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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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게 인생에 대한 스포일러!

Memento Mori. 그 옛날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행진을 할 때, 노예들에게 이 말을 큰소리로 외치게 했습니다. 라틴어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오늘은 승리해서 살아있더라도 언젠가는 너도 죽을 수 있으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고 합니다.

비록 개선 장군은 아니지만 종종 '죽음'을 떠올립니다. 이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오만가지 감정들이 교차합니다. 견솜한 마음이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밀려오는 두려움과 허무, 회한 때문에 잠 못 이루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프롤로그 : 아침에 죽음을 생각한 이들의 연대기』 7~8쪽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에 비누칠을 하면서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을 보면서 웃어보라고 하는데, (어쩌면 희망찬 하루가 될지도 모르는) 아침 댓바람부터 죽음을 생각하라니. 도대체 이 상충된 조언은 뭘까요?

아침을 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비누를 가득 칠한 채 중얼거리는 거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속한 정치공동체도 이미 죽었다"라고. 무슨 말이지? 나는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세수를 하고, 정부는 어김없이 세금을 걷어가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변함없이 그다지 질이 높지 않은 쇼가 상연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 있다. 별이 폭발하기 전에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우리가 그 별을 지금 보고 있을 뿐. 나와 공동체는 이미 죽었는데 현재 부고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7~18쪽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인생에 대해 스포일러를 당합니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죽게될 것이라는 것. 그 순간이 바로 1초 뒤일 수도 있고, 내일 아침일 수도 있고, 어쩌면 100년 뒤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말은 '죽음'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자는 아침을 시작하면서 '죽음'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다. 화전민이나 프리라이더가 아니라 조용히 느리게,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 주체로 살아보고야 말겠다는 열정을 가져보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이란 그 자체로 지나치게 큰 야망처럼 보인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9~20쪽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먼 미래 대신 지금 당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나중에 부자가 되면 누리게 될 (큰) 행복이 아닌 눈 앞에 있는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게 될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근심도 즐기게 될 수 있습니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을,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23쪽

이렇게 보면 감정적인 내용의 책 같지만, 사실은 냉소적이고 시의성 짙은 칼럼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는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 구석구석, 혹은 일상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때론 날카롭게, 또 때론 재미있게 써내려 갔습니다. 특히, 추석 때 결혼은 언제 할거냐,고 묻는 건 위헌적 처사며 콩을 싫어하는데 콩 넣은 송편만 먹어야 한다는 건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거라고 한 「명절을 보내는 법」라는 칼럼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그가 유명해진 것도 바로 이 칼럼 때문이라고 합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송편 속에 콩을 넣을 만행이 지속되고 있다. 송편을 한입 물었는데 그 속이 꿀이 아니라 콩일 경우 다들 큰 좌절감을 맛보지 않나. 「추석을 즐기는 법 :명절을 보내는 법2」 64쪽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라고 묻는 친척의 '위헌적 처사'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보너스를 털어 비행기를 타기로 하자. 기내식 송편에는 콩이 없다. 「추석을 즐기는 법 : 명절을 보내는 법2」 65쪽

게다가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부문 심사를 맡았던 박완서 선생님이 "난 다른 부문 심사위원이었지만, 내가 맡은 부문 글들보다 당신의 글이 제일 좋았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있었으며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고 잠시 귀국했다가 평론을 써서 응모했는데 당선됐다고 합니다. 학위 때문에 이후 평론가로서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놓치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는 비자발적으로 태어났고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 사실은 바꿀 수도, 선택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즉 소멸의 방식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멸해야 할까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소멸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소멸의 방식. 어떤 소명과도 무관하게, 어떤 심미적 흔적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소멸해가는 길이 있다. 마치 상한 달걀을 깨뜨렸을 때 비린 냄새를 풍기고 흐물거리며 퍼지는 노른자처럼. 두 번째 소멸의 방식.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존재 이유를 잃고, 스스로 소멸해버리는 방식이 있다. 마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고 나서 검은 우주 속에서 밝게 소멸해버리는 로켓추진체처럼. 「서울대학교의 정체성」 125~126쪽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고 있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다. 이것은 어쩌면 새로운 관광자원이다. 한국으로 여행 오시면 멸종 위기의 공동체를 구경할 수 있어요, 한국은 사라지는 중이에요,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P18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 P22

"또 한 해가 가고 오네요."

"당신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선명해질까요?"

"아니요."

"그럼 더 혼돈스러워지나요?"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 - P27

그동안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에너지원 삼아 살아왔다지만, 이제 여생을 살기에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좋아서 미치겠는 어떤 것 때문에 기운을 쓰면서 살아가야, 제 명에 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식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 - P54

누가 그랬던가, 휴식의 궁극은 죽음이라고. 쉬고자 하는 욕망의 끝에는 죽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만화책으로부터 우리가 휴식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칫 죽음을 통해서라도 휴식을 취하려 들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P90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게 인생에 대한 스포일러라면, 진리를 결국 다 알 수 없다는 게 학문에 대한 스포일러입니다.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요」 - P93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내심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죠. 나도 책을 읽으면 행복하지만, 책도 나에게 읽히는 게 분명 행복할 거야, 라는 충족감이 들죠. 그리고 직장인들이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할 때, 창문을 열고 ‘월요일이란 무엇인가!‘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어요.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요」 - P95



왜 해석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는가?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쓸쓸해서 해석을 하고, 초조해서 해석을 하고,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해석을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불안해서 해석을 한다. 「설원에 핀 장미 아닌 꽃 : 홍상수의 초기 영화」
- P265



글에서 읽고 싶은 것을 읽는 것은 저자가 어찌할 수 없는 독자만의 특권일 터. 책을 출판하면, 독자들이 너무 그럴싸한 메시지를 책에서 읽어낼까 두렵습니다.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할 근거가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에필로그 : 책이 나오기까지」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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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3-27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마저 의미 심장하네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진지하고 견고하게 한다는 것을 알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저자 말 대로 큰 근심 대신 작은 근심으로 보내는 소소한 일상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요.
딱 하나 제가 공감못하는 대목은, 저는 꿀 들어 있는 송편보다 콩 들어 있는 송편을 더 좋아하는데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것이요 ^^

뒷북소녀 2019-03-27 12:57   좋아요 0 | URL
저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울에 빠지곤 하는데... 저자는 그게 아니라고 해서 놀라웠어요.
저는 콩 들어간 송편을 너무 싫어해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말에... 완전 감탄했다죠.
엄마가 콩 들어간 송편을 사놓으면 써먹을려고... 키핑 중입니다.

레삭매냐 2019-03-27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멘토 모리 !

누구나 다 알지만, 부인하고 싶은 시츄?

뒷북소녀 2019-03-27 12:58   좋아요 0 | URL
그런데... 부인해도, 억만장자가 되어 불멸의 삶을 꿈꿔도... 어쩔 수 없다는 현실.
 
마녀체력 -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
이영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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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36쪽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즈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었지만 체력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인들은 어떻게 미련없이 포기할 수 있었냐고 묻곤 합니다. 그땐 가만히 대기하고 있을 힘 조차 없었고, 취재를 나갈 때마다 입술은 부르텄고, 감기 몸살을 달고 살았었습니다. 늘 이것저것 들고 다녀서 그 무게에 짓눌렸는지 왼쪽 목부터 발까지 마비 증세가 와서 손을 쓸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20대의 열정과 깡으로 버티며 몸을 혹사하는 일도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직을 했을 뿐, 그것 외에는 제 삶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전만큼 몸을 혹사시키며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이 탓인지, 또다시 스멀스멀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파서 빨리 퇴근하고 싶은 마음 뿐이고,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발바닥은 찢어질 것처럼 고통이 올라옵니다. 발이 아파서 대중교통을 멀리하고 자가용만 타고 다니다보니, 그나마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면서 걷던 시간들 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퇴근 후에 편안하게 책 좀 읽으려고 하면 또다시 목과 허리가 아프고, 눈알은 터질 것 같고, 딱히 피곤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조는 날이 많습니다.

또다시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고, 여러 사람들에게도 귀가 따갑게 듣고 있지만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운동까지 어떻게 하나, 요즘 같은 날씨엔 미세먼지 때문에 운동을 해도 안 좋아, 이런 마음 뿐입니다. 운동을 할 수 없는 핑곗거리는 언제나 차고 넘칩니다.

만약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책상 앞에만 쪼그리고 앉아서, 인생을 헛살아온 것도 모르고 있겠지. 자전거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다. 65쪽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운동하냐며 반문하는 당신에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저자.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열악하다고 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육아와 살림의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출판 에디터인 저자 또한 (나처럼) 신체활동 보다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며(얼마나 책을 좋아하면 운동도 몸이 아닌 글로 배우고 있다), 늘 일에 시달리고 있고, (나보다 더) 작은 체구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그녀가 강철 체력의 소유자만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은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경기) 13년차라고 합니다. 게다가 운동은 어릴 때부터 해온 것이 아니라 마흔 살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니, 아무리 핑곗거리가 많은 사람이라도 더이상의 핑계를 댈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탁월한 사람들이 성취한 경험을 들으면 부럽긴 해도 따라할 생각은 잘 못하는 법이다. 그 사람은 뛰어나고 나는 평범하니까.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숭배를 조장한다. 천재를 우리와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신적인 존재'로 부르면 우리는 그와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다."

(…) 하지만 위층 할머니나 옆집 아줌마가 해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쩐지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한 일을 나라고 왜 못할까 싶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잘 움직이지 않다가 마흔 넘어서야 뒤늦게 운동이란 걸 시작했다.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강한 체력의 소유자가 된 내 경험이, 나만큼이나 평범한 다른 사람들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지 않을까.

타고난 저질 체력도 이렇게 달라져서 꽤 멋지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나보다 훨씬 젊고 웬만한 체력을 가진 사람이 조금 일찍 운동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신나고 근사한 가능성들이 펼쳐지겠는가. 10~11쪽

그녀 옆에는 멋진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처럼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아들 운동회 때 각성한 이후로 아내보다 먼저 운동을 시작한 남편. 그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전거도 탈 줄 몰랐던 그녀에게 자전거를 선물해주며 의지를 불태워줬고, 바다수영을 무서워하는 그녀 뒤에서 함께 수영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녀가 힘들어서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늘 뒤에서 그녀를 지지해주며 한발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힘을 북돋워 줬습니다.

누구나 다 "시간이 없고 귀찮다"고 말하니까요. 그런데 책을 읽는 건 어떤가요? 멋 부리는 건요? 요리를 하는 건요? 모임에 나가는 건요? 혹시 이런 것들도 시간이 없거나 혹은 귀찮아서 못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시간 없어, 귀찮아"를 입에 달고 살던 제가, 어떻게 자다가도 일어나 운동하러 나가는 사람으로 변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끝까지 정독! 83쪽

우리에겐 이렇게 따라다니며 지지해주는 멋진 조력자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 책이 있습니다. 저자 자신이 뒤늦게 운동을 시작해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인지, 처음 달리기를 할 때, 수영을 배울 때, 자전거를 탈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떻게 내딛어야 하는지 각종 운동 몸치들을 위한 깨알 팁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동안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어떻게 한발을 내딛어야 할지 몰라서 시작하지 못했던 적이 많은데 이런 팁들은 꽤 유용합니다.

이제 더이상 핑곗거리도 없으니, 심지어 이 책을 끝까지 정독했으니, 날씨가 따뜻해지면 운동화 끈 단단하게 매고 집 앞 운동장으로 뛰쳐나가야겠습니다.

매년 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김장을 하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오고 말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다. 김장에 비하면 죽음이란 먼지와 다이아몬드처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중요한 인생의 대단원인데도 말이다. 죽는 순간이 아무런 고통도 없이 벼랑에서 뚝 떨어지듯 단번에 오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의학 덕분에 죽음으로 가는 길은 점점 더 길고도 느린 과정이 되었다. 인갑답지도, 아름답지도 않게 변해 버린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263쪽

책 속의 책

자전거를 타며 느끼는 자유가 아이를 독립적으로 만든다면, 어른이 되어 자전거를 타면 다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볼 수 있다. 자전거를 자주 타는 사람이라면 동감할텐데, 언제든 자전거를 타면 그리운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무지개, 별똥별, 크리스마스에나 느낄 법한 기분 말이다. 벤 어빈, 『아인슈타인과 자전거 타기의 행복』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길을 달리는 일은 즐겁다. 주변 풍경을 보며 달리기에는 시속 10킬로미터 전후가 이상적인 속도이다. 자동차는 너무 빨라서 작은 것을 놓치기 쉽고,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달릴 때의 기분도 각각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길모퉁이의 모습, 발자국 소리, 보도의 폭, 쓰레기 버리는 습관 등도 모드 다르다. 정말 재미있을 정도로 다르다.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자전거 타기를 배우려는 호기심이 67세의 노인을 유혹하는가 하면, 70세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판을 미끄러져 나가고, 80세에는 체조를 하면서 날마다 근육을 단련했다. 죽기 바로 직전인 82세에도, 그는 말을 타고 20녀 킬로미터나 질주하곤 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톨스토이를 쓰다』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하느냐에 따라 건강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실제 나이 효과'라고 한다. 즉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는 70퍼센트 이상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50세가 되면 생활 방식이 어떻게 늙어 가는가의 80퍼센트를 결정하고, 유전이나 체질은 겨우 20퍼센트 정도밖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이클 로이젠, 『새로 만든 내몸 사용설명서』


 

수영을 배우면서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내가 해낸 운동량을 내 몸이 정확히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는 25미터를 수영한 뒤 꼭 벽에 매달려 멈추곤 했다. 호흡이 가쁘니 잠깐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수영이 잘 늘지 않는다. 내 몸이 딱 25미터 간 거리만큼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50미터를 수영해 내면? 처음엔 힘들겠지만 내 몸은 곧 50미터에 맞는 폐활량을 기억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체력이 생긴다. 즉 내 몸이 잘 기억하고 익숙해지도록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 나가면서 꾸준히 강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깨달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었다. - P50

미국의 마라톤 잡지 <러너스 월드>에서는 달리는 사람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달리는 이유가 다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는 멋진 몸매를 유지하거나 성인병을 예방하기 위해 달리는 운동파.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앞서고 싶거나 목표로 세운 기록을 단축하고 싶어서 달리는 경쟁파. 세 번째는 나무가 많은 공원이나 호젓한 길을 따라, 달리는 느낌 자체를 즐기는 취미파. 네 번째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달리는 것이 재미있는 사교파. - P66

"로저 배니스터는 1마일을 4분 안에 주파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닐 암스트롱은 달에 처음으로 간 사람이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도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위업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시도했지만 그 사람들은 다 실패했다. 그런데 한 번 성공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이 그것을 똑같이 해냈다. 왜일까? 뇌는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곳으로 가는 대략의 지도를 그린다. 배니스터, 암스트롱, 힐러리는 상식을 거슬러 희망을 품어야 했다. 그들의 뇌에, 목표에 이르는 지도를 그리라고 요구해야 했다. 그들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앞서 달성된 위업을 지도로 이용했다." - P77

몰입과 긴장을 반복하며 일하는 정신노동자일수록, 오히려 집중력을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적당한 혹은 격렬한 육체 활동이 절실한 법이다. 그래야 자기 분야에서 롱런하며 원하는 성과를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현명한 지적 노동자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비밀‘을 이미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며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 P217

뇌과학자 정재승은 한 칼럼을 통해서, 중년으로 접어든 뇌가 가장 ‘절정의 뇌‘라는 연구 결과를 보여 주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고 반응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눈이 침침해지고, 심지어 치매 초기 증상과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 따라서 그 나이에 리더가 된 사람들은 급격히 자신감을 잃고 나이듦을 억울해 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뇌의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인지 능력인 어휘, 언어 기억, 계산, 공간 지각, 반응 속도, 귀납적 추리 중에서 무려 네 가지가 초절정의 성과를 내는 나이대는 45세에서 53세 사이의 중년이라는 결과가 있다. 나빠진 기억력 때문에 고민이 많은 내게도 희망찬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에겐 몸과 마음, 뇌에 이르기까지 아직 많은 가능성과 시간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내 몸밖에 없다. 특히 내 자유 의지로 운동을 하면서 서서히 변해 가는 몸을 지켜보는 건 근사한 경험이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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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3-26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의 피로감이 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몸 전체가 다 피곤해지는 것 같아요. 저질 체력 못지않게 걱정되는 게 저질 시력입니다... ㅎㅎㅎㅎ

뒷북소녀 2019-03-26 09: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요ㅠㅠ저는 눈이 아프면 머리도 아픈 것 같더라구요.

레삭매냐 2019-03-26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라 취재? 기자셨군요 ㅋㅋ
미처 몰랐네요.

웃는얼굴아트센터, 도서관 이름이
멋져 부리네요.

저도 이제 운동해볼라구요...

뒷북소녀 2019-03-26 11:23   좋아요 0 | URL
저희 동네가 스마일 달서구라.ㅋ 아트센터 안에 도서관이랑 문화센터도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라 좋아요^^
 
불멸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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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

'밀란 쿤데라'는 아베나리우스 교수를 기다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헬스클럽의 실내 수영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영 강습을 받고 있던 한 부인이 쿤데라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 부인은 예순이나 예순다섯 살쯤으로 보였는데, 수영 강습이 끝나자 수영복 차림으로 풀 가장자리를 따라 수영 강사를 지나쳐 걷다가 강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합니다. 그 미소, 그 손짓이 마치 스무 살 아가씨 같아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쿤데라의 심장까지 졸아들 정도입니다.

나의 심장이 졸아들었다. 그 미소, 그 손짓, 바로 스무 살 아가씨 같지 않은가! 그녀의 손은 눈부시도록 가볍게 날아올랐다. 마치 그녀는 장난하듯 울긋불긋한 풍선 하나를 연인에게 날려 보낸 것 같았다. 비록 얼굴과 육신은 이미 매력을 상실했다지만, 그 미소와 손짓에는 매력이 가득했다. 그것은 매력 잃은 육신 속에 가라앉아 있던 한 몸짓의 매력이었다. 그 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는 그 순간만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10쪽

그때 나의 뇌리에 아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녜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름의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 11쪽

그 부인의 미소, 손짓으로부터 『불멸』의 주인공 '아녜스'가 탄생합니다.

만약 우리 지구의 인구가 800억을 넘어섰다면, 그들 각자가 자기만의 몸짓 일람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다. 산술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사람 수에 비해 몸짓 수가 비교도 안 될 만치 적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충격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즉 몸짓이 개인보다 더 개인적인 것이다. 이를 격언 형태로 얘기하면,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가 된다. 16쪽

『불멸』은 작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소설 속 '쿤데라'는 친구인 아벨리우스 교수를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 수영장을 관찰합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자신의 매력을 미소와 손짓으로 발산하던 한 부인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불멸』은 크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 이야기는, '밀란 쿤데라'가 화자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이것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쓰기 작법처럼, 혹은 자전적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나는 이렇게 소설적 인물을 창조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모티프를 얻어 이야기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안쪽으로 그가 창조한 '아녜스'의 이야기와 불멸의 작품을 남긴 '괴테'의 일화가 교차돼 등장합니다.

쿤데라의 소설 속 '아녜스'는 변호사인 '폴'과 결혼을 해 딸 브리지트를 두었고, 자신보다 8살 아래의 여동생 '로라'도 있습니다. '아녜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서가 아버지에게 보냈던 미소와 손짓을 목격한 뒤부터 그것을 자신의 몸짓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미소와 손짓은 '쿤데라'가 수영장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모방하기 좋아했던 '로라'가 똑같은 몸짓을 하는 걸 보고는 다시는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로라'는 언니가 사고로 죽은 뒤에 형부인 '폴'과 재혼을 하기도 합니다. '폴'은 '로라'의 몸짓을 보고는 '로라'만의 몸짓이라고, 자신에게만 보내는 몸짓이라고 감탄합니다.

갑자기 그녀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팔 하나를 허공으로 날렸다. 그 동작이 너무도 경쾌하고 너무도 매력적이고 너무도 잽싸서 마치 금빛 풍선 하나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올라 문 위에 걸려 머무는 것처럼 보였다.

즉시 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가 아베나리우스의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보았소? 저 몸짓을 보았소?"

(…) "아, 로라! 그녀만의 것이야! 아, 저 몸짓! 그녀의 전부를 함축하는 몸짓!" 542~543쪽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또다른 이야기는 불멸의 작품을 남긴 '괴테'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미 아내가 있던 괴테에게 한 젊은 부인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그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베티나, 괴테가 23세 때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스스로 '괴테의 딸'이라고 여깁니다. 괴테는 베티나 때문에 (물론 작품도 그러했지만) 사후에도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불멸'을 누렸습니다.

불멸. 괴테는 이 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옷차림이 가벼운 한 인물이 사원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에게선 어떤 비범한 구석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선구자 없이, 다른 위대한 모델들에게는 무관심한 채,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불멸을 만나러 걸어간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였다."

물론,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 81~82쪽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불멸에 이를 수 있으며 모두가 청년 시절부터 불멸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만난 헤밍웨이는 '불멸'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삶이 힘들어서 혹은 싫어서 권총으로 자살한 헤밍웨이에게는 영원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끔찍할 정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일단 불멸의 배에 오르고 나면 영원히 내릴 수가 없지요. 나처럼 두개골을 권총으로 쏘아 버려도 자살한 모습 그대로 그 배 위에 머무릅니다. 끔찍한 일이에요. 요한. 정말 끔찍해요. 138쪽

이쯤되니 밀란 쿤데라 자신은 '불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집니다. 분명 그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속적인 불멸'을 누릴텐데, 그에게 '불멸'은 어떤 의미일까요?

쿤데라는 '불멸'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작은 불멸'과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큰 불멸'이 바로 그것인데, 예술가와 정치가는 대부분 '큰 불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셰익스피가 가장 먼저 그 길을 걸었고, 괴테와 헤밍웨이도 그 길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82쪽) 않습니다. '아녜스'는 죽은 뒤에, '작은 불멸'로 남았습니다. '폴'과 '로라' 모두에게 잊혀진 것 같았지만, '로라'의 몸짓으로 '작은 불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아녜스를 생각했다. 처음으로 그녀를 상상한 게 벌써 이 년 전이다. 그때 나는 클럽의 긴 의자 위에서 아베나리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내가 포도주를 한 병 주문한 것은 그래서였다. 나의 소설이 끝났기에, 첫 발상이 이루어진 곳에서 이를 자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550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제목은 이 소설에 붙여야 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쓸 때 '7'이라는 숫자에 집착합니다. 그의 첫 소설인 『농담』을 쓰고 난 후부터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6부로 구상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7부로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 역시 7부로 구성되어 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보여줬던 기법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6부에서 먼저 엔딩을 보여준 뒤에 7부에서 왜 그런 엔딩이 나왔는지 되짚어줍니다.

제 소설들은 7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진 동일한 건축술의 변형인 셈이죠. 『소설의 기술』 126쪽

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화자 뒤에 살짝 숨어 있었던 '쿤데라'가 『불멸』에서는 소설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는 『삶은 다른 곳에』를 쓴 작가로 등장하며, 심지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눠 독자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교할 수 밖에 없도록 (혹은 읽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6부를 기다리며 안달하네. 새로운 인물이 내 소설에 등장할 걸세. 그 6부가 끝날 때쯤 그는 등장할 때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릴거야. 그는 무엇의 동기도 아니며, 어떤 효과도 낳지 않네. 내 마음에 드는 게 바로 그런 거라네.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아베나리우스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다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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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
조은 지음 / 로도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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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예쁘고 포근하고 상냥하고 사랑스럽던 '또또'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에서 '또또'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녀가 발췌해 준 문장만으로도 '또또'가 자꾸 눈에 밟혔는데, 다른 작가의 에세이에서 '또또'를 또 만나게 됐습니다. 평소 (남녀노소가 아닌) 수컷 암컷 대소를 불문하고 개라면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희한하게도 '또또'는 자꾸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유일하게 우리집에 잠시 머물렀다 간 강아지 이름과 비슷했기 때문일까요? 그 녀석의 이름은 '뽀뽀'였고, 키울 능력이 부족했던 우리를 만나 6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보내져야만 했습니다.

사직동에 사는 동안 나는 몸도 건강해졌고, 의식도 성장했다고 느꼈다. 느리고 굼뜬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 세월 동안 한결같이 내 곁에 있었던 존재는 상처 받은 채 내게로 왔던 작은 개 또또였다. 사람들과 나누는 마음은 여러 이유로 변덕이 잦았지만, 또또만이 고른 마음으로 내 옆에 있었다. 잡종개였던 또또만이 내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슬픔도 묵묵히 덜어내 줬다. 또또는 한 번도 내게 싫증을 내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나의 시시한 면면을 누설하지 않았고, 인간을 통해서는 줄일 수 없었던 내 아픔을 조용히 나눠 가지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같이 사는 동안 내게 기쁜 일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밖으로 나도느라 우리가 같이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으니 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또또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처럼 나는 삶이 내게 주는 무게를 또또를 통해 덜어 내곤 했지만, 같이 사는 동안엔 그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했다. 뒤늦게 그걸 알고 뭉클뭉클 솟구치는 고마움을 느꼈을 때 또또는 이미 폭삭 늙어 버린 뒤라 우리 앞에는 안타까운 시간만 남아 있었다. 10쪽

한번 키워보고 싶다며, 어느 날 동생이 무턱대고 데려온 '뽀뽀'. 하지만 우리에게는 '뽀뽀'를 제대로 보살펴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떨어져야만 했던 '뽀뽀'는 우리가 떠난 현관 앞에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하루종일 우리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요? 제대로 보살펴 주지도 않고, 하루종일 집 안에 혼자 두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뽀뽀'를 하루종일 옆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지인에게 입양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입양 보낸 우리가 어디가 좋다고, 가끔씩 그 지인이 하는 가게를 방문할 때마다 '뽀뽀'는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줬습니다.

'뽀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아마도 저였을 거예요. 알레르기도 있고, 강아지도 무서워해서 곁에 두지 않았는데 집에 있을 때면 늘 뒤에서 맴돌고 있었나봐요. (곁에 있는 건 워낙 싫어하니까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책상에 앉아 있다가 의자를 뒤로 뺐는데,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의자 바퀴에 작은 발이 끼여 버렸던 것입니다. 동생이 여행을 가고 온전히 혼자 '뽀뽀'를 돌보게 됐을 때는 영양실조에 걸리게 했고, '뽀뽀'를 데리고 이동해야 할 때는 가까이 안아주는 게 아니라 멀찍이 들고 다녔습니다. 저도 제 나름의 사정(알레르기와 공포)이 있었지만, 지인들은 '뽀뽀'가 너무 무서울 것 같다며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뽀뽀'는 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뒤에서 맴돌고 있었죠. 제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절대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말이죠.

또또는 죽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받은 나쁜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도 편히 자지 못하던 또또를 하룻밤에도 몇 번씩 깨워 악몽으로부터 건져 내야 했던 밤의 기억이 너무도 강해 나는 아직도 그들의 말에 얼른 동조하지 못한다. 그때를 제외하면, 말년의 또또는 평화로웠다.

(…) 상처투성이로 내게로 왔지만, 또또는 내게 어떤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공포감을 다스리지 못해 저도 모르게 나를 물기는 했지만. 물고 나선 곧바로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 녀석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녀석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꽤 오랫동안 안간힘을 썼고, 그동안 녀석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냥 번쩍 들어 품에 안아 줬으면 녀석은 명랑하고 상냥한 태생적 본능을 잃지 않고 예쁘게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랬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평범했을 것이다. 11쪽

원래 '또또'는 조은 시인이 세 들어 살던 개량한옥 주인집의 개였습니다. 십 대 후반의 두 아들과 살고 있는 주인집은 평소에는 너무도 조용하고 강아지도 방 안에서 키웠는데, 가끔씩 이 강아지를 학대하는 장면이 시인에게 목격됩니다. 주인집 아저씨는 강아지를 때리기도 하고, 추운 겨울밤에 목욕을 시킨 후 말려주지도 않은 채 마당으로 쫓아내기도 합니다. 겨우 1만 원짜리 강아지라며 막 대하고, 개 장수에게 줘버린다는 말도 합니다. 이런 '또또'가 불쌍해서 시인이 가끔씩 돌봐주자 '또또'의 안부를 시인에게 묻기도 합니다. 지난밤에 얼어 죽지 않았는지, 새벽에 나가는 걸 봤는데 돌아왔는지 등.

갈색 실꾸리 같은 것이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에 끼어 내 쪽으로 굴러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 그것이 둥글게 오므라들며 마른 큼직한 플라타너스 잎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뒤 그 나뭇잎이 회오리치는 바람에 굴러 내 발목에 와닿았다. 열리지 않는 문의 의미를 병적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을 때였다. 곧이어 무엇인가가 내 바지를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고,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뭔가가 이상해 허리를 굽혀 발치를 내려다보던 순간, 깜짝 놀랐다. 갈색 나뭇잎이거나 실꾸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너무도 예쁘게 생긴 작은 강아지였다. 나는 그때껏 그렇게 예쁘게 생긴 강아지를 본 적 없었다. 강아지는 상냥하고, 명랑하고, 예쁘고, 포근하고, 사교적이었다.

(…) 강아지는 내가 일찍이 본 적 없이 예뻤지만, 나는 녀석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 위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19쪽

사실 시인은 개와 가까워지는 게 두렵습니다. 어릴 때 키웠던 '마루'가 아빠 친구들에게 잡아먹힌 사건 이후로 충격을 받아 더이상 개는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일 마주치는 이 '또또'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상처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손이 닿기만하면 물어버리는 '또또', 시인 역시 여러 번 '또또'에게 손을 물렸습니다. 아픈 '또또'를 치료하기 위해 동물병원에 데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의사는 이런 예민한 성격에, 잘 먹지도 않아서 3년도 못 살거라고 말합니다.

집주인과 공동으로 '또또'를 키우던 시인은 이사를 하면서 아예 '또또'를 데려갑니다. 주인 역시 시인에게 별말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1만 원짜리였으니까요.

또또는 사람이 의도를 갖고 자신을 때리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고통에 강했다. 녀석은 정말이지 죽을 정도로 아파도 조용했다. 내부의 고통을 수용하는 녀석의 태도는 인간인 나도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102쪽

하지만 시인과 '또또'는 무려 1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또또'가 아파도 더이상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았습니다. 병보다는 그런 스트레스가 '또또'에게 더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예민하고 아팠지만, 신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딜 줄 알았던 '또또'. '또또'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날, 시인은 동물병원으로 '또또'를 마지막으로 데려가, 편안하게 보내주기로 결심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또또'에게 보내는 시인의 '애도'일지도 모릅니다.

적게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또또는 '저렇게 먹고 어떻게 생명이 유지될까?' 싶을 정도로 적게 먹었는데, 3년을 못 넘길 거라던 수의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17년을 살았다. 135쪽

개들은 정말이지 인간의 속된 감정을 정화시키는 데 더없이 좋은 존재이다. 인간에게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들의 순저오가 순수함이 주는 위로에 매혹되면, 개와 살면 일생이 평화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혼자 사는 젊은이가 개와 너무 밀착되어 생활하는 것을 조금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을 알 만큼 아는 나이 든 독신들이 그렇게 지내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같이 살고 있는 개에게서 얻는 정서적 위안과 평화를 변덕스러운 인간관계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어 그들에게 다시는 이성을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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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5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희 이모님이 기르시던 댕댕이
이름을 제가 또또라고 지어 주었었는데...

지금 무지개 다리 건너갔구요.

뒷북소녀 2019-02-27 13:03   좋아요 0 | URL
아, 또또...
강아지들은 주로 부르기 쉬운 이름들로 명명되나봐요.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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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도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자신 있게 늙고 있어!

 

마음산책에서 나온 <짧은 소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입니다. 이 책에는 모두 19편의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틈틈이 읽을 수 있는 짧은 분량과 감각적인 문장들 덕분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어떤 날에는 모든 것이 괜찮고 제대로인 듯하지만 어떤 날에는 반만 그렇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불행히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흔한 아침인 걸까. 선미도 에그머핀을 다 먹지는 못하고 남자처럼 반을 남겼다. 그리고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사람들의 화사한 일상을 SNS로 지켜보았다.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시작되고 있는 그들의 아침이 이 작고 완전한 프레임의 사진들처럼 온전할지, 그러니까 제대로일지, 혹시 잘려나간 어느 편에서는 울고 나서 맞는 아침은 아닐지 생각하면서.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 51쪽

특히, 인상적인 소설은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사드린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는 「춤을 추며 말없이」입니다.

어릴적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던 주인공은, 직장을 얻어 서울로 떠나오면서 할아버지에게 저렴이 버전의 인공지능 로봇을 선물합니다. 그는 그것을 '꼴통' 혹은 'B품', 더러는 그냥 '기계', '폐품'이라고도 불렀는데 정식 제품명은 '말로'였습니다. 워낙 저렴이 버전이라 알람처럼 기본 기능만 장착되어 있고, 언어 능력도 현저히 떨어집니다. 알파고나 고가의 인공지능 로봇처럼 스스로 학습해서 진화할 가능성은 제로인 로봇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인공은 로봇을 집으로 데려오는데, 이 단순한 인공지능 로봇을 통해 '할아버지 곁에 아무도 없던 시절의' 할아버지 일상을 짐작하곤 합니다. 할아버지는 이 로봇과 대화를 시도하며 일상을 함께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로봇도 나름으로 진화해 할아버지가 건네는 대화에 나름의 대답을 하곤합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주인공 또한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로봇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로봇도 소진되어 버립니다.

나는 하나도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자신 있게 늙고 있어. 「춤을 추며 말없이」 165쪽

할아버지를 자주 찾아갈 수 없었던 주인공이 전화를 걸어 이유를 설명하자 할아버지가 주인공에게 호기롭게 던진 말입니다. 자신 있게 늙고 있다니. 저도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아버지 나이가 되면요.

 


파리 살롱을 다시 찾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불현듯 추위를 느끼고 혼자임이 실감된다면 어디든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가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따뜻한 것, 아주 따뜻한 것을 먹겠다고. 「파리 살롱」 69쪽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지금까지." 「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 75쪽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 77~78쪽

주용은 어쩌면 아주 어려서부터 영란의 마음은 전혀 다른 멜로디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오히려 듣는 이의 관성화된 귀와 마음이 아닐까. 「서로의 기도」 112쪽

그것이 이것보다 어려운가, 이것은 그것보다 쉬운가 하는 삶의 온도차를 재보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온난한 하루」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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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8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짧은 단편들이 산발적으로 흩어뿌려진 느낌이 들었어요 주제를 향한 부각이 좀 필요한데 그럴러면 한번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두번 읽기는 힘들고...저는 그랬습니다 ^^

뒷북소녀 2019-02-08 13:00   좋아요 1 | URL
저도요. 너무 짧은 단편들은 같은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서 기억에 남는 부분만 정리해 두고 넘어가려구요.^^ 갈수록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은데, 이렇게 짧은 단편들까지 일일이 다 기억하기는 어렵네요.

레삭매냐 2019-02-08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를 너무 오래 생각하는 건
집착이 아닐까요...

제가 주용이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대학 동창의 이름이네요 ㅎㅎ

뒷북소녀 2019-02-08 13:0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저는... 사실...어떤 생각에 사로 잡히면 밤새도록 생각하는 경향이 있긴 한데요...
집착을 버려야겠네요. 갑자기 분위기 스님.

공쟝쟝 2019-05-08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막 덮었는데 저도 춤을 추며 말없이가 너무 좋았어요!

뒷북소녀 2019-05-08 19:57   좋아요 1 | URL
잘 늙고 있다는 저 문장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