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이렇게 눈이 내린 다음 날은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아요. 햇빛이랑 눈이랑 함께 반짝여요. 이모 잘있죠?" 초등학교 5학년이 참 멜랑꼴리하다. 낯설고 신기하다. 조카가 말한 다른 세상을 잠시 내다 본다. 그래 어딘지 다르기도 하다. 어제와 다르기도 하고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르기도 하고. 여튼 조카의 문자때문에 나는 잠시 쉰다. 일 년에 두어 번 마실까 말까 한 인스턴트 커피도 한 잔 타서 말이지. 좋네. 적당히 달고. 대충 쓰고. 원래 이랬나. 좋네. 합정동 사거리에서 새벽 무렵 마셨던 인스턴트 커피도 좋았는데. 그때도 오늘 같았나. 아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가을 내내 참말로 정신없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산과 들에서 나고 자라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가 수확되는 계절이었다. 일손이 필요한 곳, 경기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돌았다. 몸에 익은 일이 아니니 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일이 너무 안되는 날이면 시를 노래처럼 불렀다. 좋다고들 하셨다. 다들 막걸리를 술술 넘겼다. 누구의 시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다른 시를 더 불러달라고 하기도 했다. 품팔이를 해도 뭔가 옵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요령을 얻은 셈이다. 물론 차라리 그냥 유행가를 부르라고 요청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 나름 다짐이다.

여튼 지난 가을 때론 고되고 때론 짠하고 때론 먹먹했던 품팔이도 끝났다. 그리고 '백석'에서 시작해 '진은영'으로 이어졌던 노래도 끝났다. 마지막으로 노래처럼 읊었던 시를 옮긴다.

 

멸치의 아이러니

 

진은영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

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

하나 골라내곤 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

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

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

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가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 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斜視)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이 시를 어떻게 노래처럼 불렀는지 돌이켜보면 섬뜩하지만 박수도 받았고 술도 받았다. 그랬으면 됐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어제는 눈이 내리고 오늘은 다른 세상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또 눈이 내린다. 그러니 내일이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고 당분간 나는 다른 세상을 살 것이다. 다행이다. 숭고할 것 없는 다른 세상도, 멜랑꼴리한 조카가 내 곁에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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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2-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인상적이었는데, 언니의 가을을 함께 마감한 시였군요!

귀연이는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었군요! 점점 크면서 언니를 닮는 것 같아요. 고기 많이 먹는 것만 빼고! ㅎㅎ 오늘은 눈이 참 예쁘게 내리네요. 올 겨울은 부디 좀더 관대하길!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나를 닮으면 큰일이지!!!!ㅋㅋㅋ
어찌되었건 참 사랑스러운 녀석이야.

風流男兒 2012-12-0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어루만지다 그새 가을이 가버렸네요! ㅠ 이제 시작된 농한기에는, 만나요 누나 ㅎㅎ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농한기가 시작되었으니 어서 보세~!

치니 2012-12-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팔이 하시면서 어르신들 앞에서 시를 읊어드리는 굿바이 님, 으아아아아,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라도 막걸리 펑펑 따라 드렸을 듯. 참 멋진 양반.

굿바이 2012-12-07 10:32   좋아요 0 | URL
히히. 칭찬이죠? 신나요!!!
할 줄 아는게 없어서 그냥 시라도 읊었어요. 이거라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꽃도둑 2012-12-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멋져요~~~ 전국팔도(?)를 다니면서 뭘 하신지는 대충 알겠는데,,,
갑자기 느닷없게....아니 어울리지 않게...아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아니,,몰라요 몰라요...아무튼 여튼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굿바이 2012-12-17 10:48   좋아요 0 | URL
멋지긴요. 후져요. 그것도 매우 후져요 ㅠㅠ
 
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작가의 눈을 훔쳐 작가가 본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싶으나, 그럴 수도 없고. 여튼 매혹의 동굴이나 터널이라는 것이 있으면 작가는 동굴이자 터널일 것이니, 흰 목덜미 하나도 이렇게 울림이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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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의도했던 것 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자주 도드라지는, 그래서 이승우의 사람들과 너무 닮은, 저를 봅니다. 잘 읽었고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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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그늘 2012-11-08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랜만에 올리셨네요^^?

단편 '고산지대'와 '연금술사의 춤'의 젊은이는 중년이되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까요?
어느듯 중년이 되어 부른 '지상의 노래'의 울림이 좋았었나 보군요.
삶의 의문들에 고뇌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할아버지가 되어 부르게 될 이승우씨의 노래는 어떤 소리들을 내게 될까요..

굿바이 2012-11-09 14:52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

제가 개인적으로 '고산지대'에 등장했던 주인공과 흡사한 분을 알고 있는데요, 중년이 된 그분은 뭐랄까.....그걸 막상 서글프다고 하기에는 제가 너무 넘겨짚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크게 소리내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먹먹하기도 하구요.

지상의 노래,는 죄책감을 먹이로 살아가는 저에게는 울림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스펙타클합니다^^

웽스북스 2012-11-1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앍 언니 ㅋㅋㅋㅋㅋㅋ 제가 다른 곳에 쓴 리뷰에 "게다가 은근 좀 스펙터클(?)하기까지하다."라고 썼는데 ㅋㅋㅋㅋ 언니가 이걸 봤을리가 없는데 완전 신기해요 ㅋㅋㅋㅋㅋ

굿바이 2012-11-11 16:05   좋아요 0 | URL
정말?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야~! 완전 신기하다.
그나저나 바람 너무 분다. 한강이 춤을 춘다야!!!!
 
흰 개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문외한이 책을 칭찬하는 일은 역시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 선량한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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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9-2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언니. 꼭 챙겨서 볼게요. ㅎㅎㅎ

굿바이 2012-09-27 12:47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봐요~!!!! 투자도 하셨으니 ^_________^

비로그인 2012-09-2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읽어볼게요, 굿바이님. 오랜만에 로맹 가리를!

굿바이 2012-09-27 12:46   좋아요 0 | URL
아! 좋아야할텐데... 혹시 별로 재미없으면 언제든 제게 따지세요!!^_____^

치니 2012-09-25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책꽂이에 <솔로몬 왕의 고뇌>가 있어요. 그것부텀 읽고. :)

굿바이 2012-09-27 12:47   좋아요 0 | URL
치니님~ 그럼 저는 <솔로몬 왕의 고뇌>를 읽어볼께요.
아참 잘 지내시죠? 명절 연휴 무조건 잘 보내세요 ^_____^
 
봄날은 간다 - 공제控除의 비망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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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 가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사실을 살아내진 못한다.˝(228쪽) 정신에 어느 정도 근육이 붙어야 이렇게 군더더기없는 통찰이 나온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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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9-0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굿바이 2012-09-02 11:07   좋아요 0 | URL
그니까...

꽃도둑 2012-09-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생각나요~~ 자우림이 부르던 '봄날은 간다'에 귓가에 선하구요...
가을인데...봄날은 간다와 겹치니 이렇게 스산할수가...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