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다리 포목점 - 오기가미 나오코 소설집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유자차와 무릎 담요가 생각나는 겨울로 가는 이 계절에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들었다. 딱 이 시기에 만나 정말 다행인 책이다. 게다가 최근에 '고양이'를 정기적으로 볼 일이 생겼다.

 

이제보니 <안경>, <토일렛>을 만든 오기나미 나오코의 소설집이네. 나온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알아 약간 억울하다.

 

모리오

 

모리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에 애착을 느낀다. 그는 어릴 때 보았던 궁극의 꽃무늬를 찾아 '사부로 씨'가 있는 히다리 포목점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상적인 무늬를 찾아 무작정 스커트를 만들게 된다.

 

나는 사온 꽃무늬 옷감을 좁은 아파트 가득 펼치고 자로 치수를 쟀다. 그것만으로 방 전체가 꽃무늬에 푹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재단을 끝내고 앞뒤를 맞춰 컬러풀한 시침바늘을 꽂았다. 나는 재봉틀 앞에 앉아 조금 긴장한 채 바늘을 옷감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바늘이 리드미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실이 옷감을 통과했다. 다다다다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스커트를 만들었다. 똑바로 재봉질이 되지 않으면 그때마다 실을 뜯고 다시 했다.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나는 오로지 스커트를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어머니의 발판 재봉틀을 마주하면서 그때까지 맛보지 못했던 평안함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36쪽

 

모리오는 완성된 스커트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입을 스커트를 다시 만든다. 만들었던 첫 작품을 고쳐 재봉틀 소리에 안정을 찾는 동네소녀 카트린느에게 준다. 둘이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거닐기도 한다.

 

나와 소녀는 해가 저문 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 갑자기 소녀가 내 손을 잡았다. (중략)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흙과 풀의 뜨뜻한 냄새, 조용히 우는 벌레 소리, 통통한 붉은 달, 땀이 살짝 밴 소녀의 손, 스커트 속으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바람.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73쪽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포목점의 '사부로 씨'가 실은 검은 고양이라는 것과 섬세한 남성 모리오가 어머니를 잃고 재봉틀을 돌려 치마를 만들어 입으며 치유받는 과정이 울림을 준다.    

 

에우와 사장

 

<에우와 사장>에서도 <모리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인격체로 동등하게 대한다. 우연한 계기로 이비인후과 의사 요코와 그녀의 고양이 "나카무라 사장"과 살게 된 에우는 고양이가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을 맡게 된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반드시 최선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잠자코 있어도 서로를 아는 사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그만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듣는 것이 당신의 일입니다."

100쪽

 

잠을 열 시간은 자야 기운이 생기고 특별히 잘 하는 게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던 에우는 낯을 가리는 사장과도 단번에 통했고 히다리 포목점 아주머니가 소개한 가정의 고양이들과도 소통해서 고양이들의 어려움을 잘 풀어준다. 

 

"고양이에게는 반드시 경어를 사용하세요. 고양이에게 아기말을 써선 안 됩니다. 이따금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콧소리를 내며 아기를 대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착각입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나이를 빨리 먹는 존재입니다. 모두 듬직한 성인입니다. 아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성인에게 아기 말을 사용합니까?" 100쪽

 

사부로 씨와 암에 걸린 나카무라 사장은 동물병원에서 조우한다. 사부로씨와 포목점 아주머니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품위 있다. 사장도 역시 품격 있게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느닷없이 사장이 말했다.

"낮잠은 푸르구나." (중략)

 

"어째서 암 같은 거에 걸린 거야?"

사장은 귀를 긁다 말고 에우의 눈을 물그러미 봤다.

"어쩔 수 없어. 유전인걸."

"유전?"

"전 주인도 암으로 죽었어."

"그런 걸 유전이라고는 하지 않잖아?"

"유전이야. 누가 뭐라든 유전이야. 너는 몰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면, 예컨대 그 사람과 피로 이어져 있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과 종족이 다르더라도 다양한 것이 옮겨져. 전염되는 거지."

"그래서 네 암도 전염되었다."

"맞아"

사장은 이불 위에서 꾹꾹이를 시작했다. 148-149쪽

 

아...꾹꾹이라니.

정말.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사장은 죽음을 맞는다.

죽는다는 건 결국에는 꾹꾹이를 멈춘다는 뜻이다.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이후 사장의 망해는 수많은 터키도라지꽃에 둘러싸인다. 요코와 에우는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요코는 에우의 귀를 파주기로 한다. 역시 예상한 결말이고 이게 전부이다.

 

*

 

눈에 띄지 않는 소년, 소녀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며

하루하루 그들만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엄청난 상실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이런 담담함과 섬세함, 배려가 보이는 소설류가 일본 가정식 장르라고나 할까.

좋기는 한데 굉장히 뭔가 이질적인 정서이다. 일본 가정식을 먹으러 가서 한 상 잘 받고는 아 뭔나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런 느낌.

 

그래서 별 하나를 빼고 나니 뭔가 또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소품.

SNS 사진발도 잘 받을 책이다.

 

사족-책을 읽고 나서 고양이 장난감 이름이 캣 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색해서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지 말고 딸이랑 만들어서 시댁 꼼냥이들과 놀아주어야겠다. 책을 읽고 나니 고양이들 이름을 너무 유치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연이',  기연 씨

이렇게 다시 이름 지어 부를까?

 

전남 방언 '기연히(기어코)' 다시 한다 이런 느낌으로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램프를 사면 책을 주는 알라딘.

 

알라딘 컵라이트와 스타벅스의 콜라보

 

스타벅스 그란데 사이즈 컵이랑은 꼭 들어맞고

 

아래 컵들에는 그냥 걸쳐만 두는 수준.

 

아들이 애정하는 마음의 소리.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릴 때부터 내 주변에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었다.

 

최초의 기억은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전학 가서 사귄 친구랑 이동도서관 책 기다리던 시간들이다. 정말 성실한 말단공무원의 전형이면서 어딘가 불쌍한 하이킥 신애아빠 역 했던 배우분 닮은 이동도서관 아저씨 얼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 친구랑은 붙어다니며 책도 참 많이 읽고 친구집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오빠 애칭? 이상한 별명도 알 정도였는데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멀어졌다. 아마 그 시기에 성당 친구들과 놀면서 차차 함께할 시간이 적어진 것이겠지.

 

중고등 학교 때는 허세로 세계명작을 읽고 입시 대비로 한국단편이나 고전을 읽느라(진짜로 단편은 원문을 다 읽음) 책에 대해 함께 나눌 친구가 없었다.

 

대학은 관련 전공을 택했으나 역시 독서 취향이 맞는 친구들이 없었다. 친한 과 동기도 몇 없었는데 다들 일찍 진로를 정해 그쪽 공부를 파는 눈치라 뜬구름잡는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잠시 오열)

동아리 세미나에서는 정말 내 취향 아닌 책들만 읽었다. 이때 읽지 않은 책을 그럴듯하게 읽은 걸로 둔갑하는 기술을 배웠다. 어느 날 정말로 읽어간 날이었나. 선배들 이야기를 듣다가 아 이분들도 나랑 별다를 것 없네, 하고 속으로 웃었다.

 

일하면서 책을 보고 또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 작가분 동호회를 하던 시기가 북클럽의 황금기였다. 초창기에는 그분 책 위주로 읽었지만 나중에는 이런저런 자기가 읽은 책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 시기가 왔다. 그때 겹치는 책 위주로 서로 재미있었던 부분 이야기하며 쿵짝 맞아 돌아다니던 시기가 '청춘'이었나보다. 각종 예술영화관을 돌아다니고 작가들 강의도 따라다니고 고궁이나 근교를 같이 산책하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던 시기. 어느 호프집에서 쌍둥이같이 보일 정도로 같은 옷을 입고 나와 가아프 이야기하던 밤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들과도 더는 연이 닿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야 SNS도 휴대전화도 있지만 어쩐지 이민간 친구같이 서로의 시차를 느껴 잘 연락하지 않게 된다.

 

연애하면서 남편이 추천하는 책은 이상하게 잘 안 읽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각자 책은 꽤 보는 편인데 읽는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 만화, 역사서 정도나 조금 겹치고.

 

잠시 학교에서 일하던 때는 (이제는 희귀종인) 독서하는 아이들이 추천한 책을 읽기도 했다. 독서 동아리 담당이라 같이 메이즈러너 보러 간 게 기억에 남는다. 외고간 아이가 추천한 더 기버도 잘 읽었다. 아이는 원어로 읽고 난 번역서로 끙.

 

이때는 사실 육아와 일에 치여 거의 책을 읽지 못했던 시기이지만 어릴 때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작가분의 글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 뿌듯했다. 애들은 노잼이라 하는 소설이었지만 내가 못 가르쳐서 그렇게 느낀 거겠지.

  

아이 낳고 기르면서는 그림책, 육아서에 버닝하다 2년 전부터 정신차리고 보던 책이나 새로운 책을 보려고 한다. 여전히 문학, 에세이 비중이 크지만 실용, 심리 분야가 늘었다. 역사나 과학 분야를 더 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그래서 올 초에는 학교독서모임에 가입했는데 그건 반애들 책읽어주는 모임이었다. (잠시 크게 웃음) 그리고 우리학교는 상당히 활동적이라 책 읽기보다 만들고 활동하는 시간 비중이 더 크다. 상당히 바람직하다. 이런 모임에서 신기하게 본인 책은 많이 안 보시는 분이 많다,기보다는 현실의 애들 이야기, 학교 뒷담화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사람도서관같아 이야기 잘 듣다가 온다. 심심할 때 대여하고픈 분도 있다.

 

작년 말부터인가 지역육아카페에 잡다한 글을 올리다 그런 글도 좋아해주시는 분이 있어 독서 모임을 하게 되었다. 아직 시작 단계인데 모임을 꾸리려고 하니 뭔가 지표로 삼을 만한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앞의 책들이 생각이 났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꽤 오래 전에 읽었나보다. 이제는 따스한 이미지만이 남았네. 같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 모임을 잘 하려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원하는지 잘 알아야 하는데 아직은 어떨지 감이 안 온다. 그런데 모임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모임 자체가 알아서 굴러가기도 하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롤모델이라면 전의 모임같이 친목과 독서의 경계 수준 정도이다. 육아에 지친 심신에 작은 활력이 된다면...... 잠시라도 내 감정과 사고에 충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간 내가 혼자 놀던 데 같이 가고 혼자 보던 책 같이 읽고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 많이 듣기.

다짐 또 다짐, 우선 듣기.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다가도 책이 나오면 어떤 책인지 궁금해하고 가방에 늘 한두 권은 책이 있고 문구류를 격하게 아낀다. (희귀동물 시리즈 고운 노트들을 애들이 다 끼적여두어 마음 아프다. 숨겨두었다가 중학교 가면 줄 것을. 요새는 또 거의 필기도 안 하고 안 시켜서 애들은 필기의 재미를 모른다, 기보다 내가 구식이겠지. ㅎ)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은 정리가 쉽지 않다. 늘 여기저기 책이 널려 있고 함부로 꽂아두어도 안 된다. 읽다가 두는 거면 서표 붙이거나 하래도 말을 안 듣고 자기 읽던 데 덮어두었다고 골을 낸다.

 

책길이가 일정하게 맞지 않아 정리가 쉽지 않다. 같은 책이 두 권인 경우가 있다. 읽다가 서로 본다고 싸워서 보다 못해 각자 사주기도 한다. 다행히 요새는 번갈아 볼 정도로 컸다. 그래도 초등이라 뭐뭐는 자기 책이라 여전히 우기고 싸운다.

  

요새는 애들보다 먼저 잠들어 3-4시에 일어나면 집안 꼴이 가관이다. 이 방 저 방에 책과 머그가 잔뜩 널려 있다. 올빼미족에서 애들 덕분에 얼리버드가 되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무엇을 잡을까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비오는 일요일

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극장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드디어 보았다.(스포일러 주의)

 

고레에다 감독은 자식이 뒤바뀌면 부모들이 아이를 기른 세월과 상관 없이 생물학적 친자를 택해 아이를 서로 교환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생물학적 아이와 기른 정이 가득한 아이 중 누가 우선일까?

 

진정한 부모란, 좋은 부모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답을 내리기보다는 계속 질문을 만들어가는 영화였다.

 

료타는 자신을 닮은 반듯한 아들과 상냥한 아내를 둔 성공한 대기업 직원이다. 아이를 사립초에 보낼 수 있고 원하는 교육은 얼마든 시킬 수 있는 여유로운 가장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시기에 료타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출생 직후 아이가 바뀌었고 바뀌어 자라고 있는 친자의 상황은 자신의 집안보다 열악하다. 친아이를 기르는 아버지는 가난하고 애들도 줄줄이 딸려 있다.

 

친자를 처음 만나자마자 료타는 아이가 콜라를 서슴없이 마시며 빨대를 잘근잘근 씹어둔 걸 보고 경악한다. 건강을 위해 하루 먹는 달걀 양도 정해두었을 정도이고 집안은 아이 있는 집답지 않게 호텔식으로 잘 정돈되어 있으니 부부가 보기에 얼마나 개탄할 상황인가.

 

료타는 아이가 바뀌었다는 걸 알고 부인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역시 그랬었군, 이라든가 아내의 본가가 있는 시골병원에서  아이를 낳아 이렇게 된 거라며 아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교환을 염두에 두고 하루 생활해 보니 친자인 아이는 게임을 자주 하고 (중상층의) 생활습관이 잡혀 있지 않다.

 

상사와 집안일을 상의하니 상사는 료타에게 두 아이를 다 키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이기주의의 극한이다.

상사의 조언에 힘입어 두 아이를 다 기르려 변호사까지 알아본다.

 

키즈카페에서 료타는 류다이네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 얘기를 아주 가볍게 꺼낸다. 이런 분노를 부르는 상황에서도 상대편 부모 류다이는 참다 못해 가볍게 머리를 살짝 치는 정도이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이런 상황에 가난한 부모는 눈물 지으며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자집으로 아이를 보내거나 따귀를 올려붙이겠지만.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에서의 선택을 핵심으로 최루적 상황을 남발하는 허다한 유사 소재의 TV드라마나 영화들과 달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결국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조용히 그리고 깊게 묻습니다.(이동진, 2013)

 

류다이는 시종일관 여유 있다. 시골에서 전기상회를 운영하고 있고 부인은 파트로 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셋이나 되지만 아등바등 살지 않는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지 말자, 주의.

 

그렇지만 류다이는 키즈카페에서 아이들과 온몸을 부딪혀 놀아주고 아이들 장난감을 고칠 수 있고 목욕도 같이하는 그런 아버지이다.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병원측과 부모들이 아이들 문제를 논의하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총싸움하며 겨누자 빵 소리에 다들 죽는 시늉을 하며 쓰러지는 장면이다. 현실에서는 이렇지 않지만 언제나 이럴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들이 모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류다이네와 료타네는 처음에는 교환을 염두에 두고 만남을 이어가다 나중에 아이들 짐을 다 실어보낸다. 료타는 아이를 보내며 케이타에게 적절한 설명도 없이 강해지기 위한 미션이라고만 한다.

 

교환을 통해 두 아이 다 힘겨워한다. 적극적인 류세이는 자기 집을 몰래 찾아가고 케이타는 홀로 잠못이루고 힘겨워한다.

 

가정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료타는 류세이를 적응시키려고 가족과 시간을 내기 시작하고 집안에 고가의 캠핑장비를 들이고 단란한 가정 코스프레를 한다. 류세이 사진을 찍고 확인하다 료타는 전에 케이타가 자신의 모습을 찍어둔 걸 보고 회한의 눈물을 쏟는다.

아. 이 남자가 이렇게 울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사건의 전말을 알고도 대응책 마련에만 힘쏟던 그였는데.

 

나도 아이들이 내 사진을 찍어둔 걸 보고 울컥한 적이 있어 그 마음을 알 듯하다. 아이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를 깊이 사랑해주고 있다. 부모만 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섬세하고 유약한 케이타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데 상처받아 교환 이후 처음 만났을 때 도망가버린다. 아이를 따라가 머리를 쓸어주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양어머니로 추정되는 료타의 어머니는 료타가 지난날을 사과하려고 하자 너랑은 그런 진지한 얘기말고 시시한 얘기 나누고 싶다고 한다.

 

가족의 시간이란 류다이네같이 정말 시시하고 지루한 나날의 시간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 같다.

 

료타는 가족의 미래를 기획하고 가정을 위해 돈을 벌고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 함께하려 한다. 반면 류다이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두 가정을 교차시키며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묻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모든 가정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내가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딸아이 친구 엄마가 우리딸을 데리고 목욕을 가주었기 때문이다.

 

홀로 외롭게 자라던 케이타는 류세이네 가족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료타 역시 평소라면 말도 섞지 않았을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연달아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았다. (스포일러 주의)

온라인에 자주 올라오는 아이를 아빠에게 맡기면 안 되는 이유의 결정판. 

 

이십대 중반에 기타노 다케시에 버닝하던 시기에 보았는데 아이 낳고 나서 보니 참 마냥 웃긴 영화는 아니다. 

 

이런 장면도 있었구나, 싶은 장면이 많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중에 영화를 다시 보니 계속 마사오가 한데서 자는 거나 밥을 못 먹고 있을 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 철없는 야쿠자가 한없이 미워졌다.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치며 웃게 해주는 것도 좋지만 좀 밥이나 제대로 먹이며 다녀라 이 양반아, 하게 된다. 애를 어두운 데 두고다녀 변태 영감이나 만나게 하고 애 앞에서 온갖 범법은 다 저지른다. 막무가내 진상인데 밉상은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사오가 친엄마를 보게 해준다.

그런데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상황이다. 이미 엄마는 다른 가정을 꾸려 잘살고 있다.

 

상심한 마사오 일행에게 폭주족, 소설가 지망생이 다가와 별별 캠핑을 벌인다. 이 소동은 다시 봐도 너무나 즐겁다. 역시 아이를 기르는 시간은 이런 잉여의 시간들이다. 할일없는 한가한 한량들이 모여 몸으로 놀아주니 마사오는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된다.

 

특히나 대머리 아저씨 다시 봐도 짠하다. 한여름에 들판에서 모기에게 뜯겨가며 외계인 상황극 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다들 자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아이보다 어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야쿠자로 살아가며 인생에서 여름방학다운 방학은 한번도 맞지 못했던 기쿠지로는 마사오를 만나서 진정한 인생의 여름방학을 보낸 것이다. 한껏 잘논 마사오는 다시 할머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힘차게 달음질쳐 갈 수 있게 된다.

 

여름방학마다 생각나는 영화인데 이상하게 아이들과 아직 본 적이 없다. 다음 여름방학에는 꼭 보여주어야겠다.

 

지난 겨울에 <P짱은 내 친구>를 너무나 잘 봐서 이 영화도 무지 좋아할 것 같다. 이제는 초등이니.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팬이라 자처하지만 작품을 사실 겨우 네 편 보았다.

 

2005년 하이퍼텍 나다에서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환상의 빛>,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순으로 보았다.

 

에세이는 전에 사서 보았고 <걸어도 걸어도>, <태풍이 지나가고>는 우선 책으로 봐야겠다.

 

성공한 덕후인 류배우는 감독을 직접 만났지만 나는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로운 과거와 헤어지는 법 - 자꾸만 떠오르는
미즈모토 가즈야 지음, 최려진 옮김 / 마일스톤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리학이나 감정 자기계발서 등을 최근에 많이 읽기 시작했다. 이 책도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다.

 

이 책은 쉽게 말하자면 이불킥 많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오버싱킹' 책에서는 '맴돌이 생각'이라고 표현했는데 별것아닌 사소한 것에 자꾸 매달리게 되는 사람들에게 약간 도움이 될 수 있다.

 

살다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일도 '맴돌이 생각'의 씨앗이 된다. 26쪽

 

어떤 사건을 자꾸만 반추하는 사람들은 평소 도덕성, 성실성, 책임감이 남달리 뛰어나고 자기만의 기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 나도 사소한 공중도덕을 어기거나 내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보면 탄식하며 저들은 왜 그럴까 오래 생각한 적이 많다. 요즘의 결론은 그냥 그들은 생각을 별로 깊게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명언을 남겼다. 왜 저한테 뭐라 하세요. 같이 버려요, 그냥.

 

*

나쁜 기억이 자꾸만 떠오를 때는 잠들기 전이나 단순 노동, 샤워 같은 일상활동을 해서 뇌가 한가하고 쉬고 있을 때라고 한다. 이 부분은 맞기도 하고 조금 수정되어야 할 듯하다.

 

일상의 활동이라도 잡생각 없이 하나하나 공들여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난 설거지할 때나 청소할 때도 안 좋은 기억을 반추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일 자체에 집중해야겠다.

 

조금이라도 나쁜 기억과 헤어지고 싶다면 아주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거나 새로운 가게에 가 보거나, 아니면 평소에 가지 않던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흥미로운 곳에 가 보는 것도 좋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83쪽

 

이것도 필요하다. 거창한 게 아니라 평소 가던 길 말고 다른 길로 간다거나 평소 먹던 음료가 아닌 걸 마신다든가 하는 정도여도 충분하다. 소심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번잡한 시기에 해보지도 않은 일을 벌였다가 사고를 수습하느라 애먹을 수 있다.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끼어들 때 주문을 외우거나 노래를 하는 것도 추천하고 있다.

 

인도 사람들의 이름은 외국 사람이 보기에는 이름 자체가 주문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영화 <세 얼간이>의 주인공 이름은 '란초다스 샤말다스 찬차드'다. 자, 여러분도 외워 보라. 자기 나름대로 억양을 넣어서 외운다.         86쪽

 

우리의 기억은 오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헤어진 연인의 향수를 맡거나 그가 좋아했던음악을 우연히 듣거나 하면 기억이 재생된다. 따라서 기억 속 이미지나 기억 속의 감각을 변환시키는 것을 추천한다.

 

잘못 사용하면 기억 조작이나 왜곡이 될 수 있지만 총천연색 기억을 흑백으로 바꾼다거나 선명한 목소리를 잡음 가운데 두거나 하는 트레이닝을 말한다.

 

사실 이게 트라우마의 영역이거나 하도 반추해서 이미 장기기억으로 남은 경우에는 바꾸기가 쉽지 않다. 아, 뭐 좋은 기억이라고 나쁜기억 반추 고시대회에 나갈 것도 아닌데 외울듯이 되새겼는지 후회가 된다.

 

잊어버리고 싶은 나쁜 기억이라도 기승전결을 갖춘 에피소드가 있는 데다가 감정을 실어 반복해서 기억하면 장기기억으로 정착된다. 하지만 한번 정착된 기억이라도 떠올리지 않기를 계속하면 언젠가 뉴런의 네트워크는 끊어지고 점점 떠오르지 않게 된다. 157-158쪽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 기억은 뇌세포인 뉴런의 네트워크를 달리는 미약한 전기 신호(임펄스)일 뿐이다. 학창시절에 본 느슨하고 빈 공간이 많았던 그림들이 떠오른다.

 

우리 뇌라는 건 날마다 모습과 형태를 바꾸는 바이오 컴퓨터이고 뇌세포는 150억 개 정도인데 매일 10만 개 정도가 죽는다. 3년에서 6년 정도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고 한다. 다만 몇십 년 전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세포가 교체되며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더라도 기억이 강화되지 않으려면 흥미도 없고 별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게 자꾸 훈련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손톱 압박법과 눈 사방운동 같은 것을 추천하고 있는데 왜 그것이 효능이 있는지 특별한 근거는 없다. 책 전체가 워낙 소프트해서 전문적 내용 없이 가벼운 실천만 소개하고 있다.

다만 저자가 NLP,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Neuro-Linguistic Programming) 전문가라 이런저런 방법이 나오는가보다 하고 추측할 뿐이다. 인간도 컴퓨터같이 어떤 명령어가 들어가면 딱 그렇게 프로그래밍되면 좋겠지만 아니다. 인간은 예측불가능하다.

뇌에 관해 밝혀진 것이 일부라서 뭔가를 해서 효과가 있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 들어맞았기 때문이지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그 방법이 유용한 게 아니다.

 

마지막 4장 나를 바꾸는 심리훈련 장이 좋았다.

 

지금껏 소개한 사소한 방법은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도와주고 증상을 없애는 데 주목한 것이다. 다시 나쁜 기억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본질적인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애초 기억이 자리잡지 않게 죄책감이나 부정적 생각은 버려야 한다.

 

증상이라는 것은 번거로운 대상이지만 뜨금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고방식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곤란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표면적인 문제해결에만 얽매이지 말고 근본부터 자신의 사고방식과 신념, 가치관 그리고 자아상을 바꾸어 보자. 187쪽

 

아래 부분 읽다가 그냥 해방감에 크게 웃었다. 내가 수면 패턴 찾는다고 전전긍긍하던 게 떠오르고 뭐든 바른 방법으로 청소나 운동 그런 걸로 잡념을 없애려 하면서 스트레스 받던 게 생각나서.

 

규칙적인 생활은 좋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계속 자기 부정을 하고 있거나 실패했던 일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질책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바뀔 수 없다.

(중략)

반면 별달리 운동도 하지 않고 생활리듬도 엉망이며 식사도 대충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때우고 아침햇살을 보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발고 즐겁게 보내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178-179쪽

 

마지막으로 저자는 완벽한 인생은 없고 현재만이 있으며

지금, 조금 앞만 보며 나아가라, 고 조언한다.

 

책을 읽고 뇌과학, 명상, NLP에 좀더 관심이 생겼다.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데 유사과학 같기도 하고 역사도 짧다.

명상이나 상담 루트를 통해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접근한다고 하니 신중히 알아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