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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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아담한 책, 은빛으로 반짝이는 표지의 배경과 어둠에 싸인 건물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거기다 <그날 밤의 거짓말>이란 제목은 내게 의문을 품게 만든다. 도대체 언제? 누가? 왜? 어떤 이유로? 거짓말을 한거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제 책장을 열자. 




평소보다 일부러 신경 써서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앞에 두고 툴툴대면서 책은 시작한다. “배 속을 비우면 죽기 힘들다는 건가”...하면서. 만약 이런 일이 평범한 가정집 식탁 앞에서 벌어졌다면 틀림없이 험한 얘기가 오고 갔겠지만 이건 특수한 상황이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식욕부진을 호소하는 그들은 다름아닌 사형수들이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외딴 섬에 있는 감옥에서 다음날 새벽이면 사형대에 오르게 될 네 명의 죄수들, 남작 인가푸, 병사 아제실라오, 시인 살림베니, 학생 나르시스. 얼핏 보면 직업이나 신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죄목은 바로 국왕 암살 음모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감옥의 첫 동이 틀 무렵 사형 집행이 정해진 그들에게 감옥의 사령관이 협상을 제시한다. 네 명 중 어느 누구라도 익명으로 배후 인물인 ‘불멸의 신’을 밝힌다면 모두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예정대로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거였다. 몇 시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줄 알았던 그들에게 하늘에서 뜻하지 않은 동아줄이 내려온 셈이다. 굵고 튼실한 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 모르겠지만...




배신할 것인지 아니면 신념을 지킬 것인지, 사느냐 죽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진 그들은 마지막 밤을 지낼 위안실에 모인다. 거기엔 이미 치릴로 수도사란 이가 먼저 와있었다.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네 사람. 그들에게 치릴로가 말을 건넨다. 단두대에서 칼날에 목이 베이는 순간, 하고 많은 지난 세월 중 어떤 모습을 떠올릴지 각자 얘기해보자고. 잠깐의 망설임은  치릴로가 끈 촛불로 사라지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나이가 가장 어린 나르시스가 여인과의 사랑에 대해 얘길 하자 뒤를 이어 인가푸 남작이 자기보다 겨우 30분 늦게 태어난 동생에게 어떤 일이 있었으며 자신이 어떻게 해서 유럽의 수많은 망명자들의 주동자 노릇을 하게 됐는지 풀어놓는다. 아제릴라오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어떻게 해서 병사가 됐는지에 대해 말하고 시인 살림베니는 공작부인과 함께 했던 날들을 회상하듯 털어놓는데....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 스트레가 상 수상작’ 이 책의 띠지엔 이런 글귀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제수알도 부팔리노가 후보에 오르자 ‘이렇게 훌륭한 작품과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며 수상작 후보에 오른 작가들이 전원 자진 사퇴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책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다. 물론 결말이 초반보다 다소 성급하다는 느낌을 주긴 했다. 하지만 책의 전체를 관망하기보다 네 명의 사형수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펼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누가 배신을 할 것인지, 그들은 목숨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읽어서일까. 수시로 등장하는 인용문에 집중하지 못해서일까. 책에서 말하는 ‘불멸의 신’이 누구인지, 누가 어떤 언급을 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이 왜 그날 밤에 거짓말을 했는지 그 속내를 알려면 아무래도 차후에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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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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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다. 화제의 책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국화와 칼>이란 책에 대해 알게 됐다. 국화(평화)와 칼(전쟁)로 상징되는 극단적인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받는 책인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것으로 안다. 나 역시 그 책을 읽고 싶었지만 매번 기회를 놓쳐서 아직도 읽지 못했다. 작가의 이름은 모른채 그저 <국화와 칼>이란 책만 알고 있다가 최근 <문화의 패턴>이란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두 책의 저자가 같은 인물, 루스 베네딕트였다. 그것도 매력적인 미모의 여자!!




문화인류학의 입문서로 알려진 이 책은 문화가 우리 인간의 삶과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의 형태와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세 원시부족을 선정하여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의식과 생활 등 특징을 조사한다. 




먼저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 아메리카 중심부에 살아선지 서구 문명에 가장 잘 알려진 원시부족 중 하나인 그들은 개인보다 철저히 단체를 중시한다. 결혼이나 이혼 같은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버렸고 초자연적인 힘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환각을 경험하면 그것을 죽음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또 모계사회인데다 부부도 규칙에 따라 살기 때문에 여자가 새 남자를 맞아들이려면 남편의 물건을 문턱 위에 올려놓는데 남편은 그 물건 꾸러미를 들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도부족. 돌이 많고 험준한 화산섬이라 토지가 별로 없고 어업도 하기 힘든 척박한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탓인지 과거엔 식인을 하기도 했다. 부족민의 생명이나 권리를 보호해줄 법은 물론 추장이나 정치조직이 없으며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서로 적대적이었다. 친밀함의 상징인 결혼도 서로의 적대감을 완화시키지 못하고 장모는 사위가 될 남자를 집에 가두기까지 한다. 또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주술에 의존한다. 주술의 도움이 없으면 작물은 자라지 않고 성욕도 일어나지 않으며 경제적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술의 소유권이란 게 있어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가족 간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밴쿠버 섬의 콰키우틀족. 해안에 거주하는 그들은 물고기나 바다표범, 고래가 풍부해서 원시부족치고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족이다. 개인의 재산을 철저히 따져서 상속이 이뤄지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귀족 칭호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우월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서 주인은 손님 앞에서 자신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자랑하면 다음날엔 거꾸로 상대방 손님이 또 더 많은 재산을 탕진하는 식의 경쟁을 일삼는다. 또 결혼을 통해 신분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죽여서 그의 이름을 비롯한 권리를 얻기도 하는...현재의 상식이나 이성으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책에는 이 세 원시부족의 특징을 서술하는 중간 중간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를 거론하면서 디오니소스적 문화니 디오니소스형 인간 혹은 아폴로적 관습, 아폴로형 인간이란 말을 한다. 그것은 니체의 존재의 가치에 도달하는 두 가지 아주 상반된 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형이 추구하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상태는 환각이나 술 취한 상태인데 그에 비해 아폴로 형의 인간은 그런 도취의 체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중도를 지키며 파괴적인 심리 상태를 멀리한다.




저자가 살펴본 곳 중 아폴로 형에 속하는 부족은 푸에블로 족인데 그 외 대부분의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멕시코의 인디언들은 아주 열정적인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세 부족 모두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적인 면모를 보이는 그 부족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순간순간 당황스러웠다.




<문화의 패턴> 쉽지 않은 책일거라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원시부족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전통적 관습의 영향 아래 개인의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20세기 초 지구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원시부족의 삶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문화’가 무슨 뜻인지 찾았다. 문화란 ‘지식·신앙·예술·도덕·법률·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이며 ‘인류에서만 볼 수 있는 사유(思惟), 행동의 양식(생활방식) 중에서 유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소속하는 사회(협동을 학습한 사람들의 집단)로부터 습득하고 전달받은 것 전체를 포괄하는 총칭’이라고 되어 있었다. 순간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이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문화의 패턴>은 루스 베네딕트의 서거 60주년을 기념해서 출간됐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구촌은 갈수록 점차 가까워지고 세계 각국의 문화를 접할 기회도 그만큼 많아졌다. 낯선 나라의 낯선 문화에 대해 무조건 거부하기 이전에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기를 두고 다시 한번 꼼꼼히 꼭꼭 씹어가며 읽어보고 싶다.







베네딕트는 세 부족을 독립된 문화의 패턴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도부 족 같은 의심, 콰키우틀 같은 과시, 주니 족 같은 달관이 현대인에게는 셋이면서 하나로 종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가령, 현대인은 어떤 때는 의심에 빠지고, 어떤 때는 과시를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달관의 태도를 보이는 그런 모순적인 존재이다. 만약 자신이 의심을 많이 하는 현대인이라고 생각된다면, 베네딕트의 가르침대로(그렇게 의심이 많게 된 것은 본인의 성격이라기보다 문화적 조건화에 의한 것이므로) 본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개인의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베네딕트는 주장하고 있다. - 40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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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변화시키는 유태인 부모의 대화법 - 부모의 창의적인 대화법이 자녀의 두뇌를 깨운다!
문미화 지음 / 가야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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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매달 한 두 권정도 자녀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환경에 변화가 생겨서인지 예전과는 다른 행동이나 말투를 보이기 일쑤였다. 아이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질 못했다. 뒤늦게 태어난 둘째를 키우는데만 급급하던 사이에 큰아이의 마음이나 심리변화를 미처 느끼지 못했고 그로 인해 툭하면 목청을 높이게 됐다.




이게 아닌데...화가 치밀땐 잠깐 숨을 고르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아이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움츠러든 마음을 다독여줘야 하는데...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정작 중요한 순간엔 머리에서 맴돌기만 할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미 물이 엎질러진 상태에서야 비로소 아차!...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나와 아이의 불협화음이 도대체 어디에 원인이 있는걸까. 지금까지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경험에 의하면 100% 나의 잘못이고 부족함이 분명한데...어떻게해야 고칠 수 있을까...고민하다가 <아이를 변화시키는 유태인 부모의 대화법> 이 책을 만났다.  .




책은 제목 그대로 유태인 부모들이 아이와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에 대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부모가 알아야할 대화의 기초’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아이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부모의 대화법' '아이의 개성을 살려주는 대화법'  '조화로운 아이로 키우는 부모의 대화법'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비교하는 말이 아이의 가능성을 막으며 식사시간을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으로 바꿔야 한다거나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다그치기보다 이유를 물어야 하며 억지로 공부를 가르치려하지 말고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자극해주는 게 좋고 형제간의 싸움을 무조건 중재하려하지 말고 아이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등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 풀어놓고 있다. 또 '세계의 리더를 키운 부모의 대화법'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토마스 만, 멘델스존, 레너드 번스타인과 같은 유명하고 역사적 인물의 부모는 어떤 대화로 아이들을 크게 성장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3/1 정도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노벨상 수상자들도 많은데엔 그들의 부모와 아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창의적인 대화법이 비밀이란 것을 알게 된 <아이를 변화시키는 유태인 부모의 대화법>.




솔직히 이 책의 내용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육아서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의 반복이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처음 알게 된 것들도 있다. 유태인들은 특히 가정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주말마다 아빠가 아이들과 따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그 대화를 통해 아이들은 말하는 법을 비롯해 말할 때의 예의라든가 토론하는 요령과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조용한 것보다 다소 소란스럽다는 인상을 주더라도 아이들이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인다는 대목은 우리의 교육환경과 너무나 비교되는 부분이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 부모가 자신의 대화기술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우선 아이의 생각이나 얘기를 그냥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대목은 내게도 작은 가능성을 심어줬다.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이런 얘길 들었다.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걸 부모는 옆에서 그냥 지켜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잠깐 스치면서 들었던 짧막한 말이었지만 가슴에서 뭔가 쿵! 하고 소리가 났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갈수록 소비가 위축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녀의 교육비 지출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지금의 이런 상황이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건지....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교육환경이 지금 우리의 아이들을 채 꽃도 피기 전에 시들게 하고 있는건 아닌가...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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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8-09-07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는 옆에서 그냥 지켜본다... 대화를 들어준다. 생각만 바꾸면 충분히 가능한데 행동하기는 참 어려워요.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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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짙은 어둠 속, 푸른빛 연기가 한줄기 피어오른다. 붉게 활활 타올랐다가 스러지는 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여리고 가늘지만 오래도록 계속 타오를 것 푸른 연기는 왠지 서늘하게 다가온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 책은 우리에게 <철도원>으로 알려진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집이다.




<인연의 붉은 끈> 즐겨보는 일본만화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사랑하고 인연이 닿아있는 두 연인의 손을 이어주고 있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도 그런 의미의 붉은 끈이 나온다. 사랑하지만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헤어지게 된 젊은 연인, 그들이 서로를 붉은 끈으로 묶고 동반자살을 계획하지만 여자 혼자 살아남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그런 여인을 사람들은 죽은 사람처럼 대하는 모습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벌레잡이 화톳불>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온가족이 몰래 피신하여 숨어사는 가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간혹 ‘그건 내가 아냐. 내가 아니라 그자야.’하는 대목은 ‘도플갱어’를 연상시켰다. 전쟁중 부상과 굶주림에 지쳐 죽어갈 때 만난 또다른 자신에 의해 살아날 수 있었다는 그는 결국 ‘나는 그자그자는 나’라며 자신의 가족을 떠나간다.




<뼈의 내력> 깊은 산속의 산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마주 앉았다. 미혼일 줄 알았던 요시나가가 결혼을 해서 부인이 있다니...놀라고 당황한 친구에게 요시나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외교관의 딸인 사치코와 사랑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던 사랑,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사랑을...




이 외에도 <옛날 남자>에서는 한때 도쿄의 명물이었지만 지금은 낡은 병원의 병원장이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앞에 나타나고 <손님>에서는 백중 첫날 주인공 고이치가 우연히 만난 술집 마담을 집에 데리고 와서 ‘마중 불’을 밝히면서 순간 잊고 있던 연인, 임신한 몸으로 철로에 몸을 던진 미나코를 떠올리고 <여우님 이야기>에서는 여우 혼에 씌인 어린 소녀의 슬픔과 끔찍한 최후가 마음에 응어리진채 남았다.




하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원별리>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전쟁터로 끌려온 병사가 죽어서도 아내 요리코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런 남편에게 아내는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얘기한다. ‘요리코 요리코 요리코 요리코’하고 자신을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육십 년이 넘도록 들려서 자신은 최고로 행복했다...는 대목에서 울컥하고 눈물이 솟았다.




한줄기 푸른 연기가 위로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흩어져서 주변과 똑똑히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처럼 이생에서의 삶이 끝난 이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그들을 추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쭈삣쭈삣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섭다기보다 슬프고 안타깝고 또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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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
한호택 지음 / 달과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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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이 봇물 터지듯 출간되고 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팩션(Faction)이란 용어가 나올 정도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인 팩션(Faction). 그렇게 탄생한 역사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실로 매력적이다.




옅은 미색의 바탕에 초록빛 흘림체 ‘연서’라고 적힌 표지는 단순하지만 단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무왕의 사랑과 투쟁’이 어떠하길래 이다지도 고즈넉한가...




<연서(戀書)>.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은 백제 무왕의 탄생과 성장,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장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사람들이 물으면 어머니는 웃으며 습지에 살고 있는 용이 아버지라고 했다’라며 주인공인 장의 출생의 비밀로 소설은 시작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어머니에게서 늘 “넌 큰일을 할 사람..”이란 얘길 듣고 자란 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연인, 첫사랑인 꽃님이가 시집을 가버리자 극심한 방황을 겪는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들과 산에 움집을 짓고 지내던 장은 어느날, 자신의 아버지가 백제의 왕이란 뜻밖의 얘길 듣는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지광스님을 찾아가 수련 받는 것을 시작으로 도기공방에서 도자기를 빚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 다스리는 법을 깨우친다. 뒤이어 만난 스승 왕평에게서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보살피는 자이며 왕을 도우는 군자의 도리에 대해 배운다. 또 그림공부와 그림을 파는 과정이 사람 사이의 관계나 국가 간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차츰 영웅으로 성장한다.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비밀리에 붙여진 자신의 존재를 찾고 소서노의 검을 찾기 위해 왜로 건너간 장은 자신의 배다른 형인 아좌태좌를 만난다. 또 신라에서의 여러 문제로 인해 왜로 피해있던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고구려와 신라에 밀려 쇠퇴일로에 처한 제국 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일어선 무왕의 탄생과 성장,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과 허구를 아주 재미있고 빠른 이야기에 담은 이 책은 무척 빠르게 읽혀진다. 하지만 왠지 허전하다. 제목은 분명 ‘연서’인데 운명적인 사랑을 나눌 선화공주가 중반 이후에 나오는데다 둘의 사랑도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나무로 치면 풍성한 잎을 다 떨궈내고 앙상한 줄기만 남은 셈이고 여행에 비유하면 출발지와 종착지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느낌이다. 거기다 결말이 좀 생뚱맞다는 느낌을 줘서 이게 정말 끝인가...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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