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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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십니까」 _157쪽

원래부터 집순이는 아니었다. 주말이 되면 산으로, 바다로 꼭 뛰쳐나가야 했고 계절마다 색색이 피는 꽃들을 모두 보고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요즘처럼 매일 집과 회사를 쳇바퀴처럼 돌고 있어도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6월에는 꼭 제주도를 가보고 싶었다. 6월이면 곳곳에 만개하는 수국을 보고 싶었고, (원래는 생일에 맞춰 올라가고 싶었지만 제주도의 장마는 좀 더 일찍 찾아온다고 하니) 장마가 오기 전에 한라산도 다녀오고 싶었다. 이때쯤이면 끝날거라고 생각해서 예매해뒀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내년 6월에는 꼭 다녀올 수 있기를 바라며.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이달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0'원일지도 모르겠다. 자가용만 이용해서도, 일 없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서도 아니다. 되도록 동네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평소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장기화되면서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예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전의 일상이 점, 선, 면의 방식이었다면 선은 지우고 면은 축소해 '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요즘. 관계와 사회적 접촉면의 확장 속에 있던 우리는 이제 일상의 다른 국면을 맞았다. 157쪽

몇 달 째 나의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0'원이다. 집과 회사 근처에서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무증상 확진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어딘가를 방문하는게 조심스럽다. 내가 아니라 '나 때문'이 될까봐.

우리가 4월에도 물리적 거리 두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유행은 피할 수 없더라도 대량의 환자가 발생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다. 조금 불편해지고 외롭거나 막막해졌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의료진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사명감으로 버티며 통과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세를 고쳐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란 말할 수 없이 나약하기도 한 존재라서 다시 이렇게 글을 쓰려고 혼자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단절감이 무겁고, 많은 사람에게서 나로 이어졌던 관계의 선과 함께 공유했던 장소와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159쪽

 

 

 

「안녕이라고 말해주지 못한 이별들」_206쪽

지난주에 이모가 돌아가셨다. 지속적인 치료와 돌봄이 필요해서 요양원에 계셨는데, 몇 달 동안 면회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바람에 한달 전부터 아무것도 못 드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찾아뵐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입맛이 없으셔서 잘 못 드셔서 가족들이 찾아갈 때마다 겨우 드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더 일찍 기력이 쇠하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엄마와는 18살이나 차이가 나서 외할머니 같았던 이모. 마침 장례식장도 코로나 거점병원 안에 있어서, 아주 가까운 친지들을 제외하고는 조문도 받지 않았고 집집마다 대표로 1명만 조문을 받아서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코로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이렇게 외롭게 만든다. 가족이, 가족다울 수 없게 만드는 코로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줘서 잔인한 바이러스"라고 한 정은경 본부장의 말이 생각난다. '안녕이라고 말해주지 못한' 나의 이별.

할머니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엄마는 할머니에게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어? 하고 물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답이 나일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떤 대답이든 좀 마음이 서운할 수 있다고 예감하면서도 누구였어? 라고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다 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주었다. 다 보고 싶다. 21쪽

 

 

 

「사랑하죠, 오늘도」_115쪽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 22쪽

김금희 작가의 글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담담한 고백이 또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사랑을 확신하며 말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이 구절 때문에 나는 이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소설이 아닌 일상 속 그녀 모습이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양희처럼, 그녀 역시 담담하게 보내는 일들이 많았고 멋부리지 않는 글들이 좋았다.

2020년 1월,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권위와 관행에 맞섰던 그녀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 라고.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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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글프네요. 지인이 돌아가셔도
문상도 못하는 상황이라니.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디스토피
아의 전초가 아닐지...

어제 다녀온 화성 궁평항 가는
길의 들꽃들은 정말 이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