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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김희정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이 미친 비선형 세상에서, 날수를 세면서!
1982년 이탈리아 토리노 출생.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소수의 고독 』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발표된 적이 있는) 소설을 발표해 이탈리아에서 권위있는 문학상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가 중국을 넘어 이탈리아에서도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2월 29일. 도시 전체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의 작품을 읽은 적도 없고,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이런 사실들의 나열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염의 시대'를 함께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며 이 공백기를 보내기로 했다. 뉴스 예보를 주시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이해하고 싶어서다. 때때로 글쓰기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때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게 하는 바닥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이 전염이 우리 자신에 대해 폭로하는 것에 귀를 막고 싶지 않다. 두려운 비상사태가 종료되면, 우리의 일시적 자각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질병의 본질이다. 10쪽
코로나가 우리 도시를 덮쳤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출을 할 수 없어서 집에서 머물며 평소보다 책 읽을 시간이 훨씬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즈음 내가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매일매일 늘어가는 '숫자'들 뿐이었다. (참고로 4월 28일, 오늘이 우리나라에 코로나 환자가 처음 발생한지 10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한다. 정말 우리는 미치도록 숫자만 세고 있구나.)
거리는 멀지만, 이탈리아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나보다. 심지어 이 책을 쓴 작가까지도.
아마 전염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수를 세는 것 외엔 없기에 그 구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우리는 감염자와 완치자, 사망자의 수를 세고, 입원자의 수와 학교 결석 일수를 센다. 주식 시장에서 날아간 수십억과 마스크 판매 수, 진단 시약의 결과가 나오는 시간을 센다. 감염원으로부터의 거리, 예약 취소된 호텔 방 수를 세고, 우리의 유대 관계와 단념한 것들을 센다. 그리고 날수를 세고 또 센다. 특히 이 비상사태가 시작되고 서로 떨어져 지낸 날수를 센다. 75~76쪽
몇 년 동안 보려고 미뤄뒀던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특보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밤 늦도록,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계속해서. 81쪽
그는 지금의 시대를 '미친 비선형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확진자의 증가세가 선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이고 폭발적으로, 비선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은 본래 비선형적이다.(21쪽)
이렇게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가 중국을 주시하지 않았고, 밀라노는 지방 도시를 신경 쓰지 않았으며, 남부 이탈리아는 북쪽을 보지 않았고, 나머지 유럽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투명하지 않은 정보 제공, 자극적인 제목만 뽑는 언론들, 전염병처럼 유포되는 가짜 뉴스들, 이런 것들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날수를 세면서, 슬기로운 마음을 얻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 77쪽
작가는 3월말까지 글을 썼으며, 편집은 4월 7일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길지 않은 글들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은 전염병을 겪고 있는 작가의 글을 이토록 신속하게 책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빨리 돌아갈 수 있구나. 그러니까 전염병의 확산속도도 그렇게 빠를테지만.) 무엇보다 양심적인 책값도 마음에 든다. 심지어 인세는 코로나 감염자를 치료하는 이탈리아 현지 의료단체와 구호단체에 전액 기부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서 빨리 '전염의 시대'가 끝나고, 예전처럼 서로 왕래하며 지내는 시대가 오길 바라며.
여태껏 일상생활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정확히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정상 상태가 한순간에 우리가 지닌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