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노부요시 아라키의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유쾌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졸렸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지,라며 강요하는 사진을 분리수거했다. 말그대로 재활용 비닐백에 담았다.
1.
호구(糊口)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권혁웅
2.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
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
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
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부러졌다
- 한강
3.
권혁웅의 시와 한강의 시를 포개어 읽는다. 상추와 깻잎을 포개듯. 그렇게 포개진 상추와 깻잎에 한 시절 또는 여전히 유효한 고유명사,하나를 얻는다.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씹어 삼킨다.
4.
동학농민혁명 이후 첫 번째 갑오년은 1954년, 두 번째 갑오년은 2014년이다. 실은 갑오년이 되기도 전에 나는 너일 수 없었고 너는 내가 되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일단 갑오년이 오기까지 기다렸다. 수운에게 묻고 싶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살길이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