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날씨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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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최근 환경 관련 책을 몇 권 읽었다. 그렇다고 환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특별히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유난히도 더운 계절이 찾아오거나 예측할 수 없는 날씨를 마주하게 되면 한번쯤 기후에 대해 생각해 보고, 몇 번 사용하지 않고 버릴 것 같은 물건은 사지 않고(예를들면, 시즌마다 출시되는 텀블러 같은 것들), 가능하면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지 않게 음식을 먹을만큼만 주문하거나 깨끗하게 비우기(아예 안 먹을 음식들은 안주셔도 된다고 말하기), 이렇게 관련 책들이 서점 진열대에 올라오면 사서 읽는 정도. 나의 노력은 딱 그 정도다.(이것을 '노력'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작가는 '주먹'을 날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실제 효과는 크지 않은 다른 행동으로는 태양전지판 설치, 대중교통 이용, 에너지 절약, 지역 특산물 먹기, 비료 만들기, 찬물로 옷 빨고 자연 건조하기, 포장 줄이기, 유기농 음식 사기, 하이브리드 차로 바꾸기 등이 있다.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이런 노력들만 하는 사람들은 주먹을 날리고 싶은 대상에 '주먹'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비행기들이 전쟁이 벌어지는 유럽 땅 근처에도 가 보지 않고서 중서부 하늘만 순찰했다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75쪽


식단을 바꾸면 이산화탄소 발자국도 줄일 수 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환경 에세이 두 권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읽다가 그만둔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우리가 날씨다』를 먼저 완독하게 됐다.(『우리가 날씨다』가 더 읽기 편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읽다보니 두 책의 경계가 희미해져버렸다. 실제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같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는 우리가 먹는 것을 바꿔서 기후 변화를 늦춰보자는 이야기였고, 『우리가 날씨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지금 당장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침 점심으로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다면 세 끼 모두 채식으로 하는 식단의 평균보다 이산화탄소 발자국을 더 줄일 수 있다" (121쪽)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태도도 함께 지적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별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이 기후 환경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기분에 빠지는 것(예를들면, 전기자동차를 타면서 환경보호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편하려고 일회용 캡슐을 사용하면서 분리배출에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 등). 이 책 혹은 과학자들의 주장이 모두 옳은 것이라며 수용하면서 지금 당장 무언가 할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 우리 주변에는 이 두 가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엄청 많을 것이다. 물론 나부터가 그렇고.(이렇게 책을 읽는 것만으로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전기차로 화제를 돌려 볼까. 차에 전력을 공급하는 전력망이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점도 다시 따져 봐야 해. 중국에서는 전기의 47퍼센트를 석탄으로 만들어. 전기차로 바꾼다면 기후변화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거야. 전기차를 생산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기존 차량의 두 배나 된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해? 그리고 배터리 제조에 쓰이는 희귀한 광물 채굴이나, 땅에서 뽑아낸 것의 0.2퍼센트밖에 이용하지 못하고 나머지 99.8퍼센트(이제는 유독성 물질이 된)는 고스란히 오염 물질로 만들 정도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식의 환경 피해들은 또 어떻고?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 이상으로 아는 척을 하면 위허맿. 하지만 덜 아는 척하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하지. 203~204쪽

트럼프의 말보다 훨씬 더 치명적으로 과학을 부정하는 말이 있다. 바로 수용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면서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더 분개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상대는 바로 우리이다. 내가 내 자식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장본이다. 146쪽

그러고 있을 동안, 내가 생각하고 있을 동안─여러분이 생각할 동안, 우리가 생각할 동안─우리가 행동하느냐 행동하지 않느냐에 따라 세상이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82쪽

동물성 식품 소비를 확실히 줄이지 않으면 지구를 구할 수가 없다. 86쪽


우리가 이렇게 뭉그적거리고 있을 때도, 이 세상은 조금씩 아니 빠르게 파괴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관심을 갖고 뭔가를 하고, 뭔가를 느껴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다가도 단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정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60쪽)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탈것 대신 걸어다니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한끼만 먹는 다이어트도 하는데, 아침 점심으로 먹는 고기 양을 줄이는 것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동물성 식품 소비와 기후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와 『우리가 날씨다』에서 공통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의 식습관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지구를 구하기에 충분치 않겠지만, 식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지구를 구할 수 없다. 118쪽

우리는 전 지구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일어나든가 일어나지 않든가 해야 한다. 둘 중 하나다. 파도에 올라타든가, 빠져죽을 것이다. 우리의 불가지론을 극복하고,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우리를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우리가 불을 끌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터를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뭐라 말할 것인가? 251쪽

작가는 십 대 때 나치를 피해 도망친 할머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끝을 맺는다. 아무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할머니는 "뭔가 해야 해요!"를 외치며 마을을 도망쳤고, 결국 살아남았다. 할머니는 자기 자신만 구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결국 작가까지 구해낸 것이다. 그때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 역시 뭔가(이렇게 글을 써서 알리는 것)를 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는 세 번째 환경 에세이를 낼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을 일종의 자살로 본다면, 우리의 자살은 그로 인해 죽게 될 사람들이 아마도 우리가 아닐 거라는 사실 때문에 더 소름끼친다. 이미 기후변화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기후변화로 미래에 죽게 될 인구는 아이티나 짐바브웨, 피지, 스리랑카,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처럼 최소한의 탄소발자국을 만들어 내는 지역에 살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후변화로 죽었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이 죽을 것이다. 지략이 아닌, 자원이 부족해서. 222쪽

화석연료의 한도를 정하여 기후변화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국제 에너지 기구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필요한 재생 에너지 기반 시설을 갖추려면 적어도 53조 달러의 비용에 적어도 20년이 걸릴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그때쯤이면 기후변화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을 겁니다. 이와 달리 동물성 제품을 대체품으로 바꾼다면 온실가스 배출을 급속히 줄이면서 동시에 땅을 비워서 더 많은 나무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대기 중 탄소 초과분을 가둘 수 있게 하는 이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성 제품을 대체품으로 바꾸는 것이 너무 늦기 전에 기후변화를 되돌릴 유일한 실용적 방법인 것 같습니다.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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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2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보니, 우리가 즐기는 뜨건 물
샤워도 또한 지구별에 해로운 일이
라고 하더라구요...

조너선 사프란 포어, 분더킨트는 오래
전 타령이고 질소포장된 작가라는 점
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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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식단 선택이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자칭 '고기애호가'인 내가 몇 년 전에 사서 읽다가 그만 둔 책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소설에서 보여준 독특한 글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독특함으로 '육식주의자의 변명' 같은 것을 담아낸 책인줄 알았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항상, 내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누구나, 심지어 나의 관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이 책이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것은, 축산업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해 보면 결국은 누구나 고기를 멀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이미 그런 결론이 나올 줄 안다는 강력한 가정이었다. (당신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을 예상했는가?) 24쪽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고기(작가는 '동물'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고기'이므로 '고기'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에 대해 알고, 우리가 먹는 것을 바꿔보자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는 것은 '공장식 축산'이다. 작가는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가 먹고 있는 고기들이 어떻게 사육돼서 생산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소비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핵심은 '비윤리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핵심이다. 우리가 먹고 있는 고기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위험한 방법으로 생산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쉽게 연관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카고 대학에서 이루어진 최근 연구는 우리의 식단 선택이 지구 온난화에 적어도 운송 수단 선택과 맞먹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UN과 퓨 위원회에서 좀 더 최근에 발표한 권위 있는 연구 결과는 전 세계적으로 축산 동물들이 운송 수단보다 기후 변화에 더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실학 보여 준다. UN에 따르면, 가축 부문은 전체 온실 가스 배출량의 18퍼센트를 차지하며, 이는 차, 트럭, 비행기, 열차, 배를 비롯한 전체 운송 수단 부문보다 약 40퍼센트나 더 많은 것이다. (…) 잡식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보다 7배나 많은 온실 가스를 방출한다.

UN은 육류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장식이든 전통적인 농장식이든) 식량으로 동물을 기르는 것은 "한 지역에서 전 세계 규모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각한 환경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중략) [축산업은] 오염, 기후 변화, 대기 오염, 물 부족과 수질 오염, 생물학적 다양성 상실 등의 문제를 다룰 때 주요 정책의 주안점이 되어야 한다. 환경문제에 가축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 (…) 공장식 축산 동물 제품을 규칙적으로 먹는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본래 의미와 분리하지 않고서는 환경보호주의자라고 자처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80쪽

그러니까 비윤리적인 공장식 축산 동물이든, 전통적인 방식으로 방목해서 키우는 동물이든, 동물을 먹는 것 자체가 기후 변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이 2011년이고, 작가가 인용한 자료가 2007~2008년에 발표된 것이니, 지금은 그 수치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년 늘고 있는 자동차 수만큼, 우리가 매일 먹는 고기의 양도 늘었을테니까.


우리가 식단을 바꾼다면, 전 세계가 바뀐다. 329쪽


한편, 작가는 "단백질을 충분히 얻지 못할까 봐 염려스러워서 고기를 먹으려는 생각은 전혀 근거 없다"(188쪽)고 말하며, 우리에게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하셨나요"(319쪽)라고 질문을 던진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진실"을 알았지만 닭고기 대신 콩단백으로 만든 음식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 식단을 바꾼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매일의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며, 우리가 매끼마다 신중하게 선택해서 먹겠다는 결정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는 힘이 될 것이라고 한다.

채식이냐 육식이냐, 공장식 축산이냐 가족농이냐를 선택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들, 우리 아이들, 우리의 지역 공동체, 그리고 우리나라에 편의보다 양심을 선택하도록 가르쳐 줌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가치에 따라 살거나 혹은 가치를 저버릴 가장 큰 기회들 중 하나는 우리가 접시에 어떤 음식을 놓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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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받침 2단 와이드 독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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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지만,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 계절이 오니

어깨 근육도 너무 뭉치고 목과 허리가 너무 아파서

책 읽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다른 분들도 목이 아파서 독서대 사용하신다고 하셔서

예전에 예스24에서 굿즈로 받은 브라운독서대를 꺼냈지만

귀엽기는 하나 여전히 목을 숙여야 해서 불편했다.



목을 숙이지 않기 위해 독서대 밑에 책을 쌓아 올렸더니

눈높이가 맞아서 그런지 정말 편했다.

다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흔들흔들, 불안불안.

이렇게 높이가 고정되는, 높낮이가 조절되는 독서대는 없을까?

검색해 보니 가격이 4만원대, 너무 비쌌다.

내가 얼마나 자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고

나한테 맞는 제품인지도 알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공시생 2단 독서대를 사기로 했다.

공시생들은 아무래도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기니

(공시생은 아니지만) 공시생들의 선택을 믿어보기로 했다.

공시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제품은 따로 있었으나

그 제품과 비슷한 독서대가 알라딘에도 있었다.



공시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독서대와 기본 스펙은 같다.

다만 다른 것은, 하단의 받침대가 이동식이라는 것.

왼손잡이, 오른손잡이 모두 사용이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 받침대를 아예 뺄 수도 있다는 것.

(이 부분은 이 업체가 특허 받은거라고 했다.)



책 읽으면서 노트 필기

노트북을 사용할 때는 받침대가 필요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필기할 때 저렇게 받침대가 있으면 불편해서

아예 빼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필기시 손목에 닿는 받침대 부분은

우드 대신 ABS로 제작되어

나무의 거친 느낌이 손목에 닿거나 가시에 찔릴 걱정이 없다.



노트북 사용하기

와이드라서 노트북 사용할 때 편하다.

다만 마우스 역시 세워서 사용해서

마우스 무게 때문에 이 부분이 살짝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적응되면 괜찮을 것 같다.

저렇게 아이패드도 올려놓을 수 있어서 좋다.

아이패드로 동영상 보기에는 최적인듯.



노트북으로 리뷰 쓰기

특히, 리뷰 쓸 때 저렇게 책을 펼쳐놓고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 적을 수 있어서 편하다.

전에는 책상 위에 책을 펼쳐 놓으니

목을 돌려서 책장을 봐야하는 것도 불편했지만

두께가 있는 책들은 자꾸 책장이 넘어가서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2단 부분도 2단계(필기모드/학습모드),

1단 부분은 5단계로 각도 조절이 되고,

2단 부분을 아예 빼고 1단으로만 사용할 수도 있다.

5일 사용 후기를 정리하면,

인스타그램에서 2단독서대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증샷을 보니

2단독서대를 사용하고나서부터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이렇게 편한 걸 왜 이제야 사용하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사실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드라마틱한 편안함은 느끼지 못했다.

아직 손에 안 익어서 그런지 필기 할 때 불편하고

목을 숙이지 않고 눈높이에 맞춰 책을 읽고 싶었는데

1단은 기존 독서대와 별 차이가 없고

2단에 올려놓고 책을 읽자니 각도와 높이가 살짝 불편했다.

그냥 읽기만 한다면 그렇게 안 불편할 수도 있는데

나는 책 읽으면서 메모도 하고 밑줄도 긋는 편이라

그럴 때는 많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독서대를 사용할 때는 밑줄을 긋는 대신 플래그를 붙이고

책에 하던 메모는 노트에 해야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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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용 후기의 디테일이 대단하십니다 :>

이건 뭐 거의 업자 수준이신데요 ㅋㅋ

뒷북소녀 2020-12-08 10:02   좋아요 0 | URL
업자는 아니구요...
그냥 좋다는 리뷰를 봤는데,
저한테 도움이 안됐던 것 같아서요,
정말 리얼한 후기를 쓰고 싶었어요.ㅋㅋㅋ

nas 2022-11-2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설명감사해요! 전 집에서 쓰는거랑 휴대용독서대도살려고요 혹시 휴대용독서대도 아시는거있으면 시간나실때 말씀부탁드려요:)
 
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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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

해방 이후 고향인 정주로 돌아가 북에서 살고 있는 백석 시인의 삶을 다룬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고 떠오른 책이다. 책 속에서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말했던 친구"(『일곱 해의 마지막』, 88쪽)가 살짝 언급되기 때문이다.

※ 주의 : 이 리뷰는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꾿빠이, 이상』에는 이상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이 남긴 흔적을 추적하는 세 사람이 등장해 각각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태다.

첫번째 이야기 「데드마스크」에서는 이상의 "가짜 데드마스크를 둘러싼 희대의 사기극"(80쪽)이 펼쳐진다. 이 이야기는 이상을 흉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이 왜 이런 꼴인지 모를 수도 있는 독자들을 위해 작가는 친절하게 "이상을 흉내내려는 생각은 절대 아니다"(9쪽)라는 코멘트를 달아놓았다.

이 일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잘못 걸려온 전화. 잘못 전화한 사람은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은 잘못 전화한 사람이었다. (9쪽)

출판전문 잡지사의 기자인 '나(김연화 기자)'는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은 김연 기자를 찾는다. 이곳에는 김연 기자가 없다고 했지만,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서 자신이 김연 기자라고 말하는 '나'. 전화를 건 남자는 서씨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소설가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믿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가짜이며, 그런 식으로 해처먹은 게 꽤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이상과 관련된 그동안의 기록들을 찾아보게 된다. 이것은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남자'의 트릭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남자는 '나'에게 전화를 건게 맞았을 것이다. 즉, "잘못 전화한 사람은" 사실은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문제의 서씨, 즉 서혁수라는 사람은 자신의 형님이 이상과 절친한 사이였던 서혁민이라고 하면서 아직 발표하지 않은 유고나 유품을 상당량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공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존재했다는 증언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데드마스크는 언젠가 유실되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기자 회견에 앞서 전문가들만 모셔놓고 열린 비공식 모임에서 '나'는 "서씨는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데드마스크의 전달자"(45쪽)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교수도 누군가를 사칭한 가짜였을 뿐이고, "검찰에서 나는 왜 그 데드마스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히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지, 혹은 진위를 왜 밝힐 수 없는지, 내가 왜 김연기자라고 거짓말을 했는지 설명해야 했다."(80쪽) "검사는 기자라는 공인이 자기 느낌만 믿고 피해자가 생길 게 뻔한 이런 기사를 쓰다니 미친 게 아니냐고 말했다."(80쪽) 결국 '나'는 물의를 일으킨 기사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나'는 "진짜라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기사를 쓴 것은 아니다. 내가 본 데드마스크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도 수없이 했었다."(86쪽) 그러면서도 그가 기사를 쓴 것은,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 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83쪽)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상은 예수처럼 신화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은 예수를 진짜 존재했기 때문에 믿는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기사를 읽은 편집장 역시 재미교포 평론가 피터 주가 쓴 『참조로서의 이상 텍스트』를 보고 '나'가 본 데드마스크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상의 데드마스크라는게 중요"(82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사를 싣기로 결정했다는 것.

※참고로 그 흉내내려던 이상의 「오감도 시 제3호」를 적어본다. (이 짧은 문장을 옮겨 적으면서도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이 어느 부분인지 헷갈렸고, 습관적으로 띄워쓰기를 하게 돼 한참 걸렸다.)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

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이상의 시는 어렵다. 1934년 이상이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15편을 연재했을 때,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며 성난 독자들의 공격성 투고가 날마다 신문사로 밀려든 일은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잘 아는 사실이다.(11쪽)

「잃어버린 꽃」에 등장하는 '나'는 아마추어 이상 연구가이자 무명 시인으로, 「데드마스크」에 등장했던 사기꾼 서씨의 형이다. 그는 이상의 삶과 문학을 닮고 싶어서 평생 이상을 연구하며 산다. 그에게 "이상의 작품에 버금가는 시를 쓰는 일과 이상의 미발표 유고를 찾아 헤매는 일은 언제나 같은 의미"(114쪽)였고, 그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 원고라도 찾을까 해서 주말이면 몽유병자처럼 헌책방과 고물상을 떠돌아"(114쪽) 다녔다.

그러다가 몇 년만에 이상의 수필에서 언급된 『세르팡』이라는 잡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마침 그 잡지를 찾아서 일본에서 건너온 와타나베를 만나게 된다. 그 또한 오랫동안 하루야마 유키오의 유고를 모으고 있었는데, '나'가 발견한 그 잡지가 그에게 없는 낙질이라는 것이다. 누가 더 간절하게 이 잡지를 찾고 있었는지 이야기하다가 와타나베는 이상도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하루야마 유키오의 친필 원고 중에 다른 사람의 원고를 가필한 것이 있는데, 그 원고를 쓴 사람이 바로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그 원고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세르팡』을 와타나베에게 양보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와타나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나'는 일본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런데 와타나베는 이상의 원고를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루야마에게 쓴 편지에서 이상이 "지금까지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이 가짜"(160쪽)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추종자라면 그 원고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도록 포기하는게 맞다고. 그렇게해야 이상의 문학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이라는 것은 삶과 현실의 불순물을 제외한 것입니다. 불순물에는 물론 한 작가의 삶까지 들어갑니다. 당신이나 나나 한 작가의 뒤를 좇은 이유는 그 작가의 문학을 완성시키려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 사람의 삶이 자꾸만 자신의 문학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그 삶이 아니라 문학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 당신이 진정으로 이상을 추구한다면, 그 원고를 손에 넣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160쪽

와타나베의 이야기에 동의한 그는, 하루야마의 유고에 들어 있었다는 이상의 시를 완벽하게 모방한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쓰고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친 이상처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죽는다. "이는 바로 내가 죽어 영원히 이상으로 다시 사는 길이기도 하다. 내 오랜 꿈. 이로써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166쪽)

세번째 이야기인 「새」는 서혁민이 쓴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두고 일어난 일이다. 이 원고를 공개한 연구자는 이것이 이상의 유고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베껴 쓴 것으로,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한편, 「데드마스크」에서 잡지사를 그만 둔 김연화 기자는 이상의 원고를 베껴 쓴 원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피터 주에게 연락한다. 피터 주는 역시 「데드마스크」에서 각주 정도로 언급된 『참조로서의 이상 텍스트』의 저자다. 마침 다른 연구자가 원고를 공개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고 있던 피터 주는, 김연화 기자로부터 또다른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차피 자신은 가짜 '데드마스크' 사건에 연루되어 공개해봤자 믿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 원고를 피터 주에게 넘긴다는 것이다.

김연화 기자가 넘긴 원고는 "평생 이상을 추종하며 살았던" 서혁민의 수기를 복사한 것으로, 그 수기 안에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가짜 데드마스크'와 이 원고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원고가 진짜로 밝혀지면 데드마스크 또한 '진짜'가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피터 주가 다른 사람에게 듣고 무심결에 끼워넣은 각주가 가짜 데드마스크의 증거였기 때문에, 피터 주가 들은 이야기를 부정하면 진짜가 될 수도 있는 것. 그 데드마스크가 진짜로 밝혀진다면 피터 주를 곤란에 빠트렸던 다른 연구자의 원고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고 또한 진짜가 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진짜와 가짜가 얽혀있다.

"아니, 그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 「오감도 시 제16호」가 가짜인 이유는 같이 넘긴 데드마스크가 가짜이기 때문이고 그 데드마스크가 가짜인 이유는 이 「오감도 시 제16호」가 가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렇게 치자면 이상의 모든 작품은 가짜입니다." 234쪽

둘다 위작일 수도 있지만(그럴 가능성이 거의 100%지만) 다른 연구자가 공개한 원고와 비교했을 때, 김연화 기자가 가지고 온 원고가 정황상 더 진짜 같았고, 더 완벽하게 이상의 문장을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터 주는 그 원고를 공개하기로 한다. "누군가가 자신이 발표한 원고가 「오감도」 열다섯 편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빈도순으로 재배치해 엮어낸 조작이라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든 발표할 것"(242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얼핏 보면 각각의 이야기 같지만,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보는 것처럼 세 이야기는 모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이 리뷰를 읽으면서 왜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적어서 리뷰를 이토록 길게 썼냐고 할텐데, 그 시시콜콜한 부분이 모두 이 이야기에 얽혀있고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이야기 곳곳에 실제와 허구가 쉽게 구별되지 않도록 교묘하게 섞어두었다. 심지어 이상의 추종자로 등장하는 '서혁민' 조차 실제로 존재한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그가 썼다는 수기(『이상의 텍스트』)로만 존재할 뿐이며, 그것 또한 문제의 서씨가 꾸민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라는 이상의 동생 김옥희의 회상을 읽는 순간, 나는 어딘가에 있을 『꾿빠이, 이상』이란 소설을 떠올렸다. 그 소설을 너무나 읽고 싶었지만, 그 소설은 꿈속에서나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제일 먼저 읽을 생각으로 그 소설과 아주 비슷하게 쓴 소설이 바로 여러분께서 잡고 있는 이 책이다. 「작가의 말」, 276쪽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꾿빠이, 이상』, 121쪽



왜 사람들은 이토록 이상의 삶에 매혹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삶에 비밀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비밀스런 그의 삶은 단순히 실존의 문제를 떠나 신화의 영역으로 스며들었고, 신화의 영역으로 스며드는 순간 그의 삶은 더욱 신비로워졌을 것이다. 그가 김해경을 죽이고 오직 이상으로만 남길 원했던 이유와 같다. 거기엔 이름처럼 '이상'을 이상화시켰던 평론가들과 전기 작가들의 역할도 컸으리라.

전기란 결국 긁어모은 허섭스레기들로 괴상망측한 그림을 짜맞춰놓은 창작에 불과해 전기 작가가 완벽한 전기를 쓰면 쓸수록 실제 인물과의 차이는 더 커지게 된다. 이후에는 강변밖에 남지 않는데, 이를 전기 집필의 딜레마라고 말할 수 있겠다. (…) 전기를 계속 쓰는 한 전기 작가는 주인공이 가치 있는 삶을 향한 의지를 잃지 않게 해야 한다. (…) 예를들어 이상이 총독부 기수직이라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금홍과 함께 다방을 차리겠다고 나설 때, 후세의 전기 작가들은 두 손을 들고 환영한다. 이상이 창문사에서 교정을 보다가 김기림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창 밖으로 피가 섞인 침을 뱉을 때, 전기 작가들은 이미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써내려갈 태세를 모두 갖추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이런 이상의 면모와 모순되는 증거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106~107쪽)

이 책을 상기시켜준 『일곱 해의 마지막』과 비교한다면, 두 권 모두 그 삶이 비밀에 부쳐진 시인을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가 더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는 『꾿빠이, 이상』이 훨씬 더 좋았고, 이 작품들이 제발 3부작이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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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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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일곱 해의 마지막』, 32쪽


읽은 지 두 달 만에 다시 펼쳐든 『일곱 해의 마지막』. 잘 읽혔지만 읽고나니 정리되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었고, 김연수 작가가 쓴 또 다른 시인의 이야기인 『꾿빠이, 이상』이 떠올라서, 그 책을 읽고 다시 읽게 되었다. 역시 한 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은 재독이 진리다.

1956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백석은, 1962년 5월 『아동문학』에 「나루터」라는 동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시인이 "압록강 변에서 나무를 심고 길을 닦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십여 년 전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에 그 강을 건너가던 '나이 어리신 원수님'을 떠올"리며 쓴 것이다. 당시 북한 문학잡지에 실린 다른 시에 비하자면 노골적인 찬양시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 일곱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노래하던 시인은 어디 가고 찬양시만 남았을까?

(※ 이 리뷰는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재구성해 정리한 것으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읽기 전 주의 요망. 원망 금지.)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백석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석은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하는데, 이때 여러 편의 시들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모던보이'였던 그의 시들은 인기가 많았지만, 194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하자, 그는 만주로 가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절필한다.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간 기행(그러니까 그는 '월북'한게 아니라 그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었고, '월북시인'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은 소박한 삶을 꿈꾸지만,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고당 선생이 통역 겸 비서로 그를 부른다. 그때만 해도 기행은 곧 좋은 시절이 오리라 믿었고, 정국이 안정되면 선생으로 살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편 정도의 시를 꼭 쓰리라 다짐했다.

당시 소련에서도 해빙의 물결이 일어 세계가 바뀌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해방 후 십여 년 동안의 경직된 도식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감동과 개성을 되찾자"(106쪽)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기행은 작가동맹 기관지에 '나의 항의, 나의 제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협동조합과 공장에 관한 것이라면, 내면을 깊이 추구하지 않아도, 문학도 감동이 없어도 무조건 좋은 시라고 말하는 당시의 시단에 대한 정면공격이었다."(105쪽)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 년간의 짧고도 그나마 어렴풋했던 해빙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132쪽) 말았고, 당은 이 글을 트집 삼아 그의 사상 검증에 나선다.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 88~89쪽

"아이들에게 사상성보다 교양성을 심어주는 게 우선입니다. (…) 아프리카 기린에 대해 쓰면 안 되는 것입니까?"

"동무는 우리의 서정이란 우리나라 아동들의 실지 생활감정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당의 창작 지침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겠소? (…) 이 시에는 주체적인 우리의 생활, 우리의 감정이 없소. 주체적으로 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아프리카의 기린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겠소." 20쪽

1958년 5월 15일, 소련은 스푸트니크 3호를 쏘아올렸다. 문학신문 편집위원회에서 이를 기념하는 시를 게재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뜻밖에도 집필자로 기행이 결정됐다. 일 년 전 가을이 시작할 무렵, 『아동문학』의 확대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기행이 발표한 동시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뒤로 동시 청탁이 끊어진 상황인지라 기행 자신도 의아한 결정이었다. 문학신문은 당의 문예 정책을 정확하게 창작에 반영시키기 위해 만든 주간신문이었다. (…)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쓴다는 것. 그러자면 쓰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는데, 기행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비판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아'가 너무 많았다. 그 자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53~54쪽

또다시 찬양시를 쓰라고 하는 당 지도위원에게 시를 쓰지 않은 지 십수 년이 지나서 더이상 시를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 기행. 지도위원은 "창작이 부진하다면, 그 이유를 추궁받을 것이오. 그때는 노동계급 속으로 파견돼 그들의 사상으로 재무장하는 절차를 거치게 될 것"(57쪽)이라고 말한다.

시를 쓰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기행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고, 또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당이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장이라도 집필 금지를 당할 시가 분명했다. 이제 사상 검토에 내몰릴 각오를 하고 그런 시를 읽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거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 지금이 아닌 먼 미래의 언젠가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57~58쪽

노동자가 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사상 잔재를 청산하고 노동계급의 사상으로 무장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상 검토 위원회를 열어 모든 작가들을 심사, 분류한 뒤 현지 파견 등 적절한 조치를 통해 개조할 것을 결의했다.(133쪽) 기행 역시 천리마 작업반에 투신하겠다며 지원서를 쓸 수 밖에 없었는데, 다른 작가들처럼 희망하는 생산 현장을 고향으로 적어 냈다. 그런데 정작 기행이 파견된 곳은 생판 낯선 삼수의 협동조합이었다.(삼수는 예로부터 벽지였고, 유배지로 자주 언급됐던 곳이다. 이곳으로 유배를 갔다가 살아돌아온 사람은 윤선도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 악명 높은 곳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는 기행의 동지였지만, 지금은 위원장 자리에 있는 병도를 찾아간다. 병도는 기행에게 개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옥심과 리진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기행은 1957년에 평양으로 초청 받아온 소련 시인 벨라의 통역을 맡게 된다. 자신과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기행은 벨라에게 자신의 시작 노트를 건넨다. 소련으로 돌아간 벨라는 소련에서 유학중이었던 리진선에게 노트를 맡기며 번역을 부탁하지만, 약속한 날짜가 되어도 리진선은 나타나지 않고 벨라는 영영 그 노트를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기행은 소련으로 돌아간 벨라에게 한글로 쓴 자신의 시를 보낸다. 당은 이것 또한 모두 알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 추궁하기도 한다. 시를 쓰지 못하는 기행의 시를 소련의 시인은 어떻게 많이 읽을 수 있었냐고 말이다.

노어번역실에서 자신 대신 번역해 달라고 기행에게 벨라의 편지를 건넸던 옥심은 아빠를 구하기 위해 소련 국적도 포기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소련 유학생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숙청 당했고, 가족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옥심이 친한 친구가 쓴 것이라며 건넨 노트에는 기행의 눈길을 끄는 시가 한편 있었다.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81쪽

기행은(작가 조차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시는 벨라에게 건넨 자신의 시였을 것이다. 시인을 꿈꿨던 리진선이 벨라에게 돌려주기 전에 필사해 두었을 것이다.

한편, 유배지와 같았던 삼수에 도착한 첫날. 출근 통지만 받았을 뿐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역에서 난감해하고 있는 기행에게 한 사람이 알은채를 한다. 삼수읍에 있는 인민학교의 교원 진서희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작가동맹에서 파견한 시인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한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 흠모하던 국어 선생이 수업시간이면 줄줄 외던 시"를 쓴 시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며 사람들로 북적대는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그런 곳에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라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우연히 만난 시인 앞에서 그의 시를 욀 줄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 높은 자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쓸쓸히 앉어'라든가 '소주의 마시며' 따위의 비관적이고 퇴폐적인 문장을 저토록 큰 소리로 말하는 철없는 입술을 만류하기도 전에, 기행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아니, 비로소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랄까. 타오르는 갈탄의 힘으로 한쪽 표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난로며, 좀체 귀에 와닿지 않는 변방의 사투리며, 도내에서도 손꼽히는 축산반을 자랑한다는 협동조합을 찾아간다는 사실 등등이 모두. 그때 그는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안에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다. 그 밤과 마음이 지금 그와 함께 있었다. 196쪽

게다가 그녀는 기행이 시에 썼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기행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때 그 시를 쓴 시인과 지금의 자신은 다른 사람이니까.

일 년 동안 삼수에서 '노동을 통한 개조시간'을 가지고 있는 기행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최근 완성된 삼지연 스키장에 관한 오체르크, 즉 현장 보고의 집필이 맡겨진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써야되는지는 알지만, 기행은 결국 쓰지 못한다. 삼수에 남은 기행은 자신만을 위해서 시를 쓴다. 그리고 이내 불태워버린다. 서희의 부탁으로 아이들이 쓴 시를 봐준다. 시인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서희에게 이제는 농사꾼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꿈이 있어 우리의 혹독한 인생은 간신히 버틸 만하지. 이따금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며 내 소박한 꿈들을 생각해.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들이지. 우선은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었지. 제목은 사슴이면 좋겠고. 시골 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면 싶었고.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이나 읽고 살았으면 하지." 223~224쪽

이것은 오래 전 기행이 품었던 꿈이다.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기행은 삼수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후 40년을 그렇게 살아내지 않았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작가의 말」 245쪽




8년 만에 만나는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여기에는 백석 시인의 7년(1956~1962년)이 담겨 있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남긴 백석 시인은, 전쟁이 끝난 후 땅도, 몸도, 마음까지 모두 황폐한 곳에서 더 이상 시를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시를 쓸 수가 없어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근근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기필코 시를 다시 쓰라고 한다. 시인의 마음속에서 움튼 시어가 아닌, 그들의 사상을 담은, 그들이 원하는 시를 쓰라는 것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1962년)에 쓴 시를 마지막으로, 1996년 생을 다할 때까지 더이상 시를 발표하지 않았던 시인. 그의 실제 삶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소설가의 손끝에서 그의 삶이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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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7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독하려면 수년은 걸리던데,
불과 두어달 만에 재독이라니
대단하시네요...

뒷북소녀 2020-12-08 10:26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또다른 책을 읽고나니...
다시 읽고 이해하고픈 욕심이 마구 샘솟아서요.
잘 이해 안되는 책은,
완전히 기억에서 멀어지기 전에
한번 더 읽는게 도움이 되더라구요.
이젠 정말 이 책 내용 완벽하게 정리됐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