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내게 초등학교 여자아이로는 으뜸이었던 우리 귀연이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더는 깜찍한 질문을 할 초등학생을 만날 일이 없겠구나 싶었는데 속단은 금물이었다. 어떻게 오다가다 알게 된 초등학생인 박양이 대뜸 "산타는 왜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근사한 선물을 주고,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뻔한 선물을 주는거죠?"라고 묻는다. 부잣집=근사한 / 가난한=뻔한 이라는 물음이 독창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의도가 있던 없던 박양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고 싶었다. 물론 '부모들의 지불능력 차이가 아니겠니?' 뭐 이런 대답을 한다고 누가 돌을 던지랴마는 사려깊은 어른으로 보이기 위해 좀더 우아한 대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뭐 우아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뻔한 결론. 늘 하는 모지리짓. 또 허튼소리. '만족을 몰라. 부잣집 아이들은' 아이고!

 

1.

겉만 여물고 속은 무르며 속기도 잘 속고 울기도 잘 울고 먹기도 잘 먹는 김양이 작년 연말부터 잠잠하여 다행이다 싶었는데 속단은 금물이었다. 보통 혹은 정상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수적으로 조금 많은 뭐 그런 정상의 세계로 복귀했으려니 싶었는데 김양의 순애보는 역시나 까마득했다. 2014년에도 김양은 차근차근 능동적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무지하고 비겁해져 범속한 평균치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한가. 싼티나는 생각이 가래보다 못한 말로 변해 입 밖으로 떨어졌다. '만족을 모르냐, 너는' 아이고!

 

2.

반성 108

 

 

나는 또 왜 이럴까

나는 또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영화를 생각

한다.

벰, 베라, 베로 그 요괴인간을 생각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외친 그 주제가를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그 흉칙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필이면 왜 정의를 위해 싸웠을까

하필이면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빨리 요괴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저 예절 바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 김영승

 

3.

변할 수 없는 나를 피하지 않겠노라 술김에 다짐했다. 그 다짐 속에 너도 포함된다. 뭐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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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당 2014-02-2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천 개의 손
- 나희덕


그의 손은 천 개나 되고요
머리에 얹은 화불도 헤아릴 수 없어
손으로 잡으려 하면 뿔뿔이 달아나버렸지요


대체 그 많은 손을 어디에 쓰나
갸웃거리며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 오는데

아, 천 개의 싸릿가지가 지나간 마당


고통의 소리를 본다는 그가
사람 마음에 따라
서른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그가
내게는 싸리비 든 손으로 와
흙알갱이 어지러운 마음 바닥을 쓸고 갔네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져
나는 한 걸음도 내려서지 못하고
구름 난간 같은 계단에 앉아
빈 마당만 소슬하게 들여다보았지요


마음을 지나는 소나기떼처럼
싸리비 닳는 소리 아직 들리는 것 같아서요

굿바이 2014-03-03 12:06   좋아요 0 | URL
언제쯤 저런 마음을 가늠이나 할 지 알 수 없지만, 시는 읽어도 좋군요.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2014-02-26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3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4-03-2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아직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

웽스북스 2014-07-07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언니, 저는 이 글을 왜 이제야 봤을까요.
중학생이 된 귀연이 이야기가 저는 늘 궁금하고, 기대되고 그래요 : )
 

0.

노부요시 아라키의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유쾌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졸렸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지,라며 강요하는 사진을 분리수거했다. 말그대로 재활용 비닐백에 담았다.

 

1.

호구(糊口)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권혁웅

 

2.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

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

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

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부러졌다

 

- 한강

 

3.

권혁웅의 시와 한강의 시를 포개어 읽는다. 상추와 깻잎을 포개듯. 그렇게 포개진 상추와 깻잎에 한 시절 또는 여전히 유효한 고유명사,하나를 얻는다.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씹어 삼킨다.

 

4.

동학농민혁명 이후 첫 번째 갑오년은 1954년, 두 번째 갑오년은 2014년이다. 실은 갑오년이 되기도 전에 나는 너일 수 없었고 너는 내가 되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일단 갑오년이 오기까지 기다렸다. 수운에게 묻고 싶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살길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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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그늘 2014-02-2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자주..
자주..
올려 주셔요~^^

한강 시집 샀는데.. 괜찮았나요?
읽어봐야 겠어요^^

굿바이 2014-02-25 14:28   좋아요 0 | URL
어떤 시는 잘 읽히고 어떤 시는 또 그렇게 눈으로만 봤어요. 개인적인 느낌인데 한강,이라는 작가는 좀처럼 외투를 벗지 않는 작가라서 호불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튼 구입한 시집이니 읽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잘 지내시죠?

2014-02-26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4-02-2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혁웅의 시집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그런 주제에 트위터에서 계정을 팔로잉을 했더니만 아이고, 이 분 하시는 말씀이 너무 어려워요. ㅋㅋ

굿바이 2014-02-26 14:42   좋아요 0 | URL
치니님 '아이고'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____________^

여튼 서울도 '아이고'소리가 절로 나오는 하늘이에요~!
 
친구는 바다 냄새 쪽빛문고 7
구도 나오코 지음, 초 신타 그림,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왕자가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책을 읽는다. 늙은 나는 심지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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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그늘 2014-01-2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늙은 저도.. 심지어 울게 될까봐.. 못보겠습니다. 책 괜찮은가요?
별5..^^

굿바이 2014-01-28 22:36   좋아요 0 | URL
넵! 자신있게 추천합니다 ^___________^

 

분진이라고 생각했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날리는 것들을 손등으로 툭툭 쳐냈다. 그제야 알았다. 차가워서. 눈이었다. 눈이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리보니 11월이다. 여튼 신나지도 않고 신기하지도 않고 그저 뱃속이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횡단보도 건너 삼성전자대리점 전면 유리창 현수막의 전지현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냉장고 옆에 서있다. 잘 익은 혹은 잘 익을 개연성이 높아보이는 김치 한 사발이 그녀 옆에 있다. 김치도 그녀도 참 따뜻해보였다. 더 나아가 움켜쥐어 한 줌이나 될 지 모르는 그녀의 배 역시 차가워보이지 않았다. 맥락없이 부러웠다. 뱃속이 따뜻한 사람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돌아다니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멋진 울음터로구나. 크게 한 번 울어 볼 만하도다!"

 

위 뜬금없는 인용문은 요동벌판을 가로지르던 연암 박지원이 드넓은 광야에서 외쳤던 '호곡장'의 일부다. 왕십리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분진이라고 생각했던 첫 눈을 손등으로 내젓는 어리바리한 짓을 하다, 문득 전지현의 얼굴을 보고 전지현의 하얀 블라우스를 보고 전지현의 허리를 가늠하며 나는 '호곡장'을 생각했다. 대체로 욕망과 표상이 어긋나는 일에 불쾌했거늘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왕십리 사거리에서 오직 크게 울고 싶었던 하루였다. 그러니까 이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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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그늘 2013-11-2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지내시죠?

글.. 자주 올려주셔요..^^*

굿바이님 글이 제일 좋아요ㅎㅎ

굿바이 2014-01-27 22:40   좋아요 0 | URL
해가 바뀌어 댓글을 달다니, 용서하십시오!
올해는 뭐든 어찌해서라도 기쁘고 행복하셨으면 합니다^______________^

2013-11-26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7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튼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지혜정원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둘 다 폭력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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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8-0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가 도망쳐와 살았던 스위스의 Neuchâtel 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몇날 며칠을 같은 코스의 기차를 타고 스위스 basel에서 montreux 로 이어 지는 구간에 있는 Neuchâtel 을 가고 또 가고 했던 것 같아..

바다 같은 호수를 끼고 있는 그곳에서 그녀가 바라보았던 세상은 결국 그녀 내부의 lens를 투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용기 있는 자에게는 <나는 이 부분은 강조하고 싶은데, 결국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인가봐....... > 너무나 아름답지만, 자신의 내부로 향하기에 더 없이 좋은 그 곳이 작가에게는 어떤 의미였을지...

S 야..... 비 덕분에 그나마 서울은 참을만 했던 더위도.. 이제는 제몫을 하고 있는 여름이다..

당분간은 견뎌내야 할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