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시대 생각의 시대 1
김용규 지음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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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코 브라헤가 될 것인가? 케플러가 될 것인가?

덴마크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는 놀라운 인내력과 끈기로 행성들의 운행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가 1576년에서 1597년 사이에 수집한 행성들의 자료는 어마어마했지만, 그는 그 자료들을 통해 어떤 보편적 원리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스승의 방대한 관측 자료를 물려받은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자료들을 토대로 '케플러 법칙'을 만들어 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상당 부분을 학교에서 배웠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그 지식을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평소 유학파에 스마트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한 배우는 예능에서, 자신은 어릴 적에 독일의 수도를 '본'이라고 배웠다고 하며 언제 수도가 바뀌었는지 되물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을 하자 수도가 '베를린'으로 바뀌었다고 하자 89학번인 자신은 모를 수밖에 없지 않냐고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예전에는 학교 교육에 의존적이었다.) 반면에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지식을 검색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는 시대다. 지식에 보다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우리는 그저 브라헤처럼 데이터만 모으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이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격변하는 환경을 꿰뚫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을 획득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그에 합당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고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에 쏠려 있다. 한마디로, 지식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생각의 시대다! 11쪽

기원전 450년에서 322년 사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의 황금기'를 일구며 서양문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보다 먼저 역사를 기록하고 문명을 이룩한 나라가 있었다. 한때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 보다 한참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그들보다 1,200년이나 앞서 살았던 수메르인들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그랬던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황금기를 일구고 서양문명을 주도하기 시작했을까?

그 비밀은 일명 '축의 시대'라고 불렸던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사이에 있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훗날 눈부신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생각의 도구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리스인들은 그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해 부지런히 갈고닦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그리스인들은 보편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고,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스(수), 레토리케(수사). 저자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갈고닦았던 '생각의 도구'를 이렇게 5가지로 정리하며 그동안 이 도구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변천되어 왔는지 소개한다. 또, 지금의 우리들이 어떻게 이 도구들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키울 수 있는지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인문교양서와 유아교육 실용서 사이!

일단 '5가지 생각의 도구'에 대한 소개는 교양 지식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하고 흥미롭다. 하지만 매 챕터마다 등장하는 아동심리학자 피아제의 이론들은, 이 책을 '누구에게나 필요한 인문 교양서'에서 '유아교육이 필요한 부모들을 위한 실용서'로 한정시켜버렸다. 물론 저자가 「머리말』에서 이 책의 목표는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실용'임을 강조하긴 했어도, 당장 '유아교육'과 같은 실용적인 측면이 필요하지 않은 나 같은 독자는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다. 한 권의 책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 소설은 그저 줄거리만 파악하면 된다며 무협지 읽듯이 읽는 사람, 글을 쓸 때 주술 관계는 무시하고 수식만 잔뜩 늘어놓는 사람, 소설 따위는 안 읽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은 읽지 않고 아이에게만 책을 읽어라고 강요하는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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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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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만 루슈디가 들려주는 현대판 '천일야화'

『2년 8개월 28일 밤』을 날수로 계산하면 1001일 밤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천일야화(千一夜話)』 (제목의 '천일'을 보통 '1000일'이라고 생각하는데, '1001'이다)를 현대판으로 다시 쓴 것으로, 31세기의 누군가가 21세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판타지 소설이다. 31세기의 그 누군가는 친절하게도 대강의 내용을 이야기 앞부분에 정리해서 들려준다.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하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년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시대가 끝난 후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17쪽

먼저 이 이야기를 하려면 11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개방적 사상 때문에 세비야에서 루세나로 귀양살이를 하러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열여섯 살쯤 먹은 소녀 '두니아'를 만나게 된다. 이븐루시드는 그녀를 집안에 들여 가정부 겸 연인으로 삼는다.

어느 나그네가 그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한다고 설명해줬는데 자기는 그 뜻이 마음에 들었단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번역한 바 있는 이븐루시드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이름은 여러 언어에서 '세계'를 뜻하므로 굳이 학식을 뽐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세계를 뜻하는 이름을 골랐지?" 그가 묻자 소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19쪽

사실 '두니아'는 인간이 아닌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지만 마족과 달리 이성을 중시했던 이븐루시드를 사랑하게 됐다. 마족들은 넘치는 성욕을 가졌는데, '두니아' 역시 2년 8개월 28일 동안 세 번이나 수태했고 그때마다 여러 아이를 한꺼번에 낳았다.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의 넘치는 성욕을 이야기로 가라앉히기도 했다. 이븐루시드는 2년 8개월 28일만에 사면 복권되어 귀양살이를 끝내고 왕실 주치의 자리로 돌아갔고, 두니아와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지도 않았다. 그들의 후손들은 귓불 없는 마족의 외모만 물려받게 된다.

호메로스, 발미키, 비야사, 셰에라자드.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간단히 '우리'라고 칭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생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물이다. 271쪽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21세기의 뉴욕,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그치자 2년 8개월 28일 동안 괴이한 일이 잇따랐다. (귓불 없는) 정원사 제로니모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로니모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떠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이 부양하게 되었고 전염병처럼 주변 사람들도 공중부양을 하게 된다. '스톰 베이비'라는 아이가 시장실에 버려지게 되는데 이 아이에게는 사람들의 부정부패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낙뢰를 맞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손가락에서 번갯불이 나왔다. 괴사(怪事)가 일상사처럼 일어나던 시대였다. 이것은 모두 대홍수 때 인간계와 마계 사이에 틈이 생기면서 인간계로 나온 흑마족들이 벌인 것들이다.

한편,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에게는 '가잘리'라는 숙적이 있었는데, 대홍수가 끝난 뒤 가잘리가 흑마신에 의해 깨어난다. 과거에 가잘리는 푸른 병 속에 갇힌 흑마신 주무르드 샤를 풀어주고 3가지 소원권을 획득한다. 그는 당장 소원을 비는 대신 자신이 "언제든 어떤 달이 뜨는 밤이든" 원하는 때로 소원을 유예하는데, 그 덕분에 죽은 후에도 소원을 빌 수 있게 되었다. 가잘리가 원한 것은 여느 인간들처럼 "막대한 재산, 더 큰 성기, 무한권력"이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

"두려움만이 죄 많은 인간을 하느님께 이끌어줄 수 있소. 두려움은 하느님의 일부분이오. 절대자의 무한한 권능과 인과응보 앞에서 나약한 피조물 인간에게 어울리는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오. 두려움은 곧 하느님의 메아리라고 말할 수도 있겟소. 그 메아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애원하지. 지상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런 곳은 굳이 건드리지 마시오. 인간의 교만이 팽배한 곳, 인간이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는 곳, 그런 곳을 찾아가 무기고와 환락가를, 그리고 기술과 지식과 재산을 떠받드는 신전을 때려부수시오. 하느님은 곧 사랑이라고 부르짖는 감상적인 지역도 찾아가시오. 가서 진실을 보여주시오." 190쪽

그랬다. 가잘리는 흑마신을 이용해 "인간이 신앙을 버리고 이성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한 이븐루시드에게 맞서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두니아도 마계의 규칙을 어기고 죽은 이븐루시드를 깨워낸다.

두니아의 바람대로 귓불 없는 두니아의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었고, 두니아는 후손들이 마족의 능력을 깨우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는 두니아가 사랑하는 인간계가 쾌락과 비이성으로 난무하지 않도록, 후손들과 함께 흑마족들에 맞선다.

환상적인 이야기는 곧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

역사와 신화를 넘어서 마족과 마계라니. 이미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도 읽어보았지만, 거기에 환상적인 요소가 더 더해진 것 같아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살만 루슈디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친절하게도 살만 루슈디는 31세기의 누군가를 통해 힌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인데,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라서 때로는 이것이 역사인지 신화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누구나 동의하는데,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곧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환상적인 이야기, 상상을 다룬 이야기는 곧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텐데,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무의미한 일을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304쪽

살만 루슈디는 현실의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과학과 이성을 중시한 그의 사상 때문에 고향에서 내쳐지고, 더이상 그의 철학을 설파하거나 저술하는 일도 금지되고, 그가 쓴 모든 책이 소각되었다. 살만 루슈디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악마의 시』라는 책 때문에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내걸렸고, 처형 당할 위험에 빠졌다. 루슈디는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고, 인도에서는 그의 책이 금서로 지정됐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했던 이야기, 현실에서는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분노는 제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결국 분노한 자를 망가뜨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새로 태어나듯이 증오하는 것으로 인해 몰락하고 파멸하다. 402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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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2-22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1일 밤이 몇 년 몇 개월인지 외우기 쉬운데요. 2828! ‘2828’을 말할 때 발음을 조심해야겠어요.. ㅎㅎㅎ

뒷북소녀 2021-02-22 11: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천일이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알게 됐어요.^^

레삭매냐 2021-02-22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븐루시드/아베로스와 가잘리가 실존 인물
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냥 소설의 캐릭
인 줄 알았거든요.

자크 아탈리는 젊은 날의 이븐루시드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도 썼다고 해서 주문장
날렸답니다.

보르헤스의 <알레프>에도 아베로에스가
나와서 어제 냉큼 빌려다 찾아 보았습니다.
별 건 없더군요.

뒷북소녀 2021-02-22 11:20   좋아요 0 | URL
매냐님 리뷰 보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어찌 그렇게 뱀꼬리를 잘 찾으셨는지^^ 알레프... 있지 싶은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정신분석 강의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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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전집 15권 전면 개정판 출시 기념 '함께 읽기'

열린책들에서 1997년에 출판한 《프로이트 전집(전 15권)》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 프로이트의 책들은 늘 버킷리스트에 있었지만, 혼자 읽다가 완독하지 못하거나 여럿이 함께 읽으려다가 불발되어 버리곤 했었다. 이번에 개정판 출시를 기념으로 <책중독자> 멤버들과 '함께 읽기'를 시작했다.

시리즈는 1권부터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우리는 첫 책으로 『정신분석 강의』를 선택했다.

『정신분석 강의』는 흔히 '프로이트 입문서'로 꼽히는 책으로, 그가 주창한 '정신분석 이론'의 핵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1915~1916년과 1916~1917년의 두 번에 걸친 겨울 학기에 의사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5쪽)으로 모두 28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와 꿈을 분석하며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고, 신경증과 관련해서는 리비도와 성적 충동, 불안 등의 개념을 소개한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의 모든 경향이나 여러분의 모든 사고방식은

불가피하게 여러분을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대자로 만들어 갈 것이며,

이러한 본능적인 적대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겨 내야만 하는지

여러분에게 주지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 강의』, 16쪽

당시 정신분석이라는 것은 신경증이 있는 환자들을 의학적으로 다루는 하나의 치료법(15쪽)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정신분석의 어려움들'에 대해 토로한다. 일반적인 치료는 의사의 치료행위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만, 정신분석은 피분석자와 의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하는 것만을 가지고 어떻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18쪽)라고 의혹을 제기하곤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로 제기된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는 것도 없고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을 도대체 어떻게 배울 수 있으며 그 주장의 진실성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21~22쪽) 이에 그는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에 반감을 가지게 된 두 가지 원칙을 언급한다.

1. 우리의 정신적 활동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2. 성적 충동이 신경증이나 정신 질환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

이러한 편결들은 정서적인 힘들(예를들면, 교육 같은 것들)에 의해서 고착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과 싸우는 것은 아주 힘겨울 수밖에 없다며, 우리(특히, 정신분석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입견 없이 들어줄 것을 당부한다. 만약 이런 당부가 없었다면 나 역시 귀를 뾰족하게 세우고 덤빌 준비를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범하는 실수도 마음 속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종종 범하는 실수들, 이를테면 어떤 말을 하려는데 다른 말이 튀어나오거나(잘못 말하기) 문서에 씌어 있는 것을 다르게 읽을 때(잘못 읽기), 물건 둔 곳을 잊어버려서 찾지 못할 때(잘못 놓기), 약속을 자주 잊어버리고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행위들도 그저 단순한 실수들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 범하는 의도된 실수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사소한 실수들도 정신분석의 관찰 재료가 될 수 있으니, 아주 작은 징조라고 하더라도 무시하지 말고 관심있게 지켜보라고 한다.

실수 행위는 심리적인 행위이며, 두 개의 다른 의도들 사이의 간섭을 통해서 발생한다. 사람들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작용되는 어떤 경향이 있다.(101쪽) 만약 문서 작업을 할 때 지속적으로 오탈자를 만든다면 그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며, 약속 시간에 계속 늦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만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충격적이다. 나는 그저 습관처럼 범하는 실수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떤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니.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실수를 나 자신도 저지르고 있으며, 그 실수를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아닐까.

성취되지 못한 낮의 잔재가 꿈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연구의 일환으로 꿈을 연구했다. 그는 꿈 그 자체가 신경증적 징후(113쪽)라고 말한다. 꿈은 실수 행위처럼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현상이지만, 실수처럼 관찰할 수 없고 꿈을 꾼 사람의 진술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꿈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쉽게 잊혀지기도 하지 않는가.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할 때, 꿈꾼 이가 말하는 대로 그 꿈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사람이 꾼 꿈과 다를지라도, 다르게 말한 꿈 자체도 꿈꾼 이의 무언가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꿈은 수면 도중의 정신생활(120쪽)로 수면 상태에서 영혼에 작용되는 자극에 대해서 영혼이 반응하는 현상(123쪽)이다. 꿈은 자극을 단순히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넌지시 암시해 주며, 어떤 관련성 속에 배치시키고 또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기도 한다.(133쪽)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 우리는 두 가지를 전제해야 한다.

1. 꿈은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심리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

2.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실제로는 알고 있는 정신적인 것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지난 밤의 꿈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고, 연상 기법을 통해 감추어진 꿈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꿈은 본래의 모습으로 표출되지 않고,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꿈의 상징적 의미를 읽는 것이 중요한데, 어차피 우리는 신화나 종교, 예술, 언어 등을 통해 상징을 자주 접해 왔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의 의미들을 차용할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모든 꿈들이 성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273쪽) 이런 꿈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유아기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그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고 있다. 또, 꿈은 밤마다 우리를 유아적 단계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우리가 망각했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체험들이 꿈속에서는 도달 가능하다고 한다. 성적인 상징들로 가득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자기 검열), 그것은 단지 유아기 때 가지고 있던 것이 표출된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 꿈이 아무리 허황되고 부끄럽더라도 자신의 꿈으로 인정하라는 프로이트, 만약 프로이트의 의자 앞에 앉게 된다면 가감없이 떠오르는 그대로 내 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편,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취하지 못했던 낮의 잔재가 꿈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꿈-작업을 통해서 그 (무의시적인)소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해야하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쾌락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불안을 느끼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꿈과 관련된 것들은 그의 또다른 저서 『꿈의 해석』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리비도가 좌절되면 신경증이 생긴다!

신경증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번에도 그는 당부의 말을 남긴다.

"신경증이 나타나는 영역은 여러분에게 낯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의사가 아닌 한, 그리고 제가 이 영역에 대해서 알려 드리지 않는 한, 이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잇다고 하더라도, 판단의 대상이 되는 소재 자체가 낯선 것일 때에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마치 내가 독단적으로 강의하거나 혹은 여러분이 내 말을 절대적으로 믿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348쪽

"여러분은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정신분석학 강의가 일종의 사변적 체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 강의는 오히려 환자를 직접 관찰한 내용을 표현한 것 아니면 관찰한 내용에서 추론해 낸 결과로서, 모두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349쪽

"나는 소위 학문적 논쟁이라는 것이 대체로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논쟁은 대개의 경우 항상 인격적 차원으로까지 치달리기도 합니다." 350쪽

프로이트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표시하는) 어린이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리비도'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리비도는 '배고픔'과 마찬가지로 본능이 드러내는 힘(444쪽)을 드러낸다. 즉 배고픔이 영양을 섭취하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처럼, 리비도는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힘(444쪽)으로,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에너지이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리비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하는 경우(좌절), 좌절된 만족감을 대체하기 위해 심리적 갈등의 결과가 '신경증'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모든 리비도 충동의 좌절이 신경증을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신경증 환자가 되지 않는다면, 성도착자나 페티시즘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억압들과 함께 증상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병인으로 작용하는 갈등 역시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이 강구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614쪽

우리의 노력이 지향하는 목표는 다양한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이나 억압들의 제거, 그리고 상실된 기억의 복원 등과 같은 요인들은 모두 동일한 경과를 지향합니다. 614쪽

이 치료 요법은 질병의 현상들을 공략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질병의 원인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분석은 일종의 인과적 요법입니까? (…) 우리의 심리적인 요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과관계의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현상들의 근원들은 아니지만, 증상들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입니다. (…) 결국 우리는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 무의식은 기억 속에서 억압에 의해 그것이 발생했던 곳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억압이 제거될 경우, 무의식이 의식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런 억압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 먼저 억압을 찾아내고, 이 억업을 유지하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615~616쪽)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란 어떤 질병을 직접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그 질병의 (심리적인) 병인이 될 수 있는 것을 제거해서 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경증 강의 부분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실수 행위나 꿈에 비하면 다소 낯선 신경증이라는 질환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흔히 '화병'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나라에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신경증의 증상이라고 한다. 지금은 '신경증'이라는 진단명 자체가 사라져서 더 낯설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프로이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

프로이트는 매 강의마다 제기될 수 있는 의문들과 반론들을 예상해서 꼼꼼하게 답변해준다. 역자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그 내용을 깨우치도록 배려한 '반권위주의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나는 '자기방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부정 당한 경험이 많아서 선택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프로이트는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정신분석은 어떻게 행해지고, 정신분석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던 정신분석학을 어떤 편견도 없이 받아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정신분석학과 좀 더 가까워져서 정신분석학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원한다.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 거부감들이 있고, 의문들도 있다. 각각의 강의에는 그 이론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각주로 표시해주고 있다. 그가 연구한 정신분석학은 '경험적 과학'이다. '경험적 과학'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론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 가능한데, 프로이트는 평생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고 재정립했다. 그가 『정신분석 강의』를 쓴 이후에도 수정된 부분들이 더러 있고, 그 수정된 부분들은 《프로이트 전집》에 포함된 다른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한 출판사에서 출간한 《프로이트 전집》이 필요하다. 만약 낱권으로 출판된 단행본을 읽었다면, 전체를 일관되게 파악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정신분석 강의》를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일상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의 개념들을 적용시켜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 의문과 거부감이 남아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해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프로이트를 읽는다. '고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서 읽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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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1-10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데 표지가 주는 압박이 장난이 아니네요!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이러는것 같아요!

뒷북소녀 2021-01-11 00:04   좋아요 1 | URL
아, 책 읽다가 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저 눈빛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겠더라구요ㅠㅠ
 
작은 아씨들 (영화 공식 원작 소설·오리지널 커버)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강미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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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19세기를 산다는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오랫동안 읽는 바람에 2020년에 마지막으로 완독한 책이 되어버렸다. 초등학생 때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책, 그 기억으로 선택한 책이다. 내가 얼마나 이 이야기를 좋아했냐면, 소설 속 네 자매들처럼 친구들과 연극도 하고, 조처럼 그 연극 대본을 직접 쓰며 조 흉내도 냈었다. 실제는 조의 성격을 닮았었지만 나는 매그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현모양처를 꿈꿨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매그는 허영덩어리였고, 현모양처라니. 세상에!)

왠지 크리스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찾았다. 무의식적으로 어릴 때 읽었던 책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아씨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조가 양탄자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불만을 터뜨렸다.

"가난한 건 정말 싫어!"

메그가 낡아빠진 옷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떤 애들은 예쁜 물건을 많이 갖고 있는데 누구는 하나도 없다는 건 불공평해."

막내 에이미가 마음이 상했는지 코를 훌쩍이며 거들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아빠, 엄마 그리고 언니, 동생들이 있잖아?"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베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ebook, 12쪽


마치 부인(네 자매의 어머니)이 모두에게 힘든 겨울이니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없이 지내자고 하자 네 자매는 이렇게 한 마디씩 던진다. 이 첫 장면은 짧지만 네 자매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종군 목사로 전쟁터로 떠나자, 집에는 어머니와 네 자매만 남게 된다. 어머니는 매일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메그와 조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가정교사 일을 하거나 대고모에게 책을 읽어주며 돈을 번다. 부끄러움이 많은 베스는 집안일을 돕고, 에이미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난 이후로는 여유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들보다 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는 가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을 먹으려는 자매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제 막 아기를 낳은 불쌍한 여자가 살고 있지 뭐니. 지금 그 집에 갔다 오는 길인데 난로가 없어서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침대 하나에 모여 웅크리고 있더구나. 게다가 먹을 것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다 못한 그 집 큰애가 와서 사정 얘기를 하더구나. 얘들아, 우리 아침 식사를 그 집 아이들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게 어떻겠니?" ebook, 40쪽


다들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배가 고팠지만, 작은 아씨들(이것은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은 어머니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자기들 몫은 남한테 줘버리고 빵과 우유만으로도 만족하는 이들 자매보다 더 기분 좋은 사람은 도시 전체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으리라. (ebook, 43쪽)


한편, 작은 아씨들의 이웃에는 부유한 할아버지와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들은 왕래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의 선행을 전해들은 로렌스 씨가 그들에게 근사한 저녁식사를 선물로 보내준다. 이것을 계기도 두 집안은 마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작은 아씨들은 외로운 로런스 씨와 로리를 위해 가족이 되어 주었고, 로런스 씨도 마치 일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준다. 결국 메그는 로리의 가정교사와 결혼하고, 막내 에이미는 로리와 결혼한다. 로런스 씨가 특히 예뻐했던 베스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안타깝지만, 모두들 베스의 자리를 잊지 않는다.


"난 나이가 차서 미스 마치라고 불리는 것도 싫고, 기다란 드레스를 입는 것도 싫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얌전한 척하는 것도 싫어. 노는 거든 일하는 거든 남자들 생활 방식을 좋아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게 참을 수 없어. 게다가 지금은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원망스러워. 마음은 온통 아빠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싶은 생각뿐인데 집구석에 틀어박혀 할머니처럼 뜨개질이나 해야 하다니." ebook, 17쪽


참! 자매들 중 작가를 꿈꾸며 가장 활발했던 조는 집을 떠나 잠시 머물던 곳에서 만난 독일인 바에르 씨와 결혼한다. 친구 로리의 청혼까지 거절한 조였는데, 결혼이라니. 아무리 조의 성격을 독립적으로 그렸다고 해도 당시에는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 속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웠나보다.(아니면 자신과 성향이 닮은 바에르 씨를 너무나도 사랑했거나)


올해 개봉한 영화 덕분에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작은 아씨들』이 있었는데, 어릴 때 읽었던 책의 표지도 이런 표지였던 것 같아서 선택했다. 찾아보니 이 표지가 1868년 초판본 표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조'가 들고 있었던 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어린 시절의 기억만으로 다시 만난 『작은 아씨들』은 지금 읽기에는 너무 두꺼웠다. 시간 대비 가심비가 떨어지는 책이다. 어릴 때는 이런 이야기가 재미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내용의 책을 1000페이지나 읽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힘들다. 그래서 완독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어릴 때 내가 읽었던 책은 이 정도로 두껍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1부만 읽은 모양이다. 이 책은 1부, 2부 합본으로 2부에 그들의 결혼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이 책에는 영화 스틸컷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스틸컷들이 내 독서를 방해했다. 한 명씩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어김없이 스틸컷도 함께 등장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인물들과 너무 달라서 그때마다 읽는 흐름이 깨져버렸다. 아직 영화를 보진 않았는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꽤 어린 나이부터 등장하는데, 캐스팅 된 배우들은 그보다는 나이가 더 들어보여서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특히, 매그가 저런 얼굴형에 이런 헤어스타일이었다고? 승무원처럼 단정하게 망 안에 머리를 집어 넣고 있는게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책이 있는 반면, 감동이 반감되는 책도 있다는 걸, 최근 자주 깨닫게 돼서 아쉽다. 그저 어릴 때 좋아했던 『작은 아씨들』로 간직하고 싶다.


"나도 아빠가 우리에게 붙여준 '작은 아씨'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ebook, 29쪽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 놀이를 못 하는 일은 절대 없단다. 에이미. 왠지 아니? 형태는 다르겠지만 살아가면서 우린 늘 천로 역정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지. 우리의 짐은 여기에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단다. 그리고 선의와 행복에 대한 갈망은 수많은 역경과 실수를 헤치고 진정한 하늘의 도시인 평화로 향하도록 인도하는 길잡이란다. 자, 어린 순례자 여러분, 이제 놀이가 아니라 진짜 생활 속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ebook,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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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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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자책, 141쪽




밤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그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매일 습관처럼 보내는 시간이다. 마치 이렇게해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매일밤 시를 베껴 쓴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17쪽)

'나'는 하루종일 (이혼한 동생의) 6살, 4살 조카들을 돌보고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바깥일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도 일은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를 쓰며 등단을 준비 중이지만, 해가 갈수록 쉽지 않다. 맘껏 시를 쓸 수 있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해가 갈수록 뒤처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쓰기를 하려면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돈은 커녕 '자기만의 방' 조차 없다. '나'는 남자친구와의 만남도 조카와 집안일을 돌보느라 거절한다.

내가 동동거리며 노력하고 애쓰는 일들의 결과가 너무 미비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허무해지곤 했다. 플라스틱 포장재에 겹겹이 둘러싸인 물건을 사게 되면 플라스틱 빨대를 쓸 때마다 들었던 죄책감이 무의미해졌던 것처럼. (…)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29~30쪽)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질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34~35쪽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았찌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 44쪽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시간과 절대 노동, 절대적인 참을성이 요구되는 일이었다."(61쪽)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해도해도 티 안나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의 노력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엄마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게했다."(22쪽) 심지어 동생도 자기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데이트 하느라 바쁜데,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걸까?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가면 간다, 오면 왔다 말할 줄도 모르는 아버지였다. 발걸음 소리며 목소리 한번 크게 내는 법이 없는 사람"(27쪽)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신거였다.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97쪽)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집을 떠날 결심을 한다.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주저앉게 될 것 같아서, 엄마와 한바탕 싸움을 한 뒤에 빈손으로 집을 나온다. 알바를 하면서 얻은 작은 공간이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나'가 시를 쓰게 됐는지, 그 시로 등단을 하거나 시집을 내게 됐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구병모 작가는 "꼭 필요한 만큼 불친절한 결말"(152쪽)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정류장에서 다음에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것이다.

"언젠가 배차 간격이 넓고 승객도 드문데다 목적지도 낯선 버스에 불쑥 올라타게 된다 해도, 우리는 정류장에서 기다렸던 시간을 함께 태워서 떠날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게 된들 우리가 만든 문장은 이미 몸에 배었으니 값없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153쪽

그동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도서관 대출을 활용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선택한 구독형 전자책 플랫폼(첫 달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체험 중)에서 첫번째로 선택해서 읽은 책이다. 경장편이라고 해야할만큼 분량은 가볍지만, '나'의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내용은 가볍게 읽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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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2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얼 리뷰 플렉스!

뒷북소녀 2020-12-22 15:28   좋아요 0 | URL
음...지금 이해 못하고 있어요.ㅋㅋㅋ

보물선 2021-01-0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전자책은 다르네요?

뒷북소녀 2021-01-06 01:00   좋아요 1 | URL
네. 이게 밀리의 서재 에디션이라고 하더라구요. 뒷부분에 작가가 직접 필사한 것도 스캔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