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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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자락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움츠리곤 한다. 내가 나를 끌어안듯이 양팔로 감싸 안는다. 헛헛한 속을 데워줄 온기를 가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게 된다. 무더운 여름이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의 한 가운데에 들어왔다는 증거다. 곧 냉기를 머금은 겨울이 다가오겠지.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란 생각이 든다. 예전엔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는 계절이 가을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을, 지난 시간을, 그리고 곧 어제가 되어버릴 오늘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가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가을엔 혼자 있으려 하고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삶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고 싶은 것일지도...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의 저자 림태주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글이 좋아서 밑줄을 긋고 포스트 잇을 붙이고 필사를 하지만, ‘말이 좋아서 밑줄을?’ 어떤 의미인지 알 듯 모를듯했다. 혹시나 표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표지엔 어떤 그림도, 사진도, 일러스트도 없다. 그저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빛으로 비치는 모습이 전면에 드리워져 있을 뿐. 저자에게 말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하루에도 무수히 쏟아내는 말 중에서 저자가 밑줄을 긋듯이 가슴에 담아낸 말을 어떤 것일까.


 

시집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의 책, 손이 작은 내가 한 손으로 잡고 읽어도 거뜬한 크기인데다 짧은 글로 이루어진 책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외출할 때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기 좋았다.


 

진심의 핵심, 진정성의 요채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양적으로 사용하면 진정성이 된다. ()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 않는 사람과 바쁘더라도 흔쾌히 시간을 내주는 사람의 차이가 관계의 진정성을 가른다. 시간이야말로 확실한 진심의 지표다. () 나는 미워하는 시간보다 사랑하는 시간을, 잊으려 하는 시간보다 그리워하는 시간을 더 늘리려고 한다. 나를 위한 유익과 즐거움을 구매하는 데 내 목숨을 지불하려고 한다. - [진심을 알아보는 법] 중에서

 


양치기나 파수꾼이나 등대지기는 별이 발명한 직업군이다.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고 그토록 사람의 말이 그리울 수가 없다. 나는 어쩌다 시인이 되어 고독에 세 들어 살고 있다.(6)’ 책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가슴이 설렐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는 때로 상대의 말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오해하기도 하고 어떤 사정 때문에 차마 전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말들을 저자는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 녹여내어 자신만의 프리즘을 통해 전하고 있다. 때론 아련하게 때론 따스하게 때론 냉철하게.



나는 그가 제대하는 날까지 말의 거리를 풀지 않았다. 언어를 주고받았을 뿐 그와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무겁게 깨닫기를 바랐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상대가 예의 바르고 존중하는 말을 건네더라도 그건 철저하게 외면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상대의 마음에 1밀리미터 다가서는 건 달나라 가는 궤도를 구하는 공식 만큼 어렵다. 마음 한 줌을 얻지 못하면 백 마디 아름다운 말이 내 것이 아니다. [말의 표정] 중에서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하천으로 돌아오는 은어(銀魚)는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의 물빛과 닮은 색을 띠어 회갈색 등에 은백색의 배를 지니게 됐는데 저자는 그런 은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든 인식할 때 분류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물고기 은어가 떼를 지어 살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도 끼리끼리의 언어인 은어(隱語)가 있다며 어떤 무리든 거기에 속하려면 그 언어를 먼저 익혀야 하는데 실상 우리는 그렇지 못함을 꼬집는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사랑이 실패한 이유는 상대방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 내가 쓰는 언어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해 모든 것을 내 관점에서 말하고 내 언어 체계로 이해하려 들었다. 상대의 말을 그만의 은어라고 여기지 않았다. 탐구하여 배우려 하지 않았고 시간과 인내가 소요되는 일임을 고려하지 않았다. 자꾸 다른 데서 관계의 하자를 찾으려 했으므로 실패를 반복했다. 그저 말이 잘 통하는 성격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맸다. [은어의 세계] 중에서

 


하안거나 동안거 기간에 사찰을 찾으면 방문객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있다. 자신만의 화두를 안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 중인 스님들을 위해 다른 이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는 달랐다. 고요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찰에서 묵언 수행 중이란 푯말을 만나면 좋았다면서 스님들이 고요를 닮는 연습을 하는 거란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렵다. 문을 걸어 잠그고 정진을 거듭해야 할 정도니까. 내가 고요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말할 때 잠잠함을 유지하는 법이다. 말을 전하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 고요의 가르침이다. [고요의 원리] 중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떤 일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사고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평소 자신이 여러 과정을 통해 습득했던 지식이라고 한다. 때문에 잘못된 지식과 정보로 인해 확증편향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하는데 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당신이 타인에게 보여준 언어가 되돌아와 당신이 된다는 글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아니 가까운 가족에게 어떤 언어를 구사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사는 동안 사람은 한 권의 사전이 된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일생 동안 자신이 사용했던 어휘와 정의 내린 개념들이 빼곡히 세포에 기록된다. 기록한 페이지들을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고, 그 단어들을 간추려 자신만의 문장으로 엮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인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 엮인 문장들의 줄거리와 고갱이를 이르는 것이 아닐까. [국어사전 사용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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