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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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괄한 음성, 호탕한 웃음소리,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도 뒤에 숨지 않고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시원하게 일갈하는 배짱 두둑한 모습.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한 김진애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딸부자집 막내딸로 태어나 여중, 여고를 거쳐 줄곧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캐릭터였다. 왠지 모르게 씩씩하고 유쾌한 언니 같은 느낌? 건축가이자 정치인, 그리고 <김진애의 도시이야기> 3부작으로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알려진 김진애. 그가 풀어놓은 여행 이야기가 궁금했다.

 


<여행의 시간>도시 건축기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이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터득한 여행 비법을 담은 책이다. 이것만 보면 딱히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포털에서 검색만 해도 여행에 관해서 세세한 것까지 알려주는 유투버와 블로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저자가 바로 김진애가 아닌가.

 


여행에 대한 로망이란 거의 본능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누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 9


 

계획했던 포르투갈 여행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무산된 이야기로 책은 시작된다. 바이러스의 위협을 오로지 집콕으로 버텨냈던 날을 지나 어느 정도 일상으로의 회복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건 갖가지 위험과 고생이 예견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데엔 분명히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떤 여행을 떠나야 할까.


 

여행이란 우리가 열심히 구축해온 일상의 성체를 깨는 시간이다. 익숙한 일상, 낯익은 사람들, 손에 익은 물건들에서 벗어나서 예기치 못했던 만남, 낯선 사람들과 문물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103

 


저자는 가장 먼저 홀로여행을 이야기한다. 유학시절 파리로 떠난 첫 홀로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를 만나고 나니 숙소에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몸짓으로 소통하는 것이 익속해지자 인생에서 홀로여행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드넓은 자연보다 도시를 빨빨거리고 여행하기를 즐기는 저자는 잠깐씩 멍때리는 시간을 가진다는데 그것조차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홀로여행은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최고의 기회다. 나의 가능성과 한계, 나의 기질과 성향, 나의 동기와 목료, 나의 역량과 준비태세, 나의 심리와 행위, 나의 불안과 약점 등을 홀로여행이라는 의외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나를 발견해주는 태도’, 사실 이것이 여행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42

 


어떤 이를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하는지에 따라 여행의 느낌도 달라지는걸까. 저자는 커플여행을 비롯해서 아이들과의 여행, 부모님과의 효도여행, 반려동물과의 여행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로 부부가 여행을 떠날 때는 유서를 써놓고 비행기에 오른다거나 반려견 울럼과 둘이 떠난 여행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는데 저자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보디가드이자 가족이었던 울럼이 떠났을 때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가난한 여행과 부자 여행을 언급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전재산인 집을 팔아서, 조기명퇴하고 퇴직금으로 온가족이 세계일주를 하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대단하다’,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여행에 있어서 돈과 시간은 필수요건인데 그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그렇다면 어떤 여행이 좋을까 고민이 되는데 저자는 가난한 여행을 통해 강한 멘탈과 적응력을 기를 수 있어 두고두고 남는 체험이 된다며 꼭 해보라고 권한다.


 

여행이란 어차피 돈과 시간 사이의 줄타기다. 인생이란, 불공평하게도 또는 아주 공평하게도, 돈이 없을 때는 시간이 많고 돈의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에 쫓길 확률이 높다. -194~195쪽

 


지난 겨울,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다녀했다. 12, 국내 인근 지역을 다녀온 게 전부였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언제나 음식 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갔는데 이번엔 패스하고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차로 이동하면서 느긋하게 둘러보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주변 식당을 기웃거렸다. 저녁을 먹고선 바로 숙소로 가지 않고 야경이 아름답다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이번에 여행한 도시를 가깝다는 핑계로 몇 번이나 찾았지만 야경을 제대로 감상한 건 처음이란 사실. 의외였다. 우리 가족이 이제야 여행의 재미를 깨닫게 된 건 아닐까. 다시 찾아온 여행의 시간, 기대가 된다.


 

여행에 대한 진짜 에필로그란 여행기나 출장 보고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쓰는 에필로그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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