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인가를 보고 거울을 볼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만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마지막화까지 봤다. 

악귀,라는 제목이지만, 악귀가 정말 악귀인가 싶은 사건들 가운데, 이입하기 힘든 이야기에 숨쉴 틈이 없이 진지하다고 생각하면서 봤다. 

끝까지 보고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를 타깃으로 할 수 밖에 없어서 이야기가 이런가, 생각했다. 

무능한 엄마에 대한 묘사를 나는, 싫어한다. 구산영의 엄마는 산영이가 아기였을 때 이혼하고 그 집을 벗어났고, 친정엄마를 그런 식으로 잃고 나서, 미혼모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구산영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는데, 왜 저런 식으로 묘사할까 생각했다. 구산영의 엄마가 그렇게 무능했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구산영을 키울 수 있었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운동장의 동전을 줍고, 엄마가 친 사고를 수습하는 딸로 묘사되는 구산영은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것으로 묘사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얽매는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묘사하는 무능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구산영의 자기 확신이 엄마의 무능을 강화하는 관계였겠지- 이야기는 타깃이 젊은이고, 젊은이의 눈에 구산영의 불운은 엄마의 무능에 있는 것이어야 했을까.

 

악귀,의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는 과거 사건의 묘사는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를 많이 혼란스럽게 한다. 왜 이런 연민을 불러일으키고도 평화롭게 보내줄 수 없었을까. 악귀의 악행은 자신의 의지가 있었던 걸까. 악귀의 의지는 무엇으로 어디로 향하는 건가. 

이용당하는 악귀, 이용하는 무당과 염해상의 할머니 사이에서는 악귀가 불쌍해 보이다가, 다시 구산영과 악귀 사이에서 구산영이 불쌍해지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댓가가 악귀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머니도 죽고, 아버지와 오빠도 죽고, 그 순간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살 수도 있었던 향이가 그 돈들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가서 동생을 살려 달라고 내밀 때, 악귀,라고 부르기에 불쌍한 향이가 왜 어느 순간 '자신만을 위해 살기 원하는' 악귀가 되었을까. 이미 무당은 향이를 그런 존재라고 설명할까. 산영이 마음 속에 작게 솟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꽉 잡고 실행에 옮길 때, 무엇을 이용하고 있는 걸까. 라이토의 데쓰노트, 같은 걸 젊은이에게 준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악귀,의 존재가 그저 증명하지 못하는 어떤 죽음들에 대해 법이나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한다. 법으로는 방법이 없고,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어, 라는 걸까. 싶기도 하다.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한 시대를 떠나보낸 것인가,라고도 생각했다.

 

마지막화를 보면서는, 젊은이가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가 의문을 품었다. 나는, 젊은이가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https://blog.aladin.co.kr/hahayo/13054698 사는 걸 버거워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는 건 즐거움의 축제,라기 보다는 고통의 바다,인데, 나도 젊었을 때는 즐거움의 축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를 착각할 수 있게 한 부모의 보호 아래서 내 자신을 거대하게 상상하면서 인생의 어느 단계 어떤 성취만으로 다음 순간의 평안이 보장된다고도 생각했다. 인생에 무언가를 보장하는 성취 따위는 없고, 매 순간 나의 선택이 다음을 만들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고통이 있다는 걸 살아가면서 매 순간 느낀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부모조차 너무 작아져서, 삶이 버거운 순간들에 이게 삶이라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보기에 아쉬울 것 없는 삶들도 나름의 고통으로 괴롭다는 걸, 또래의 죽음들 가운데 안다. 자아라는 게 환상에 불과하고, 삶의 어느 순간 자아는 없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산영이의 말은 스스로를 죽여왔던 자신에 대한 다른 말인 건 알지만, 지금 젊은이들이 산영이처럼 자신을 억눌러야 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억울해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참음,을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어, 싶은 순간들,이 있어서. 

이야기의 어떤 면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동안 너무 나를 억누르고 참기만 했어. 앞으로 안 그럴래'라는 말이 현실의 어떤 세태와 맞물려서 무섭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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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의 달인이 되는 법 : 우리말 어원 사전 -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말’들의 히스토리
조항범 지음 / 태학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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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말하는 것. 

정확하게 말하는 것과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 

학자라면,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막 재미있지도 확정적이지도 않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이런 저런 어원설이 있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기억나는 건, 점잖다,라는 말이 그러니까 조용하고 분별있게 행동하고 뭔가 좋아보이는 이 말의 어원이 젊지 않다,라는 것. 

주책맞다,의 주책이 줏대,와 같은 뜻이라는 것. 그런데 아예 반어적으로 의미변화가 생겼다는 것. 


화냥이라는 말이 병자호란, 이후 적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를 이르던 환향녀,에서 유래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 나는 그러니까 환향녀,라는 어원설을 믿었던 거다. 전설의 고향,에서도 봤고, 그런데, 이건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만드는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그런 거지, 실상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이미 그 말은 있었다고 하더라. 신기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황을 읽는다. 실제 어원은 창녀를 이르던 중국말 화낭(花娘)에서 유래했단다. 이건 이야기가 너무 없네. 그래서 사람들이 믿었네, 싶다. 


을씨년스럽다,의 을씨년이 을사늑약,의 을사년이 아니라는 것. 을사늑약이 있기 전에 이미 그 말을 쓰고 있었고, 기록도 남아았다고. 1785년 큰 흉년이 이어지던 을사년에 대한 말이라고 한다. 굶지 않는 시대의 사람들은, 추상적인 국가의 존망에 이런 어원을 연결했구나, 싶다. 


궁금하면 하나씩 다시 찾아보겠네, 싶다. 

말의 어원에 이야기를 하나씩 달고,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말해주면 좋겠지만, 원래 그런 게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먼 훗날, 혜자스럽다,나 창렬하다,같은 게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남으려면 우선 그 말이 살아남아야 겠지. 

만들어지고 입에서 오르내리고, 변화하고 다시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또 이야기를 만들고, 말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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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이동물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3547749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사고,라기에는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이다. 

그래도, 이 책 속의 '모노노아와레'때문에 아래 책-변종-이 떠올랐다. 

지구를 버리고 우주로 떠나게 되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일본인을 묘사한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버리다니 이해하지 못하겠다, 에 존경스럽다,까지. 

한국인인 나는, 중국계인 저자가 가지는 일본인에 대한 태도에 그래, 일본사람들의 문제는 그거지,라고 좀 다른 품평을 하지만, 다시 다른 관점에서 저자가 살고 있는 서양인의 세계에서 일본인에 대해 가지는 경외심,은 동양인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갑자기 변종, 생각이 났다. 




2. 변종

https://blog.aladin.co.kr/hahayo/5205694 

심해 괴물?과의 대결을 블록버스터처럼 묘사하는 소설인데, 모노노아와레 때문에 떠올랐다. 

심해 괴물은 하나하나는 단세포동물처럼 보잘 것 없고, 쉽게 없앨 수도 있지만, 이게 군집으로 움직일 때는 종 자체의 보존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대적하기 어려운 존재로 묘사된다. 

개별적인 자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과연 단 하나의 목표, 종 자체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진행되는 이야기가 갑자기 모노노아와레를 읽다가 떠올랐다. 

동양인인 나는, 종의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는 이르,와 굳이 대적해야 할까 공존을 모색하는 게 낫지 않나하고 생각하면서, 왜 어떻게든 이 비장한 전투를 승리하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투쟁의지를 불사를까?라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모노노아와레에서 일본인을 묘사하는 경외의 감정이, 이르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겹쳤다. 나는 죽어도 나의 종족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함께 움직이는 작고 미약한 존재에 대한 묘사와 겹쳤다. 


3. 도롱뇽과의 전쟁

https://blog.aladin.co.kr/hahayo/10213714

이건 원 서양인이 동양인을 도롱뇽처럼 생각하네,라면서 읽었어서 다시 또 붙이기가 그렇지만. 

그래도, 너무 노골적으로 와닿았어서 빼놓을 수가 없다. 











서양저자의 책들,에서 묘하게 걸리는 태도의 문제들 때문에, 궁금해서 동서양의 인간이해, 도 구해 읽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원처럼 둥근 세상을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것과 만나고, 무와 유가 다르지 않는 세상을 사는 동양인을, 어느 순간 무한소급을 끊기 위해 절대자 신을 만들어낸 서양인들. 

서양인들에게 동양인들은 미지의 존재가 된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동양인은 도롱뇽이기도 하고, 이르이기도 한 걸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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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1
스티븐 프라이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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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책을 쓰라면 못 쓰고, 말을 하려면 버벅거리겠지만,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들이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책은, 이런 경로로 선택되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라는 책을 읽고(https://blog.aladin.co.kr/hahayo/12850004) 그 중에 스티븐 프라이,라는 사람의 말이 어쩌면 나의 태도 같아서 그 사람의 책을 읽어보자 싶었다. 

이야기는 하나인데,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의 정치적 태도가 드러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토론하던 책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언어가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유주의 아나키스트, 같은 느낌이었다. 언어를 존중하기 때문에, 언어를 교정하려는 PC주의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스신화,를 다시 쓴 이 책의 초반은 그래서일까 거부감이 들었다. 권위적인 것은 문제지만, 권위는 필요하고, 국가나 조직은 개인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그리스신화에서 신들을 묘사하는 것이 권위에 대한 반항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한심한 신들의 이야기이니, 그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결점많은 신들이 강력한 힘으로 인간을 벌한다.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꾸역꾸역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 이야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화는 어차피 전부 허구라고 답하겠다.-p495'라는 후기를 읽었다. 후기의 말들,을 읽으니 좋았다. 테오이 닷컴(theoi.com)은 기억하기 위해 적어 두겠다. 

포스트잇을 잔뜩 붙였는데, 어떤 마음으로 붙였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형벌,에 잔뜩 붙어있는 것이 시험하는 신에 대한 어떤 태도가 동양의 태도와 달라서였던가 싶다. 아이를 살해하는 이야기들을 역시 그리스신화에서 만난다. 그런 이야기가 동양에도 있는지 생각했다. 

삶은, 인간은 복잡하고, 어떤 언어나 이야기도 인간이나 삶을 담지 못한다. 언어나 이야기가 담은 작은 조각들, 다시 이야기는 언어가 되어 남는다. 그리스신화는 서양인에게 자신의 언어의 유래, 소리로밖에 묘사하지 못하는 표음문자의 세계에서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담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안 돼. 항아리를 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나자 판도라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아리의 마력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의무라고 믿었으나 지금은 항아리가 그녀에게 치명적인 유혹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물건을 침실에 놔두고 밤낮 할 것 없이 조롱당하고 유혹당하다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p178


하지만 닉티모스가 아버지를 이어 인류를 통치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마흔아홉 명의 형제들이 난폭하게 땅을 약탈하면서 추태를 보이자 제우스는 인간 실험을 완전히 종결할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 제우스는 구름을 몰아 거센 폭풍우를 일으켰고, 이윽고 땅이 물에 잠겨 그리스와 지중해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p183


그렇다면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달라졌던 것 같다. 처음에는 하데스가 직접 심판자 역할까지 했지만 나중에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두 아들, 미노스와 라다만티스에게 위대한 심판을 맡겼다. 두 형제는 죽은 후 이복형제인 아이아코스와 함께 지하세계의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망자가 영웅이었는지, 평범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벌을 받을 만큼 악한 인생을 살았는지 판결했다.-p188


인류의 최고 창조자이자 옹호자, 친구인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를 가르쳤고, 우리를 위해 도둑질을 했으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우리 모두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일부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그를 동정하고 칭찬해야 맞겠지만, 질투심 많고 이기적인 신들과 달리 그는 숭배와 찬양, 흠모 같은 건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p193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렇듯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실제로 발견하는 건 그리스 신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면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폭력성과 애욕, 시정과 상징성이라는 기만적이고 알쏭달쏭하고 아찔한 수수께끼다. 너무 불안정해서 제대로 계산할 수 없는 대수학, 그것은 인간과 신의 모습을 하고서 단순하고 정확한 답을 내주지 않는다. 서사의 변화와 상징들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재미있지만, 대입은 잘 먹히지 않고 나온 답들은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신탁만큼이나 모호하다. -p288


그래도 혹여나, 정말 혹여나 언니들과 그 마녀 같은 노파가 한 말에 일리가 있다면? 따뜻한 살과 단단한 근육이 멋지긴 하지만 신이라면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세멜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이틀 밤만 더 지나면 초승달이 뜨니까, 그 때 그 오지랖 넓은 고약한 할멈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겠지."-p298


익시온은 아름다운 디아와 결혼해놓고도 그녀의 아버지인 포키스의 왕 데이오네우스에게 약속한 지참금을 주지 않았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 울분이 터진 데이오네우스는 앙갚음으로 기습 부대를 보내 익시온의 명마들을 훔쳤다. 익시온은 환한 미소 아래 짜증을 감춘 채 데이오네우스를 라리사 궁의 만찬에 초대했다. 그가 도착하자 익시온은 그를 불구덩이로 밀어버렸다. 접대의 율법을 명백히 어긴 것도 모자라 친족 살인이라는 훨씬 더 역겨운 죄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 당시 가족을 살해하는 짓은 가장 악랄한 금기로 여겨졌다. 익시온은 최초의 친족 살해를 저질렀고, 이 죄를 씻지 않는다면 실성할 때까지 에리니에스에게 쫓길 운명이었다.-p324


티로는 시시포스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지만 아버지 살모네우스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아들들이 자라서 자기 할아버지를 죽이게 놔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신탁의 예언을 거역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리 와, 얘야." 그녀는 큰아들을 불렀다. "강물을 보렴. 작은 물고기들이 보이니?"

소년은 강변에 무릎을 꿇고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티로는 아들의 목을 잡고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몸부림이 멈추자 막내아들에게도 똑같이 했다.-p335


자기애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거울에 자신이 사랑스럽거나 감탄할 만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만 보고 싶은 욕구로 가장 잘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의 눈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를 본다. 이 정의에 따른다면, 자기애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p427


노부부가 힘들게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땐 거센 물살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마을을 등지고 빗속에 서 있을 순 없어." 바우키스가 말했다. 

"당신이 뒤돌아보면 나도 그렇게 할게."

"사랑해, 나의 남편 필레몬."

"사랑해, 나의 아내 바우키스."

그들은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큰 홍수가 에우메네이아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는 순간, 필레몬은 참나무가 되고 바우키스는 보리수가 되었다. 

두 그루의 나무는 영원한 사랑과 겸허한 친절의 상징으로 수백년 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 한데 뒤얽힌 가지에는 그들을 기리는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선물이 걸려 있었다. -p469


고대 그리스인들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을지 몰라도 인생과 세상, 그들 자신을 대부분의 문명들보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솔직하고 밝고 관대한 시각으로 보는 기술을 개발했던 것 같다.-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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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보고 싶대서 보러 갔다. 

나는 양이 늑대랑 우정을 나누는 것도 싫어하고(https://blog.aladin.co.kr/hahayo/5025827), 주토피아도 싫어하는데(https://blog.aladin.co.kr/hahayo/8604003), 여기서는 물이 불이랑 사귄다. 좋을 리가 없다. 

사랑은 생존 다음에나 누리는 건데, 이야기를 만드는 한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너무 당연시하는 문제가 있다. 물이 불이랑 만나면 물이 증발하든, 불이 꺼지든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판에 사랑이라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답없는 존재들이다. 

코코에서도 드러나는 문화창작자의 우월감(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7267949)가족을 떠나는 존재들의 묘사,는 역시 서구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더하여, 이민자 정체성, 맘에 들지 않는다. 

나는 아들의 절을 받지 않는 엠버의 할아버지같은 사람인 거다. 

파친코를 볼 때도, 엘리멘탈을 볼 때도, 서구인의 비대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 한국계임을 드러내어 스스로를 파는 이민 2-3세대에 대한 거리감이 생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2-3세대야, 뭐 미국사람이지 한국계라는 게 의미가 있어?라고 말하더라. 뭐, 나는 2-3세대가 가지는 묘한 심사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외로움이나 고립을 부풀려서 생각하기 마련인 십대시절을 지나고, 성인이 되어 부모가 떠나온 자신의 뿌리가 지금 자신에 속한 산업(문화지)에서 각광받고 있는 걸 보는 건 어떤 마음일까, 싶은 거다. 여기가 얼마나 고 레벨의 경쟁사회인지는 모르면서, 부모가 떠나온 세상의 어떤 걸 들어 자신을 팔려고 한다. 미국인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한국계,라고 부르겠지, 싶다. 선택하지 않은 이주라서 피해의식이 드러나 보인다. 


아이들이 재밌다고 했으니, 뭐, 나는 이제 너무 어른인가, 생각하고. 

구름이 내리고 홀쭉해졌던 비행선이 다시 구름을 태우고 빵빵해지는 게 좋았다고 해서, 뭐 그럼 됐다, 싶다. 


나는, 디즈니와 결합한 픽사가 유머감각을 잃었다고, 지나친 은유가운데, 대책없는 이야기 가운데, 겨울왕국에서 멋지게 비튼 어떤 클리쉐들이 다시 등장한다. 사랑이 전부인 양 키스로 마치고, 죽음 뒤에 다시 살아난다. 뒤에 꼬맹이들은 울었다는데, 다시 살아나다니. 

음, 조만간 디즈니는 양치기 소년처럼 아무도 울리지 못하는 이야기나 만들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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