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을 찾은 건 태풍이 오리라는 소식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해 여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써 십오 년이 흘렀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간절했는지 무슨 성지순례처럼 보리암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시집 열 권, 무려 열 권이 들어 있었다. 소설이었으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져간 시집들도 참! 김수영도 있었고, 이성복도 있었고, 기형도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고, 오탁번도 있었고.... 맞다. 송창식 1집도 있었다. 참으로 다양하고 어지러웠으니 여튼 그때는 그렇게 화끈거렸다. 지금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짓이다. 

 

               다시 찾은 보리암은, 모르겠더라. 길도 낯설고 처음 온 곳처럼 모르겠더라. 지나간 것은 그렇구나 싶었다. 길도 모르겠으니 그냥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되었다. 아니다. 자동차가 산을 오른 셈이다. 보리암 아래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조금 올라가니 보리암이 보였다. 수능을 기원하는 프랭카드가 보였다. 갑자기 내려가고 싶었다. 물론 참았다. 보리암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금산 정상으로 향했다. 기억 속의 봉화대가 그대로 있었다. 봉화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은 태풍이 오기 전이라 고요했다. 뭔가 큰 일을 준비하는 듯한 엄숙함과 떨림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보았던 편백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면 바다가 보이고 더 들면 하늘이 보였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눈부신 빛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편백나무를 피어나게 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만 볼 수 있는 바다고 산이다. 어떤 것도 눈에 들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만 보았다. 간혹 새 한 마리가 울었다. 나도 입을 동그랗게 말아 비슷한 소리를 냈다.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했다. 그리고 몰래 가져간 시집을 꺼냈다. 심지어 읽었다. 시절이 스치고 계절이 스치고 몸과 몸이 스치고 나와 그대가 스친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스쳤다. 시집 한 권을 그리고 시 한 편을 읽는 동안.

 

               영원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내려오는 길. 내 앞을 킬힐 신은 처자가 천천히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일진데 저 처자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했다. 또한 온 몸의 무게를 저 구두가, 무려 11센티가 감당하고 있다니 놀랍고 처연했다. 정녕 푹풍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문득 그 처자 불러 세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오!"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지요!"라고.

 

통영

 

박정대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유행가만 중얼거리다가

너에게 보낼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담배를 피우며 가볍디 가벼운

내 1밀리그램의 영혼을 생각했을 뿐이야

밤이 깊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될 때까지

너는 어느 길 위에서

지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니

 

통영이라는 곳의 어둠

지금 이곳에서 나는 고요히 네 생각을 해

그런데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행진 중이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가 가는 길의 지도 위에 네가 없었다면

소라 방등 켠 객줏집 토방에서

너를 껴안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통영이라는 곳의 깊은 밤

내 담배 연기는 내 영혼에 부딪혀 부서지고

별들의 숨소리는 통영 앞바다에 와 부서지는데

이곳을 지나 난바다에 가서 죽는 바람들

이곳을 지나 너의 부드러운 혀 속으로 가서 죽는

나의 딱딱한 추억들

항구를 떠난 갈매기들도

이제는 잠에서 깨어

너의 편지를 물고 돌아오는데

 

통영이라는 곳의 아침

나는, 천희(千姬)라는 여자와 천 마리의 시와

밤새도록의 파도 소리와 새벽별과

너의 숨소리를 오래도록 생각다가

한때 내 영혼의 통제사가 오래 머물던 곳

통영이라는 곳에서

끝내 너에게 보낼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야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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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8-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창 밖에서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이 시를 읽었어요. 오래 전 통영에서 본 아주 새카만 밤이 떠오르네요. 저의 조그마한 온기를 보냅니다.

웽스북스 2012-08-28 22:3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네꼬님 글도 보고 굿바이언니 글도 보고. 계탔네 계탔어. 덩실덩실.

굿바이 2012-08-29 12:17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저는 뭘 보낼까요?
결이 고운 바람을 보냅니다~!

웬디양! 잘 잤나요? ^^

2012-08-28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8-2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남해라는 글에 냉큼 찾아왔습니다.
절이든 보리암이든 무엇이든 모두... 뭐랄까 속세(?) 실속(?)만 따지는 거 같아서 뭔가 안타까워요. 그냥 남해 이야기에 찾아왔다구요. 헤헤헤헤 ㅎㅎ

굿바이 2012-08-29 12: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보리암은 좀 아쉬웠지만 또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의 삶과 닮아있는 건 아닌지 싶었습니다. 삶과 닮아있어서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또 짠하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태풍 피해는 없으셨나요?

이진 2012-08-29 21:29   좋아요 0 | URL
남해는 태풍 거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태풍 피해가 그나마 없었어요. 바람이 한나절동안 강하게 불긴 했지만 농작물이나 주택들에 피해 줄만한 정도는 아니었구요. 굿바이님은 괜찮으셨죠?

2012-08-30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3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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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워터 재단으로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꾸욱 참습니다. 혹시나 그 SF소설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여튼 범접할 수 없는 미친아저씨 로즈워터 만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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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8-17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킬고어 트라우트느님.

굿바이 2012-08-17 04:06   좋아요 0 | URL
히히. 역시나~! 나도 따라해야지. 킬고어 트라우트느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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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좀비같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레이먼드 카버,를 통해 감각기관이 다시 열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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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8-1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성당>을 읽고 감히 실망해서 이책을 그냥 지나쳤으면 아쉬웠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책에 수록된 <봉지>라는 단편이 좋았습니다. <뷰파인더>도 좋았구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죠. 생각해보니 번역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음...

風流男兒 2012-08-1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누나 너무 반가운 소식인데요. 휴일의 비는 무사히 넘겨주셨죠? 이제 여기로 남은 비들이 쏟아지나봐요 흐흐

굿바이 2012-08-16 10:14   좋아요 0 | URL
그래? 비가 참 글로벌하구나.

그나저나 변덕이 참 심해서, 오늘 아침 비가 그친 하늘을 보니, 어찌나 일이 하기 싫던지...버스정류장에서 버스 2대를 보내고...가을은 아직인데 벌써 살살 미쳐가는구나.
 
깨어나라! 협동조합 -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정직한 노력
김기섭 지음 / 들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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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율적인 공동노동, 자립적인 공생관계, 공동의 유희행위...그러니까 꼭 깨어나라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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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이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알랭드보통, 불안)

 

어떤 영역에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모란은 몇 번 피었고 사월은 몇 번 흘렀는지 그것을 셈하는 일도 우스워 아침부터 초코칩쿠키만 축내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환상들이 사라진 자리에 즐거움은 없다. 즐겁기 위해 뭘 더 버려야 하는지 버릴 것이 남아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즐거움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 뭔가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기어 오르다니. (스스로 올랐나? 뭐 그렇다 치고)

 

실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가을이 오면, 벌써 가을이 왔다고 떠벌리는 사람도 있더라마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

달려서 가을을 통과하고 겨울을 통과하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통과하고 뭐 그렇게 계속 통과하고 또 통과하고. 그래서 '다행이야! 이제 몽땅 싸그리 사라졌어!'를 중얼거릴 수 있기를. 더는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갈 날들을 넘겨보지도 않고 그렇게 그저 패쓰 또 패스. 그렇게 나는 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달린다고 하니 비웃는 사람이 한 트럭이다. 물론 걱정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밝히는 바 내 목표는 10km다,라고 말하니 걱정하던 몇 안되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비웃는 것,들만 남았다. 그럴 수 있다. 욕은 개인적으로 하겠다.

10km를 뛰기 위해 5개월을 준비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니 나를 비웃던 것,들이 나를 동정하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다. 저주는 개인적으로 퍼붓겠다.

 

그럼에도, 염려와 비웃음과 격려와 동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해도, 나는 달릴 예정이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너무 평범한 퍼포먼스라 해도. 혹시 모르지.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맛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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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8-1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뛸 때도 가오를 잊지 말아요!! (개인적으로 맞을게요 ㅠㅠ)

굿바이 2012-08-13 10:24   좋아요 0 | URL
알았어!! ㅠㅠ

비로그인 2012-08-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내가 너무 버거워 여름이 가는데도 더위 먹은 개 마냥 숨을 헐떡거리고 ..내장에 커피를 들어붓고 .. 카페인 중독으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랜다며 신경 안정제를 마시는 요즘.. 나는 여전히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그 적나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을 이리저리 업고 뛰며 여름을 보냈다.. 해서 친구야.. 패스 또 패스를 외칠 수 있는 가을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지... 그대와 같이 뛸까? 그러면 그 어느날 몽땅 사그라질 날이 올까? (노려보지 말게.. 무서워 ㅠㅠ) 난 힘들다는 거 알고 있다네..너무나..잘..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같이 뛰자!!!!
그래서 뭔가 하나라도 해결될 수 있으면 같이 뛰자!!!!!!

風流男兒 2012-08-11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보고싶어요.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돌아와라!!!!!

風流男兒 2012-08-11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쓰고 나니 저 이 말 너무 많이 했나 싶어요 푸하하핫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나도 돌아오라,는 말 너무 많이 했나 싶어 ^^

꽃도둑 2012-08-1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저도 달리고 싶어요.
준비 운동은 해야겠죠?...근데 겨울을 통과해서 나까지 통과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어요..
암튼 달리죠 뭐.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우리 달려요 달려~!!!!

네꼬 2012-08-13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저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가 어떤 상징적인 문장, 어떤 은유, 어떤 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진짜 뛴다고요? 와 대단! 멋지시다.

굿바이 2012-08-13 10: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은유라뇨~~~~
진짜 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