과 회사 근처에서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무증상 확진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어딘가를 방문하는게 조심스럽다. 내가 아니라 '나 때문'이 될까봐.

우리가 4월에도 물리적 거리 두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유행은 피할 수 없더라도 대량의 환자가 발생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다. 조금 불편해지고 외롭거나 막막해졌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의료진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사명감으로 버티며 통과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세를 고쳐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란 말할 수 없이 나약하기도 한 존재라서 다시 이렇게 글을 쓰려고 혼자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단절감이 무겁고, 많은 사람에게서 나로 이어졌던 관계의 선과 함께 공유했던 장소와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159쪽

 

 

 

「안녕이라고 말해주지 못한 이별들」_206쪽

지난주에 이모가 돌아가셨다. 지속적인 치료와 돌봄이 필요해서 요양원에 계셨는데, 몇 달 동안 면회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바람에 한달 전부터 아무것도 못 드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찾아뵐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입맛이 없으셔서 잘 못 드셔서 가족들이 찾아갈 때마다 겨우 드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더 일찍 기력이 쇠하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엄마와는 18살이나 차이가 나서 외할머니 같았던 이모. 마침 장례식장도 코로나 거점병원 안에 있어서, 아주 가까운 친지들을 제외하고는 조문도 받지 않았고 집집마다 대표로 1명만 조문을 받아서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코로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이렇게 외롭게 만든다. 가족이, 가족다울 수 없게 만드는 코로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줘서 잔인한 바이러스"라고 한 정은경 본부장의 말이 생각난다. '안녕이라고 말해주지 못한' 나의 이별.

할머니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엄마는 할머니에게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어? 하고 물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답이 나일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떤 대답이든 좀 마음이 서운할 수 있다고 예감하면서도 누구였어? 라고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다 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주었다. 다 보고 싶다. 21쪽

 

 

 

「사랑하죠, 오늘도」_115쪽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 22쪽

김금희 작가의 글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담담한 고백이 또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사랑을 확신하며 말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이 구절 때문에 나는 이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소설이 아닌 일상 속 그녀 모습이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양희처럼, 그녀 역시 담담하게 보내는 일들이 많았고 멋부리지 않는 글들이 좋았다.

2020년 1월,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권위와 관행에 맞섰던 그녀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 라고.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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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글프네요. 지인이 돌아가셔도
문상도 못하는 상황이라니.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디스토피
아의 전초가 아닐지...

어제 다녀온 화성 궁평항 가는
길의 들꽃들은 정말 이뻤습니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김희정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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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비선형 세상에서, 날수를 세면서!

1982년 이탈리아 토리노 출생.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소수의 고독 』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발표된 적이 있는) 소설을 발표해 이탈리아에서 권위있는 문학상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가 중국을 넘어 이탈리아에서도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2월 29일. 도시 전체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의 작품을 읽은 적도 없고,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이런 사실들의 나열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염의 시대'를 함께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며 이 공백기를 보내기로 했다. 뉴스 예보를 주시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이해하고 싶어서다. 때때로 글쓰기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때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게 하는 바닥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이 전염이 우리 자신에 대해 폭로하는 것에 귀를 막고 싶지 않다. 두려운 비상사태가 종료되면, 우리의 일시적 자각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질병의 본질이다. 10쪽

코로나가 우리 도시를 덮쳤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출을 할 수 없어서 집에서 머물며 평소보다 책 읽을 시간이 훨씬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즈음 내가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매일매일 늘어가는 '숫자'들 뿐이었다. (참고로 4월 28일, 오늘이 우리나라에 코로나 환자가 처음 발생한지 10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한다. 정말 우리는 미치도록 숫자만 세고 있구나.)

거리는 멀지만, 이탈리아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나보다. 심지어 이 책을 쓴 작가까지도.

아마 전염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수를 세는 것 외엔 없기에 그 구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우리는 감염자와 완치자, 사망자의 수를 세고, 입원자의 수와 학교 결석 일수를 센다. 주식 시장에서 날아간 수십억과 마스크 판매 수, 진단 시약의 결과가 나오는 시간을 센다. 감염원으로부터의 거리, 예약 취소된 호텔 방 수를 세고, 우리의 유대 관계와 단념한 것들을 센다. 그리고 날수를 세고 또 센다. 특히 이 비상사태가 시작되고 서로 떨어져 지낸 날수를 센다. 75~76쪽

몇 년 동안 보려고 미뤄뒀던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특보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밤 늦도록,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계속해서. 81쪽

그는 지금의 시대를 '미친 비선형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확진자의 증가세가 선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이고 폭발적으로, 비선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은 본래 비선형적이다.(21쪽)

이렇게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가 중국을 주시하지 않았고, 밀라노는 지방 도시를 신경 쓰지 않았으며, 남부 이탈리아는 북쪽을 보지 않았고, 나머지 유럽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투명하지 않은 정보 제공, 자극적인 제목만 뽑는 언론들, 전염병처럼 유포되는 가짜 뉴스들, 이런 것들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날수를 세면서, 슬기로운 마음을 얻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 77쪽

작가는 3월말까지 글을 썼으며, 편집은 4월 7일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길지 않은 글들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은 전염병을 겪고 있는 작가의 글을 이토록 신속하게 책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빨리 돌아갈 수 있구나. 그러니까 전염병의 확산속도도 그렇게 빠를테지만.) 무엇보다 양심적인 책값도 마음에 든다. 심지어 인세는 코로나 감염자를 치료하는 이탈리아 현지 의료단체와 구호단체에 전액 기부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서 빨리 '전염의 시대'가 끝나고, 예전처럼 서로 왕래하며 지내는 시대가 오길 바라며.

여태껏 일상생활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정확히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정상 상태가 한순간에 우리가 지닌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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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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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기도 한 우스운 소설들!

『우스운 사랑들』은 총 15권으로 구성된 '밀란 쿤데라 전집' 시리즈의 2권. 7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유일한 단편집이라고 하니 더 의미가 있는듯 하다. 『농담』이 먼저 출간되었지만, 사실은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부터 써놨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진지하지 못한 관계, 우스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목록은 이렇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

「영원한 욕망의 황금 사과」

「히치하이킹 게임」

「콜로키움」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이십 년 후의 하벨 박사」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누구도 웃지 않으리」는 『농담』 때문에 파멸한 '루드비크'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자투레츠키로부터 자신의 논문에 대한 논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의 논문을 읽은 '나'는 그의 논문이 너무나도 형편 없었기 때문에, 논평을 써줄 수가 없었다. 자신 뿐아니라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인데 굳이 자신이 총대를 메고 자투레츠키를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에 그는 자투레츠키를 일단 돌려보낸 다음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너무나도 간절했던 자투레츠키는 '나'의 의중을 눈치채지는 못한채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닌다. 그냥 솔직하게 논문의 내용이 최악이기 때문에 써줄 수 없다고 하면 될텐데,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로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게된다. 그런 일들 때문에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주변 사람들, 학교 당국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제발! 내가 그 사람들 우습게 만들어 버릴 거야. 이거 전부 그저 농담일 뿐이라니까."

"농담하는 시대가 아니야. 지금 우리 시대엔 모든 걸 심각하게 받아들여." 「누구도 웃지 않으리」 39~40쪽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느냐고 묻는 연인에게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스운 '농담' 같은 것이라며, 다른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 그런 거라며 가볍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 몰랐다. 현재의 의미를. 그리고 농담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 12쪽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에 등장하는 에드바르트의 형은 스탈린이 죽은 날 한 소녀에게 장난을 쳤다가 학교에서 축출 당하고 만다. 스탈린이 죽은 줄도 몰랐던 에드바르트의 형은 한 여학생이 부동자세로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 주위를 뱅뱅 돌며 크게 웃었다. 그 여학생은 이 웃음이 정치적 도발이라 평가했고, 그 일 때문에 그의 형은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생활을 즐겼다.

훗날 에드바르트 또한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하느님을 믿는 여자친구를 따라 성당에 갔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된 믿음을 보였던 에드바르트는 그가 재직중인 학교 위원회에 소환된다. 당시 종교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하느님을 믿고 성당을 다니는 것은 그들이 따르고 있는 당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드바르트는 네 명의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믿음이 과장된 것이 아닌 진지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자신의 행동이 장난이었다고, 과장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소환한 사람들의 진지함을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되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들은 6개월 후에 다시 판단하자고 했고, 그동안 교장이 그의 교화를 맡았다. 사실 교장은 에드바르트의 형이 그 옛날 장난을 쳤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에드바르트의 여자친구 알리체는 종교 탓이기도 했겠지만, 엄청나게 얌전하고 조신한 학생이었다. 그에게 가벼운 뽀뽀 정도만 겨우 허락할 정도였는데, 이 사건 이후로 알리체의 태도가 돌변한다. 알리체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를 마치 순교자처럼 여겼다. 그런 순교자에게 알리체는 기꺼이 자신의 입술과 몸을 맡겼다. 에드바르트가 그렇게 원할 때는 내주지 않더니, 이제서야 종교의 이름으로. 정말 웃긴 사랑이다.

"무엇 때문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해야만 하게 하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진실함을 미덕으로 여겨야만 하는가?"

(…)

"형이 그 사람한테 진실만을, 정말로 그 사람에 대해 형이 생각하는 것만을 말한다면 그건 형이 미친 사람하고 진지한 토론을 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이고 형 자신도 미쳤다는 뜻일 거야. 우리를 둘러싼 세상하고도 정확히 마찬가지야. 형이 세상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노라 고집한다면 그건 형이 세상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지 않은 어떤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건 자기 자신이 진지함을 다 잃어버린다는 거야. 나는, 나는 미친 사람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 자신이 미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만 해."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346쪽

정말 웃긴 해프닝은 「콜로키움」에 등장한다. 멋진 몸매를 가졌지만 얼굴 때문인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간호사 엘리자베트. 심지어 그녀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플라이슈만 또한 그녀에게 치를 떤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스트립쇼를 (상징적으로 다 벗은 상태로) 하지만 모두들 외면한채 수면제를 건네며 자라고 하자 다른 방으로 건너간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플라이슈만이 가스 냄새를 맡고 그녀의 방으로 달려가고, 그곳에서 플라이슈만은 벌거벗은 채로 잠든 엘리자베트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보기를 원치 않았지만, 자살을 시도한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그녀의 벌거벗은 몸매. 그런데 여의사가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 없었던 엘리자베트.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옷을 벗고 완벽하게 스트립쇼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면제를 먹어서 잠이 왔고, 그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려고 가스 버너에 물을 끓였는데 그 사이에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분명 그 버너 위에는 물이 바닥난 냄비가 있었음에도 남자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엘리자베트가 잠에서 깨 자신의 실수였다고 밝혀도 플라이슈만은 자신이 너무 큰 죄책감을 느낄까봐 그것을 감싸주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플라이슈만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든 남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유독 자신만은 거부했다던 창녀의 이야기를 들려준 과장. 창녀는 자신이 아닌 과장이 자신을 원하게 만들어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고 한다. 나머지 한 남자는 모든 여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절대 엘리자베트와는 관계를 맺지 않은 하벨 박사. 그녀가 그토록 자신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와 관계를 맺지 않는게 마치 유행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하벨 박사.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매력있고, 누가 누구를 원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것.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혼자만 원한다면 우스운 꼴이 된다는 것.

아, 사랑이, 에로티시즘이, 이토록 가볍고 우스운 것이었나.

여기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모두 『농담』이면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전집을 모두 완독하고 나면 더 많은 작품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그가 쓴 장편소설들과 닮았다. 주제의식도 비슷하고, 구성도 닮았다. 어쩌면 이 단편들이 그가 본격적으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들의 밑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보니 그가 집착하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농담』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시종일관 '농담(진지하지 못한 이야기)'을 던지고 있다. 심지어 농담이 통하지 않는 시대, 농담을 할 수 없는 시대인데도 말이다. 그는 왜 '농담'에 집착하는 것일까? 조상 중에 농담을 하지 못해서 죽은 귀신이 있었나 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쓸 때 '7'이라는 숫자에도 집착한다. 그의 첫 소설인 『농담』을 쓰고 난 후부터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원래 6부로 구상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7장을 덧붙여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수 역시 7편. 이것 역시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

제 소설들은 7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진 동일한 건축술의 변형인 셈이죠. 『소설의 기술』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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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2-02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요즘 쿤데라 전집 읽기 친구와 함께 하고 있어요. 쿤데라의 맨 처음 시작, 가장 나중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이 책도 조만간. 읽은지 너무너무 오래라 사진 올려주신 거 보고 다시 뽑아서 응?이런 표지였냐? 하고 확인했네요. ㅎㅎㅎㅎ

뒷북소녀 2019-12-02 21:32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지인들이랑 전집 읽기를 하고 있는데 정말 좋아요^^ 꼭 완독하신 후 함께 이야기 나눠보아요.

레삭매냐 2019-12-23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쿤데라의 책은 <무의미의 축제> 읽은
게 다네요 ㅠㅠ

<참을 수 없는... >부터 읽어야 하는데
만날 읽다 말고, 읽다 말구의 무한반복...

뒷북소녀 2019-12-31 15:23   좋아요 0 | URL
아, 전집에 없어서 <무의미의 축제>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책도 넣어야겠어요.^^
요즘 계속 읽고 있는데... 읽을수록 재미있어요.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요.

새해에도 멋진 활동과 글 부탁드려요.
레삭매냐님^^

서니데이 2019-12-24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북소녀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뒷북소녀 2019-12-31 15: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저도 올해 서니데이님의 글들을 만나 즐거웠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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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삶은 다른 곳에 있어요! 완전히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가 그 유명한 '프라하의 봄' 시기에 집필을 시작해서 1968년 러시아 침공 이후에 끝마친 장편소설 『삶은 다른 곳에』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삶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훗날 시인이 되는 '야로밀'은 정확하게 어디에서 잉태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공원 벤치, 아니면 어느 오후 시인의 아버지의 친구의 아파트, 혹은 어느 날 아침 프라하 근교의 한 낭만적인 장소"(9쪽) 중 하나일 텐데, 시인의 어머니는 프라하 근교의 한 낭만적인 장소에서 잉태되었길 바랐다. 그곳만이 시인이 잉태되기에 적당한 곳이니까.

시인이 잉태되어 부랴부랴 결혼한 시인의 부모. 시인의 아버지는 이미 잉태된 시인을 떼버리자고 할 정도로 무심했고, 그런 아버지 때문에 시인의 어머니는 점점 더 시인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들은 수용소에서 그가 죽었다는 통지서를 받게 된다.

어머니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시인을 향할 수밖에 없었고, 시인 또한 그런 관심과 시선을 즐겼다. 특히, 어머니는 "인생은 잡초 같아요."(27쪽) 같은 시인이 짧게 내뱉는 단어들의 조합을 듣고 "문장의 각운"(25쪽)이 느껴진다며 칭찬했고 훗날 시인이 될 재능을 발견했다. '프라하 근교의 한 낭만적인 장소'에서 잉태된 것은 야로밀일뿐, 사실 시인은 이때 잉태된 것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로부터)

어머니는 재능 있는 아들의 조기교육을 위해 한 화가에게 미술 교육을 맡긴다. 그런데 이 화가는 삐뚤삐뚤한 시인의 그림을 바로잡아주기는커녕 그것이 바로 예술적 재능이라고 말하고, 항의하러 온 어머니의 몸을 탐하기도 한다.

소년 '야로밀'은 왜 시를 썼을까?

사춘기 무렵의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이즈음 야로밀도 성적 충동이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외출한 후 하녀 마그다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게 된 야로밀. 치밀하게 준비를 했지만, 마그다가 욕실 열쇠구멍을 쳐다보는 것 같자 이내 자기 방으로 도망쳐 버린다. 야로밀은 대담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격렬한 혐오감"(89쪽)을 느꼈고, 그 혐오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때의 불발된 행동과 감정들을 시로 써냈다.

내가 이토록 작디 작음을 문득 깨닫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도망을 치는가? 위를 향한 도피만이 밑으로 낮아지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책상에 앉아 그 작은 책(화가가 다른 누구에게도 빌려 주지 않는다고 했던 그 소중한 책)을 펼치고 제일 좋아하는 시들에 집중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으니, 저 멀리 그대 눈동자가 잠기는 바다가 있고, 또다시 눈앞에 마그다가 보이고, 그렇다, 그녀 몸의 고요 속에 깃든 눈송이를 포함하여 거기 모든 게 있었고, 닫힌 창을 너머 강물 소리가 방으로 들어오듯 찰랑이는 물소리가 시 속으로 들어왔다. 야로밀은 나른한 욕망이 온몸을 사로잡는 느낌이 들었고, 책을 덮었다. 그는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내 엘뤼아르, 네즈발, 비에블, 데스노스 식으로 자기가 직접 글을 쓰기 시작하며, 운율도 각운도 없이 짧은 시행들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이건 그가 읽은 시들의 변주였지만 이 변주 속에는 그가 조금 전 겪은 것이 들어 있었고, 녹아내려 물로 변하는 슬픔이 있었으며, 수면이 올라가고 또 올라가 내 눈까지 차오르는 초록빛 물이, 몸이, 슬픈 몸, 내가 쫓아가는, 한없는 물을 가로질러 내가 쫓아가는 물속에 잠긴 몸이 있었다.

그는 이 구절을 큰 소리로, 선율적이고 비장한 목소리로 여러 번 읽으며 열광했다. 이 시의 근원에는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고 욕실 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체험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위에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가 느낀 혐오감은 저 아래 있는 것이었다. 저 아래에서 그는 두려움에 질려 손이 축축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 이 위에서, 시 속에서 그는 자신의 초라함과 아주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었다. 열쇠 구멍과 자신이 비겁하게 굴었던 사건은 이제 그가 딛고 뛰어오르는 발판일 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방금 겪은 것에 종속되지 않았고, 그가 방금 겪은 것이 그가 쓴 것에 종속되어 있었다. 90~91쪽

*밑줄 : 책 본문에서 볼드체로 표시된 부분.

하녀 마그다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생긴 혐오감 때문에 쓴 시인데, 야로밀은 자신이 쓴 이 시를 읽고 열광한다. 더 웃긴 것은, 그의 어머니 또한 이 시를 엄청난 사상이 내재된 시로 여기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이 시의 진실을 안다면,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마그다를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이야기라는 것은 짐작도 못 했고, 물속의 사랑이란 그녀에게 무언가 더 일반적인 것, 사랑의 신비로운 범주 아니 불가해한, 그 의미는 예언의 의미를 추측하듯 그렇게 추측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라고 여겨졌다. 350쪽

이처럼 야로밀이 '시'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가 그를 "이 아래 세상"에서 "저 위"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위안이 있었다. 이 아래 세상, 일상의 삶을 살고, 학교에 가고, 어머니, 할머니와 점심을 먹는 여기에서는 단조로운 공허가 펼쳐져 있지만 저 위, 자신의 시 속에서 그는 푯말들을 세우고, 설명을 새긴 이정표들을 박아 놓았다. 그곳에서 시간은 서로 구분되고 달랐다. 그는 어떤 시의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건너갔고, (곁눈으로 흘깃 저 아래 세상을, 아무 일도 없이 끔찍하게 정체된 그곳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상상에 예기지 않던 지평선이 열리는 새로운 시기의 도래를 벅찬 황홀감 속에서 자신에게 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는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외모(또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겐 어떤 특별한 풍요로움이 있다는 굳건하고 든든한 확신을 가질 수도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택된 존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155~156쪽

시를 쓰면서 야로밀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외모(또한 삶)"가 "선택된 존재"로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신동'이라고 감탄하기까지 했으며, 저속한 내용의 시도 고상한 사상이 담겨있는 것으로 받아졌다.

야로밀은 어떻게 행동하는 삶으로 뛰어들었나?

이랬던 그가 각성하는 계기가 생겼다. 학창시절 함께 다녔던 수위의 아들이 있는데, 사실 이 친구는 아버지 때문에 왕따처럼 지냈다. 야로밀 역시 친구들로부터 하나씩 버림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둘은 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만난 수위 아들은 경찰관이 되어 있었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청년 야로밀이 시를 쓰며 추상의 세계(혹은 거울 속 세계)를 헤매고 다닐 때 그는 '행동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게다가 야로밀만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시의 세계'를 알고 있었고, 야로밀의 시를 알아봐 주었다.

야로밀은 이렇게 말하며 또다시 이런 남성적인 직업과 이런 기밀과 아내를 가진 동창이 부러웠고 또한 아내 앞에서 기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아내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부러웠다. 그는 그의 진짜 삶, 자기는 아무리 해도 다가가지 못하는 (갈색 머리 남자가 왜 잡혀갔는지 전혀 영문을 모르고, 그저 단 하나, 그래야만 했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잔인한 아름다움(또한 아름다운 잔인함)을 지닌 그 진짜 삶이 부러웠으며, 그 자신은 아직 들어가지 못한 (동갑인 옛 동창 앞에서 다시 한 번 쓰라리게 깨닫는다.) 그 진짜 삶이 부러웠다. 357~358쪽

야로밀은 수위 아들의 삶이 부러웠다. 자신은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어머니 테두리 안에서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심지어 독립적인 공간 하나 갖지 못해 어머니 눈치를 보고 여자친구 집만 전전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서 시의 세계로 숨어들었는데, 수위 아들은 그와 정반대인 '진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소심하고 수동적이며, 여성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자신과는 달리 남성적이며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 심지어 시까지 잊지 않고 있다니.

야로밀은 이런 부끄러움 혹은 분노를 빨간 머리 여자친구에게 내뱉는다. 여자친구가 잠깐 늦었을 뿐인데, 야로밀을 잠시 기다리게 했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늦었는지 여자친구를 추궁하는 야로밀.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이유가 중요한 일이길 원했던 야로밀 때문에 여자친구는 오빠가 국경을 넘으려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정도쯤 되면 야로밀이 진짜 중요한 일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친구 오빠 이야기를 들은 야로밀은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시대가 정해준) '의무'에 따라 행동할 때라고 생각하고는 수위 아들을 찾아가 여자친구 오빠를 밀고한다.

그는 (경찰서처럼 중요한 건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듯이) 수위실에 신분증을 제출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어떻게 걸어가는지, 한 걸음 한 걸음 어떻게 재듯이 걷고 있는지 보라! 그는 마치 어깨 위에 자신의 운명 전체를 지고 있는 것처럼 걷고 있다. 그는 건물 위층이 아니라 자기 삶의 위층,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 내다보게 될 위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420쪽

야로밀의 밀고 때문에 여자친구는 체포되고, 야로밀은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야로밀은 (유치하지만) 여자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자신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겠냐고 여자친구에게 물었더니 여자친구는 그냥 슬플 거라고만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야로밀은 자신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냐고 크게 화를 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라진 후 야로밀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여자친구가 풀려난 3년 뒤로 건너뛰어 버린다. 그녀는 예전부터 자신에게 의지가 됐던 '사십 대 남자'를 찾아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날 그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그 후 야로밀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야로밀은 그의 말처럼, 그녀가 사라지자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 죽음은 그렇게 위대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잉태와 달리 시인답지 않게) 며칠 뒤 감기에 걸려 죽었다. 심지어 어떤 이의 집에 갔다가 발코니로 쫓겨나는 바람에 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1부. 또는 시인이 태어나다

2부. 또는 자비에

3부. 또는 시인, 수음을 하다

4부. 또는 시인은 달린다

5부. 또는 시인, 질투하다

6부. 또는 사십 대 남자

7부. 또는 시인이 죽다

『삶은 다른 곳에』 역시 밀란 쿤데라의 여느 소설처럼 7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첫 소설인 『농담』을 쓰고 난 후부터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숫자'7'에 집착하고 있다.) 각 장의 제목처럼 1부, 3부, 4부, 5부는 시인의 이야기이며, 6부의 '사십 대 남자'는 여자친구가 시인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남자로, 여자친구 입장을 전한다. 2부에 등장하는 '자비에'는 시인이 창조해 낸 가상의 인물이다. '자비에'의 정체는 7부에서 밝혀지는데, 그는 자신이 현실에서 살 수 없었던 삶을 '자비에'를 통해 대신 살았다.

처음에는 야로밀, 자기 혼자밖에 없었다.

나중에 야로밀은 자신의 분신, 자비에를 만들어 내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삶, 꿈과 같고 모험에 찬 다른 삶을 지어냈다. 477쪽

누구나 단 하나 유일한 자신의 삶 외에 다른 삶들을 살아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당신 또한 실현되지 못한 당신의 모든 잠재적 삶들, 당신의 모든 가능한 삶들을 살아 보고 싶을 것이다.(아! 실현 불가능한 자비에!) 우리의 소설은 당신과 같다. 우리의 소설 역시 다른 소설들, 그렇게 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은, 다른 소설들이고 싶다. (…) 사람은 결코 자기 삶에서 나올 수가 없다면, 소설은 훨씬 자유롭다. 434쪽

『삶은 다른 곳에』는 '야로밀'(야로밀의 분신인 '자비에'까지)를 제외하면 주요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그러니까 하녀 마그다는 주요 인물이 아니라는 이야기) 아버지, 어머니, 빨간 머리 여자친구, 사십 대 남자, 수위의 아들, 영화학도, 노시인 등.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한 사람의 이야기로 특정 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살았다고, 그들 모두가 비슷한 일들을 겪었었다고.

앞서 읽었던 두 편의 소설, 『농담』, 『우스운 사랑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사실 할 이야기도 많아서 정리하기도 어렵다.) 『농담』부터 공통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인물 혹은 상황들이 있고, 그 모든 작품들 속에서 '농담' 같은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은 각각의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얽혀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 모든 작품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삶은 다른 곳에 있어요! 완전히 다른 곳에! 4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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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2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쿤데가 전작으로 가시나요?

ㅋㅋ 전 꼴랑 한 권 읽은 게 전부네요.

<참을 수>도 읽다가 말았더라는. 그것
도 두 번이나.

뒷북소녀 2019-12-02 21:34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ㅋ 전집 15권 도전 중입니다. 완주하고나면 자랑할게요. 참고로 엄청 재밌어요.ㅋ

plmokn7755 2021-04-3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쿤데라의 에세이에서 <삶은 다른 곳에>를 쓸 때 카프카의 K를 말하면서 인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었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