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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ㅣ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일시품절
『농담』이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기도 한 우스운 소설들!
『우스운 사랑들』은 총 15권으로 구성된 '밀란 쿤데라 전집' 시리즈의 2권. 7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유일한 단편집이라고 하니 더 의미가 있는듯 하다. 『농담』이 먼저 출간되었지만, 사실은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부터 써놨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진지하지 못한 관계, 우스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목록은 이렇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
「영원한 욕망의 황금 사과」
「히치하이킹 게임」
「콜로키움」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이십 년 후의 하벨 박사」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누구도 웃지 않으리」는 『농담』 때문에 파멸한 '루드비크'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자투레츠키로부터 자신의 논문에 대한 논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의 논문을 읽은 '나'는 그의 논문이 너무나도 형편 없었기 때문에, 논평을 써줄 수가 없었다. 자신 뿐아니라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인데 굳이 자신이 총대를 메고 자투레츠키를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에 그는 자투레츠키를 일단 돌려보낸 다음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너무나도 간절했던 자투레츠키는 '나'의 의중을 눈치채지는 못한채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닌다. 그냥 솔직하게 논문의 내용이 최악이기 때문에 써줄 수 없다고 하면 될텐데,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로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게된다. 그런 일들 때문에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주변 사람들, 학교 당국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제발! 내가 그 사람들 우습게 만들어 버릴 거야. 이거 전부 그저 농담일 뿐이라니까."
"농담하는 시대가 아니야. 지금 우리 시대엔 모든 걸 심각하게 받아들여." 「누구도 웃지 않으리」 39~40쪽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느냐고 묻는 연인에게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스운 '농담' 같은 것이라며, 다른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 그런 거라며 가볍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 몰랐다. 현재의 의미를. 그리고 농담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 12쪽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에 등장하는 에드바르트의 형은 스탈린이 죽은 날 한 소녀에게 장난을 쳤다가 학교에서 축출 당하고 만다. 스탈린이 죽은 줄도 몰랐던 에드바르트의 형은 한 여학생이 부동자세로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 주위를 뱅뱅 돌며 크게 웃었다. 그 여학생은 이 웃음이 정치적 도발이라 평가했고, 그 일 때문에 그의 형은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생활을 즐겼다.
훗날 에드바르트 또한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하느님을 믿는 여자친구를 따라 성당에 갔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된 믿음을 보였던 에드바르트는 그가 재직중인 학교 위원회에 소환된다. 당시 종교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하느님을 믿고 성당을 다니는 것은 그들이 따르고 있는 당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드바르트는 네 명의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믿음이 과장된 것이 아닌 진지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자신의 행동이 장난이었다고, 과장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소환한 사람들의 진지함을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되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들은 6개월 후에 다시 판단하자고 했고, 그동안 교장이 그의 교화를 맡았다. 사실 교장은 에드바르트의 형이 그 옛날 장난을 쳤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에드바르트의 여자친구 알리체는 종교 탓이기도 했겠지만, 엄청나게 얌전하고 조신한 학생이었다. 그에게 가벼운 뽀뽀 정도만 겨우 허락할 정도였는데, 이 사건 이후로 알리체의 태도가 돌변한다. 알리체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를 마치 순교자처럼 여겼다. 그런 순교자에게 알리체는 기꺼이 자신의 입술과 몸을 맡겼다. 에드바르트가 그렇게 원할 때는 내주지 않더니, 이제서야 종교의 이름으로. 정말 웃긴 사랑이다.
"무엇 때문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해야만 하게 하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진실함을 미덕으로 여겨야만 하는가?"
(…)
"형이 그 사람한테 진실만을, 정말로 그 사람에 대해 형이 생각하는 것만을 말한다면 그건 형이 미친 사람하고 진지한 토론을 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이고 형 자신도 미쳤다는 뜻일 거야. 우리를 둘러싼 세상하고도 정확히 마찬가지야. 형이 세상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노라 고집한다면 그건 형이 세상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지 않은 어떤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건 자기 자신이 진지함을 다 잃어버린다는 거야. 나는, 나는 미친 사람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 자신이 미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만 해."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346쪽
정말 웃긴 해프닝은 「콜로키움」에 등장한다. 멋진 몸매를 가졌지만 얼굴 때문인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간호사 엘리자베트. 심지어 그녀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플라이슈만 또한 그녀에게 치를 떤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스트립쇼를 (상징적으로 다 벗은 상태로) 하지만 모두들 외면한채 수면제를 건네며 자라고 하자 다른 방으로 건너간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플라이슈만이 가스 냄새를 맡고 그녀의 방으로 달려가고, 그곳에서 플라이슈만은 벌거벗은 채로 잠든 엘리자베트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보기를 원치 않았지만, 자살을 시도한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그녀의 벌거벗은 몸매. 그런데 여의사가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 없었던 엘리자베트.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옷을 벗고 완벽하게 스트립쇼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면제를 먹어서 잠이 왔고, 그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려고 가스 버너에 물을 끓였는데 그 사이에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분명 그 버너 위에는 물이 바닥난 냄비가 있었음에도 남자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엘리자베트가 잠에서 깨 자신의 실수였다고 밝혀도 플라이슈만은 자신이 너무 큰 죄책감을 느낄까봐 그것을 감싸주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플라이슈만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든 남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유독 자신만은 거부했다던 창녀의 이야기를 들려준 과장. 창녀는 자신이 아닌 과장이 자신을 원하게 만들어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고 한다. 나머지 한 남자는 모든 여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절대 엘리자베트와는 관계를 맺지 않은 하벨 박사. 그녀가 그토록 자신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와 관계를 맺지 않는게 마치 유행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하벨 박사.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매력있고, 누가 누구를 원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것.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혼자만 원한다면 우스운 꼴이 된다는 것.
아, 사랑이, 에로티시즘이, 이토록 가볍고 우스운 것이었나.
여기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모두 『농담』이면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전집을 모두 완독하고 나면 더 많은 작품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그가 쓴 장편소설들과 닮았다. 주제의식도 비슷하고, 구성도 닮았다. 어쩌면 이 단편들이 그가 본격적으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들의 밑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보니 그가 집착하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농담』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시종일관 '농담(진지하지 못한 이야기)'을 던지고 있다. 심지어 농담이 통하지 않는 시대, 농담을 할 수 없는 시대인데도 말이다. 그는 왜 '농담'에 집착하는 것일까? 조상 중에 농담을 하지 못해서 죽은 귀신이 있었나 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쓸 때 '7'이라는 숫자에도 집착한다. 그의 첫 소설인 『농담』을 쓰고 난 후부터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원래 6부로 구상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7장을 덧붙여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수 역시 7편. 이것 역시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
제 소설들은 7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진 동일한 건축술의 변형인 셈이죠. 『소설의 기술』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