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철저히 학부모 입장에서 상담에 임하는 자세?를 적어보려고 함


상담은 가정에서의 학생의 생활을 알리고 선생님이 놓치기 쉬운 부분을 알려드릴 수 있는 기회이고 내 아이에 대한 객관적 평판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 는 대외적인 이야기이고 서로에게 약간은 부담인 시간이다.

그래도 잘만 활용한다면 아이의 학교생활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일단 1학기엔 할 얘기가 많지 않다. 짜내고 짜내서 이야깃거리를 준비해간다.

선생님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아이들 개개의 특성을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라면 좀 다르지만. 

 

제일 중요한 건 시간 조절

 

학교에서 정한 10-15분은 넘기지 않는 게 좋을듯.

중언부언하고 육아의 고충을 토로하기보다는 최대한 핵심만!

 

상담을 5분 내로 마치려고 그간 가끔 간략히 써갔는데

대개 선생님들이 편하다고 감사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1학기에 아들 담임 선생님의 경우 읽자마자

"어머님, 애들이 많은데 세세히 신경 써줄 수 없는 건 아시죠?"

 

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 나이까지 대면울렁증이 있어 전화 걸기 전에도 가끔 내용을 메모하는지라

그 수준의 메모였는데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까다로운 학부모라 생각하겠다, 싶어 후회도 했지만

일정 부분은 맞아, 나 까다롭지.  

아이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관찰하고 있다.

부모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

 

아무튼 상담 전에 상담 가서 말할 내용을 정리하고 정리해 압축

 

아들의 경우,

요즘의 문제 수술해서 아직 회복되지 않음, 반에서 친한 친구들, 고치고 싶은 습관, 샘이나 학교에 바라는 점 등등

 


 

1. 상담 준비 ★★★

 

아이에 대한 파악, 나의 욕구 파악, 아이 생활 알리기

상담 계획서에 들어갈 내용(쌤 드릴 게 아닌 내가 보는 용도)

 

★건강상태, 학교에서 조심할 음식 등

아이 일과 방과 후 학원 일정 등

아이 친한 친구들

★아이의 고치고 싶은 습관 등

 


2. 실전 상담! 상담에서 내가 부족했던 점

 

느무 저자세였음.

이상하게 쌤 앞에 서면 죄지은 것도 없이 작아지는 나 흔들리는 동공 불안한 눈빛

인사하고 자신감 있게 얘기하기, 쌤과 눈을 맞추며..이게 힘들다니, 아직.

이제 샘이 아이 이야기를 해주심

칭찬들이 이어지다가 본론(아이가 고칠 부분) 시작!

 

수용할 건 수용하고 아닌 부분은 아니라고 아이를 변호해주기.

 

고학년이 되어서야 이걸 깨달았다.


*초등 아이들 사이의 분쟁의 경우 일어난 사건보다는 말발이 좋은 애들에게 밀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자기 편 많은 아이들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간다.


우리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이케 공격적인 말투가 아니라 이러저러해서 그렇다고 충분히 설명해준다.

 

엄마가 매일 학교 생활을 들으려고 하고 아이가 왜 그랬는지 그 상황을 아는 것,

이게 정말 중요한 듯.

특히 자기 상황을 잘 정리해 이야기하는 요령이 없는 애들이 자주 당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말발이 세고 따르는 또래가 많은 애들이 사실이나 현장을 왜곡한다.

엄마라도 아이 말을 잘 들어주고 변호해주어야 하는데 과거에 그러지 못해서 미안했다.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학교행사 진행시 궁금한 거나 해결되면 좋겠는 것을 건의해봐야 소용 없음.

 

우리 사회에 ‘극성맞은 학부모’ 개념만 존재하다 보니, 교육에 헌신적이고 진보적인 학부모들이 주장하는 신념과 가치는 ‘극성맞은 학부모’ 프레임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만다. 건전한 항의와 생산적인 제안으로 학교를 변화시키는 학부모들이 존재하는데도, 사람들 머릿속에 ‘극성맞게 전화를 걸어 학교와 교사를 달달 볶는 학부모’의 모습만 남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프레임의 재구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으며 대중의 담론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부단한 반복, 집중, 헌신이 필요하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 ,  105쪽

 


3. 상담 후 반성

 

아이에 대한 자랑이나 비하가 지나치지 않았는지

내 자존감 부족한 걸 넘어서서 아이까지 지나치게 낮추는 경향이 있었음.

칭찬해주시면 감사하다 하고 지적받은 부분은 쿨하게 인정하기

전혀 아니고 쌤이 잘못 보신 부분은 수정하기

내 아이의 객관적인 평판이 어떤지 점검하기

 

내가 아이 단점이라 생각하는 걸 너무 심각하게 알리지 않기

1학년 선생님의 경우 생활기록부에 내가 말한 대로 고대로 쓰셔서 경악함.

 

 

아이에게 샘이 칭찬하신 부분과 지적하는 지점을 공유.

과장되게 샘이 너 진짜 착하대, 잘한대가 아니라 샘의 표현으로

샘이 지적하신 단점이 언어가 만일 아이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내용만 전달.

 

누구누누야 너 느무 잘하고 있는데 샘이 이것만 고치면 더 훌륭한 학생이 될 거래 라고 격려

 

쓰고 나니 역시 별거 없음 ㅎ

그래두 나도 김연아라는 마음가짐으로 상담 날까지 할 말들을 계속 시뮬레이션 돌려봄

 

1시간 후에 또 2학기 상담을 가야 함.

 

*

지난주에는 딸아이 상담을 갔다.

아들과 다르게 워낙 착실한 편이라 부담없이 갔다.

 

00이는 학교에서 너무 잘하고 있는데 왜 오셨어요? 하신다.

 

이 멘트는 온라인 육아카페에서 너무 많이 보았다.

선생님들도 육아카페를 아시는구나 싶어 슬그머니 미소.

 

아무튼 상담은 가기도 그렇고 안 가기도 그렇다.

 

내년부터는 애들도 많이 컸으니 전화 상담할까 하다가도

우리 애들 가르치는 분 얼굴은 뵙고 인사드려야 하지 싶다.

 

우리 어머님들이 고운 한복 한벌 차려입고 나서듯이

나도 간만에 잘 맞지도 않는 원피스 입고 나서야겠다.

 

 

 

두줄 요약-할말을 준비해가야 아무말대잔치 안하고 나올 수 있고

알찬 상담이 되어 내 아이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말하는 것을 토대로 쌤이 이어받아 말씀해주시니 언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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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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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기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나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프랑스, 벨기에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림책 작가 열 명을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질문을 해야 가치 있는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상상력, 창의력, 작가의 유년기, 부모와의 관계 등을 통해 창작활동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서구의 그림책을 보고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할 것이라 짐작만 하는데 그림책 저자들의 유년기가 마냥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연배 있는 분은 우리나라 60대같이 전쟁을 겪기도 하고 냉정한 엄마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란 분도 있다.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건 유년기나 학창시절이 인생과 창작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을 딛고 시도해보는 데서 예술, 창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터뷰 면면을 살펴보자.

 

 

‘관찰하는 시선’ 조엘 졸리베

 

 

관찰력을 기르려면 '좋다', '예쁘다' 하는 식의 첫인상에 머물러서는 안 돼요.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어디에서 온 이미지인가', '누가 만든 것인가' 주체적으로 정보를 소화하고 판단하면서 보려고 하는 것이 관찰력과 시각적 문해력을 기르는 첫걸음이에요. 26쪽

 

관찰력은 보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탄하는 마음이 관찰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이라는 행위 안에는 사랑의 성분이 분명 들어 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째 카페나 지하철에서 관찰 크로키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못생겼다고 치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전 그 사람만이 가진 선과 형태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 특징 같기도 한데 사실 전 모든 존재는 아름답다고 믿습니다.

27쪽

 

 

관찰력을 기른다고 자연백과를 들이거나 무리하게 나들이를 다닐 필요 없이 일상에서 만나는 이미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되는 거다. 아들 어릴 때 강원도 국도변에서 하루종일 여러 차들과 화물트럭을 오가는 걸 지켜보던 때가 생각이 난다. 차바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아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상상을 만드는 질문’ 키티 크라우더

 

키티 크라우더는 선천적 난청을 통해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너머의 감정을 자주 상상했다. 저 가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키티 크라우더는 요즘 학생들이 몸을 쓰는 수업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글을 쓸 때 기억을 관장하는 뇌가 자극을 받는 편인데 손글씨도 잘 쓰지 않는 실정이다.

 

키티 크라우더가 좋은엄마 상을 제시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30년 후에 두 아이가 저를 좋은 엄마였다고 회상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엄마 이전에 자신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아무리 음식을 잘하고 뒷바라지를 잘 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엄마의 열정과 영혼이 안 느껴진다면 아이는 껍데기 엄마만 만나는 겁니다. 뭔가에 열정을 지닌 살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표를 모으거나 봉사활동을 다니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엄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요.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은 나 자신의 행복을 디자인하는 과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61쪽

 

 

 

‘공감의 쓸모’ 올리비에 탈레크

 

 

부모님이 가족과 친구, 이웃을 섬세하게 돌보는 타입이어서 어느 정도 보고 배운 것도 있겠지만 관찰로도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어릴 때 동네 친구들 관찰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81쪽

 

 

탈레크는 자의식 강한 예술가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혼자 작업실에 있다 보면 과장된 자의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밖에 나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상상해보는 게 공감 능력의 본질이라고 한다.

 

‘치유하는 상상’ 클로드 퐁티

 

 

클로드 퐁티는 부모님의 불화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년기를 어렵고, 슬펐고, 혼자라는 세 단어로 정리할 정도였다. 작가는 딸 아델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림책을 만들어 지금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아델을 키울 때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것과 아이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시도해보고, 감탄하고, 수정하고, 배우고 다시 해보면서 변화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거짓말이에요. 그 말 좀 믿지 마세요.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산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언제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수정하고 진화할 수 있습니다.” 103쪽

 

 

아이는 조부모, 부모의 양육방식과 세계관에 영향을 받지만 인간은 그것에 절대적으로 지배될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작은 용기’ 세르주 블로크

 

알자스 시골뜨기, 행복한, 뛰어놀다를 유년의 키워드로 택한 작가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최고의 자산으로 이것을 꼽는다.

 

 

매일 정육점으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며 규칙적으로 일터로 나가는 것의 의미와 무게감을 배운 것요.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기복 없이, 대단한 기대감이나 불안감 없이, 어제 노력했던 일을 오늘 또 해보는 태도. 그건 예술가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거든요. 사실 창작 활동에서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마음에 드는 선 하나가 나올 때가지 똑같은 짓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걸 지겨워하거나 진도가 안 나간다고 좌절하면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40-141쪽

 

 

똑똑하고 가진 게 많은 부모가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자기 일을 불평 없이 해나가는 평범한 부모가 자식의 삶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은 작가의 불안정한 작업을 묵묵히 바라봐주었다. 세상의 속도대로 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살아본 사람은 좀더 용기를 낼 수 있다. 작가는 창의성이 뭔가를 해보는 용기, 잘 안된다 하더라도 시도해보는 용기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학창시절에 쉬는 시간에 놀 때 큰 결심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듯이 그냥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결점에서 태어난 창의성’ 벵자맹 쇼

 

벵자맹 쇼는 참고 자료를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한 것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의 성장기는 완벽주의자로 살던 시기와 결점을 받아들이고 결점과 함께 일하는 지금으로 나뉜다고 한다. 부모님은 시골 농사꾼 장남이 불확실한 예술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지만 항상 아들을 믿고 있다는 걸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이 보호가 필요할 때 나서고 대개는 믿고 기다리려고 한다.

 

그의 스케치 노트는 학창시절 깜지같이 빽빽하게 선과 형태들이 채워져 있다. 마음에 드는 선을 찾기까지 시도하고 또 시도할 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타나는 선은 없으니.

 

‘깊은 심심함’ 에르베 튈레

 

스마트폰, 상업적 놀이공간으로 가득한 요즘을 사는 아이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는데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했다. 저자가 창의력을 기르려면 더 무얼 해야 하냐고 묻는데 튈레는 오히려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한다. 창작하는 데에는 “결핍과 심심함, 불확실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다르게 보기, 오래 보기’ 안 에르보

 

아이들 어릴 때 많이 읽었던 안 에르보라 너무 반가웠다. 특히 이 인터뷰가 좋았다. 책에 커피포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전 자기만의 몸가짐을 가진 물건을 좋아합니다. 의자나 커피포트가 그래요. 220쪽

 

딱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여기에 텀블러나 책도 더해서.

 

“저는 책에 질문을 많이 넣습니다. 하지만 답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 채 나아갑니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건 인생의 그 모호함입니다.”

 

안 에르보는 창의력이란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과정의 불편과 막막함을 견디는 데서 시작한다고 본다.

육아철학마저 신선했다. 아이를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놓으려 한다는 것. 아이 중심으로 가족의 삶이 짜이면 아이가 막강한 무게를 느끼게 되고 겁이 많아져 결국 뭐든 제대로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걸 한국의 부모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삶의 주변에 놓는다는 건 아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을 분리하고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의 나.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말이다.

 

‘시간 사용법’ 이치카와 사토미

 

이치카와 사토미는 일본에서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고 프랑스로 건너와 보모를 하며 그림책을 배우고 작품을 내놓고 있다.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스케치하며 여행하고 있다. 시간을 들여서 할 일이 세상에 많은데 그중 어느것에 시간을 더 많이 들일지 자신이 정하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라는 충고가 와닿는다. 전부터 난 뭐든 빨리 많이만 하려고 했다. 요즘 책읽기도 그런 편이다. 몇 권 안 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자주 공들여 읽어야겠다.

 

‘자기 믿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유년기를 즐거움, 여행자, 관찰자로 설명한 작가는 완벽주의를 가진 아버지로부터 끈기와 투지를 배웠다.

 

“행복에 대해 말하는 창작물을 짓고 싶다면 우선 자신이 행복했던 느낌을 떠올려 그걸 전달해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은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창의성이 최초로 태어나는 순간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할 때입니다. 그 느낌과 생각, 충동, 자기 안의 목소리를 믿고 그리로 자신을 던지는 것. 저에겐 그게 창의성입니다. 자기 믿음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해요.

303쪽

 

인터뷰 끝까지 하나하나 버릴 장이 없는 책이었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라고 하면 뭔가 어떤 특별한 환경에서 길러진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의 획일적인 교육환경이며 문화가 어떻고 비판하며 한국은 이래서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다보니 서구 작가들이라고 해서 크게 자유롭고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것만은 아니다. 몇몇 작가는 부모가 믿고 지원해주었고 몇몇은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예술과 내면의 힘으로 극복했다.

 

유년기나 부모가 어떻든 간에 작가들의 공통적 특질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버틸 줄 알고 매일매일 꾸준히 작업을 하며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아이를 키운다고는 하지만 부모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믿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나를 믿고 내 삶에 여유를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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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인종, 성, 종교, 성 정체성, 정치적 견해, 사회적 위치, 외모 등에 대해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발언이다. 증오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증오언설(憎惡言說)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성향이 폭력, 테러 등의 범죄행위로 드러나는 것은 헤이트 크라임(hate crime, 증오범죄)이라고 하며 미국, 독일, 영국 등은 개별적으로 이를 규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이트 스피치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어떤 불쾌한 사건을 누군가가 목격하고 그게 SNS에 여러 차례 돌고 

공중도덕 개념 없는 -충 논란으로 번진다. 틀딱충, 급식충, 맘충 등

 

만약 부부가 같이 있고 잘못(대개 사소한 실수)을 같이 했다 해도 파파충이라 하지 않는다.

그냥 맘충이 또! 

 

물론 똥기저귀 식당에 버리고 식당 컵에 오줌 버리고 극장에서 애들 울려 가며 성인영화 함께 보는 무개념 부모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애엄마들이 다 저러는 게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원래 공중도덕에 무감한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계속 공중도덕 어기고 다니는 것일 뿐이다. 유독 저런 맘충류 게시글이 잦은 건 인터넷을 이용하는 다수가 아무래도 청년층이 더 많고 육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개 간접 체험이고 아주 먼일이거나 남의 일이다. 특히 2017년 현재 결혼, 출산, 육아가 전처럼 사회구성원 다수가 접하는 현실도 아니다.


20-30대 미혼 많은 커뮤니티 가면 식당기저귀나 컵 오줌 이런 거 말고도 아이들로 인한 사소한 불편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아기가 칭얼거렸다고 차 살 형편 안 되면 아기 낳지 말라거나 하는 글도 봤다. 반면에 자신과 관련된 애들, 조카, 랜선베이비 등은 예쁘고 귀엽다고 추앙받는다. 귀엽거나 예쁘지 않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은 소음덩어리, 민폐덩어리로 여기는 듯하다.

 

사회 구성원 다수의 공중도덕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아 본인이 보기 불편하면 다 -충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전의 양육환경은 친족이나 씨족끼리라 아이들 일이라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대개 부부 중심이거나 바쁜 아빠를 대신해 엄마 전담 육아가 대세다. 그러다 보니 모든 양육의 책임이 엄마에게로 넘어왔다.

 

우리사회가 전근대 농경씨족사회에서 급격하게 변화해서 공중도덕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세대별로 혹은 각자 전제가 너무나 다르다. 진짜 젊은층, 장년층, 노년층 모두 공중도덕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다르다.

 

특히 노인분들은 본인 어릴 때 교육받은, 나이든 이를 우대하는 법도를 지키고 살았는데 자신들이 그만큼 대접을 못 받으니 불편해하신다. 그분들 그냥 문화 지체 정도이지 틀딱이니 할줌마니 하고 혐오 발언을 들을 정도는 아니다.

 

온라인에 주로 맘충이나 틀딱충 관련 사이다 글 올리는 패턴을 보면 내가 봤고 그 수가 상당히 많다, 그건 명백한 잘못이다, 그들은 원래 그렇다가 논리다. 60대 이상은 인터넷 사용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렇지 노인정에서 요즘 젊은것들 이야기가 오고갈 것이다.

 

서로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 단절된 것이 혐오 발언의 탄생 배경이다.   

*

40대 기혼여성인 나의 경우
남의 전기 써가며 오래 남의 업장에서 공부하는 청년층

카페에서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청년 아가씨들

목줄 안 하고 다니며 개 산책시키고 똥 안 치우고 가는 핫팬츠 입은 아가씨들

아이들이 노는 계곡 초입에서 진한 애정행각중인 커플

새치기를 자주 하거나 오지랖이 지나치신 50-60대 분들이 불편하다.

 

그렇다.

진상은 남녀노소 성별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출몰한다. 그냥 잠시 불쾌할 뿐. 만약 피해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얘기하지 굳이 SNS에 쓰지 않는다, 이제는.

 

공중도덕 논란, SNS 조리돌림을 보면 답답하다. 선진국은 어떻고 하는 것도 우습다. 모든 나라를 다 가본 것도 아니고 교민들 말 들으면 외국에도 진상은 있다.

 

해결책-사회적 통념에 비추어보거나 내가 불편하면 가서 말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너무 지저분하면 그냥 내가 치운다. 자주는 아니고 내가 기운 있고 기분 좋을 때.

단, 아유 지겨워. 어지르는 사람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이런 투덜 없이.

 

그냥 공중도적일 뿐인데 가정의례준칙처럼 나라에서 정해주어야 하나?

풋, 박정희 시대도 아닌데 그것도 우습지 않은가?

싱가포르같이 세세히 태형, 벌금 등으로 규제해야 하나? 거기는 그냥 잘사는 북한일뿐.

 

 

*

서울 등 대도시라면 잘못된 도시 계획이나 교통사정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

개인의 인성이나 의지력에만 의존해 거리가 더럽니 질서가 없다느니 한다. 요 며칠 시끄러웠던 240번 버스 사건도 승하차 시간이 촉박하고 버스 안을 잘 살필 수 없는 문제 등으로 인해 가끔 생기는 사고다.  버스 내부 영상이 공개되지 않아 진짜 엄마가 폰 보느라 아이 놓친 건지 알 길은 없다. 애도 못 보는 맘충이 또! 라는 글만 빠르게 생산되고 있다.  글쓴 목격자가 내린 아이가 네 살이고 기사님이 차를 일부러 안 세워주었다는듯한 뉘앙스로 글을 써서 일이 커졌다. 과도한 관심으로 기사님이나 애엄마나 아이나 상처가 클 듯하다.

 

엄마들이 주로 무개념 공중도덕 파괴자로 온라인에서 타겟이 되는데 공공시설이나 식당 등도 수유실이나 기저귀 가는 공간, 기저귀 버리는 공간 등이 제대로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있다 해도 관리가 미비해 이용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많다. 애들 어렸을 때 가끔 서울 가면 지하철 수유실이 너무 더러워 사정하고 역무원실에서 수유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

그러나 같이 애 키우는 입장이라도 이해하기 힘든 건 기저귀 아무데나 버리고 가는 것. 

똥기저귀 버리는 건 아마 일부 부모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집에 가져가서 버리길 원하는 것 같고 이게 현실적으로 맞다. 유아엄마들도 다 아는데 대개 아이가 울고 하면 혼이 나가 빨리 자리를 피해주는 게 덜 피해주는 거다 하고 빨리 나서다 미처 발견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습관적으로 아무데나 투기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잘못 맞다.

 

글 쓰면서 케이스 공격 당할듯해 겁은 난다. 몇 년 전에 주부들이 자주 이용하는 대형 커뮤니티에 글 올렸다가 내가 많이 봤거든, 한둘이 아니거든, 나는 그렇게 안 하거든 하고 공격받아 좀 무섭다.

 

그래도 사소한 공중도덕 위반이 자기얼굴 애들얼굴 사진 찍혀서 조리돌림 당할 정도인가? 젊은 세대들마저 참으로 전근대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유아 엄마들 내 아이 똥냄새는 나만 못 맡는다는 거, 아이 키우다 보면 잠시 착각한다.

그냥 내 아이는 나한테만 귀엽고 내 개는 나만 안 문다는 것을 명심하자.

 

*

노키즈존 식당이 대두한 것도 일부 무개념 부모들이 많은데 원인을 둔다. 그렇지만 사실 아무래도 아이들 손님 끌려다 보면 놀이방에 수유실 다 해두어야 하고 관리도 힘들고 해서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차라리 노키즈가 낫다는 업주의 이해가 맞물려 많이 생겨나는 거다. 대개 아이랑 오면 설거지거리만 더 늘어나고 어지르고 간다.

 

특히 분위기 있는 고급 식당은 거의 노키즈. 경제력 있는 1인가구나 딩크족도 많이 늘어 애들 손님 안 받아도 충분히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모들은 내돈 주고 애들과 편한 곳은 키즈카페뿐이라 여기는데 여기서도 막강 진상들을 만나게 된다. 자기 애들만 챙기는 부모, 함부로 어지르고 기구 망가뜨리는 아이들, 관리 안하는 부모들이 많다보니 갈곳이 없다. 자연으로 나가 캠핑을 해봐도 마찬가지다. 서로 너무 지쳐 있고 참아줄 여력이 없다. 노는 것마저 전쟁이 되니 요즘엔 그냥 당일치기 여행만 한다.

 

그나마 부모가 돈이 있고 놀아줄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미세먼지도 많은 이 시대에 어디서 놀까? 공공형 실내놀이터나 체육관 등도 부족하다. 

 

많이 지어서 아이들, 부모들, 1인 가구들 운동하는 데 쓰면 좋으련만. 현재 한국에서 대개의 공간은 다 사적으로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 키즈카페, 카페, 피트니스 센터, 독서실, 만화카페 등등

 

공공형 녹지도 부족하고 자연을 즐기려면 캠핑장, 글램핑장을 사야 한다. 

 

*
우리 아이들은 이제 다 컸고? (초등인데 오히려 갈 데가 없다. 키즈카페는 140센티 이상은 또 안 받는다. 유아 엄마들이 큰애들 초딩들 싫어하고 큰애들 엄마는 키즈카페 와서 뭘 잘 안 사먹으니 키 제한을 두어 출입을 막는듯하다) 

 

유아기에 면 단위 시골에서 커서 부족해도 이해받고 과분한 대접도 받았는데

대도시에서는 잠깐 사이에 맘충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나마 나는 아이들이 초등이라 식당이나 카페는 다니는데

영유아 엄마들은 커피도 마시지 말고 식당도 오지 말라는 건지.

 

미봉책 1
저런 혐오글 안 보려면 부모들이 기저귀 등 애들 배변 철저히 관리하고(이게 겪어보면 쉽지 않다. 엄마들이 왜 백화점 문화센터나 키즈카페만 가게 되는지 알 수 있다)보단 지나친 혐오글 생산에 동조하지 않기. 엄마들 육아카페마저 맘충 글이 많아 불편하다. 

 

식당은 수유실이나 식탁의자 있는 데로 가서 1인 1메뉴 시켜야 하고

발품 손품 팔아 가족 친화적인 식당에 가야 한다, 는 개뿔

그런 식당 없다.

영유아기에는 해서 거의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게 된다.


사회전반적 인식이

아이들이라 많이 미흡하고 돌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의 특성을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아무리 순한 애라고 해도 낯선 상황에서 엄마아빠 기대와, 평소의 행동과는 다른 경우도 있어서 엄마아빠가 실수하고 민폐도 끼치는 것이다. 부모가 되면서 아, 이렇게 폐끼치고 커가는구나 도움받고 사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대개 현실에서는 애가 울어도 어질러도 이해해주는 분이 더 많았다.

 

그래도 성격상 심하게 눈치 보는 편이라 애들 어릴 때는 개인적인 유흥은 거의 포기한 듯하다.

영화는 항상 집에서 공연은 애들 봐줄 사람 있으면 보고 하다 보니 몇년간 애들 잘 때 티브이만 봤다.  


미봉책 2

애들이 공중도덕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생길 때에 대중에 노출시키면 좋겠다.

너무나 귀한 내 아이 민폐덩어리 취급받는다면 슬프니까.

 

우리 애들은 5세가 되니 애들용 애니 안 떠들고 왔다갔다 안 하고 잘 봤고 식당에서는 3-4살에도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딱 몇 개월이 정해진 게 아니라 애들 기질, 발육에 따라 다르니 판단이 어렵다. 

엄마가 스트레스 받지 않는 상황에서 애들 데리고 다니는 게 최우선인듯하다.

솔직히 대중교통에서 눈총받지 않는 건 어렵다. 누구나 자가용 이용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지.

엄마가 애들 어느 정도 크기 전까지 갇혀 살게 되는 이유다.

 

미봉책 3

우리 어린시절을 잊지 말고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자.

 

그냥 내가 애들 초등 되니 영유아 엄마들 이해 못하는 거 보고 바로 알겠다.

다 키우고 나니 힘들었던 거 미흡했던 거 다 잊는 거다.

 

난 저렇게 안 키웠어, 꼰대질이나 안 하려 노력중.

오지랖도 안 부리려 노력 중.

 

특히 양말 안 신긴 거 말하지 않기

*

조심한다고 해도 애들 데리고 다니다보면 사과할 일 투성이다.

어릴 때는 그냥 내가 사과

커가면서 사과하는 법 잘 가르쳐야 하고 할일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너무 위축되지 말고 애들이나 나한테 부당한 대우가 있다면 바로 항의도 하는 게 좋을듯하다. 몇번 애 데리고 있어 참은 적 있는데 병 되고 아이들도 비굴한 모습을 학습하게 된다.

 

*
아 마무리를 어떻게 하지.

청년층이나 다른 계층들이 맘충에만 너무 분노하지 말고 보다 생산적인 데에 분노하고 연대하면 좋겠다.



 

*위에 언급한 책들은 다 읽지 못했지만(몇 권은 안 읽을 예정) 모든 종류의 혐오 발언(여성 혐오뿐 아니라 인종, 세대, 노인 혐오 등)에 반대합니다.

 

아들이 우리가 생각없이 초딩초딩 하고 부르는 것도 싫어한다.

낮추고 놀리는 말 같다나.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표현을 고쳤다. 모두 초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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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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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오는 월요일 아침

 

수많은 리메이크가 있지만 조이 버전

 

다음생이 있다면 이렇게 과즙 뿜뿜 청량하게도 살아보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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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도 아닌데 도토리가 필요하던 시기가 있었지.

 

싸이월드 비번을 잊어버려 아쉽네.

 

플레이리스트 듣고 방명록 댓글 보고 이불킥 좀 해야 하는데. 

 

오전에는 딸아이 친구랑 키즈카페

 

오후에는 아들친구랑 무등산

 

내 친구들은?

 

동네엄마랑 날씨 얘기 같은 얘기만 하루종일 나누었어도

 

어른이랑 얘기한다는 자체가 좋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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