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진이라고 생각했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날리는 것들을 손등으로 툭툭 쳐냈다. 그제야 알았다. 차가워서. 눈이었다. 눈이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리보니 11월이다. 여튼 신나지도 않고 신기하지도 않고 그저 뱃속이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횡단보도 건너 삼성전자대리점 전면 유리창 현수막의 전지현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냉장고 옆에 서있다. 잘 익은 혹은 잘 익을 개연성이 높아보이는 김치 한 사발이 그녀 옆에 있다. 김치도 그녀도 참 따뜻해보였다. 더 나아가 움켜쥐어 한 줌이나 될 지 모르는 그녀의 배 역시 차가워보이지 않았다. 맥락없이 부러웠다. 뱃속이 따뜻한 사람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돌아다니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멋진 울음터로구나. 크게 한 번 울어 볼 만하도다!"
위 뜬금없는 인용문은 요동벌판을 가로지르던 연암 박지원이 드넓은 광야에서 외쳤던 '호곡장'의 일부다. 왕십리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분진이라고 생각했던 첫 눈을 손등으로 내젓는 어리바리한 짓을 하다, 문득 전지현의 얼굴을 보고 전지현의 하얀 블라우스를 보고 전지현의 허리를 가늠하며 나는 '호곡장'을 생각했다. 대체로 욕망과 표상이 어긋나는 일에 불쾌했거늘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왕십리 사거리에서 오직 크게 울고 싶었던 하루였다. 그러니까 이틀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