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를 보게 되었고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신작이 나오면 본다.
요즘은 그냥 무언가를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기 여기말로 여로워서(열없다, 부끄럽다 비슷한 어감인듯) '보기 편하다' 그 정도로 이야기해두고 싶다.
결혼하고서는 남편 근무지를 따라 분갈이하듯이 여러 지역을 옮겨다녔고
그렇게 이곳 광주에 왔다.
13년경부터 광주극장에 가서 조조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의 소소학 낙이 되었다.
특히 애들 방학 직전이면 꼭 가주는 것 같다.
공교롭게도 고레에다 감독 영화는 거의 다 광주극장에서 보았다.
내일이면 초등방학이라 26일이 개봉인 게 정말 다행이고 반갑다.
개봉 첫날에 보다니
이야.
<어느 가족> 포스터 버전 중에 마음에 든 것
버려졌던 아이 '유리'가 쇼타네를 만나 살았던 때의 기억을 담은 그림은 유괴되었던 아이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림이다.
이하 내용 유출일 수 있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의미를 '혈연'에 한정 짓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고 많은 비극은
사실 가족, 특히 부모를 자신이 택해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데 있다.
어제오늘자 사회면만 대강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사소하게는 성격 차이로 인한 다툼, 사회적 공분을 사는 아동학대, 외도, 불륜, 유산 분쟁 등을 보면 가족관계가 인간관계의 최상급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도 지극히 동양적인 아니지 실은 한중일의 정서일 뿐이다.
실상 혈연으로 맺어지기만 한 가족은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구정물같이 혼탁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도 평화롭게 잘 지내기 힘든데 여기 피 한 방울 안 섞이고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집이 있다.
전남편의 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할머니 곁에 수상한 인물들이 잔뜩 모여 산다. 오사무는 건설현장 일용직을 꾸역꾸역 나가고 노부요는 세탁부로 일하고 노부요의 이복동생 아키는 유사 성매매업소에 나가며 할머니 집에 같이 모여 산다.
어느날 오사무와 노부요(겉보기엔 평범한 현실 부부같은)는 집에 오다가 어린 여자아이가 추운데 밖에 나와 있는 걸 보고 데려와 먹을 것을 먹이고 따뜻하게 재운다. 상처투성이에 잔뜩 움츠린 아이는 오사무 일행? 가족과 만나면서 아이다운 모습을 찾아간다.
이 가족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근처 가게에서 슬쩍하고 집청소는 그 누구도 열심히 하지 않고 식사도 누가 준비한다기보다 그날그날 대강 때운다. 구시렁대기는 해도 누구 하나 크게 화내는 일 없이 지낸다. 그리고 우연히 데려온 유리를 통해 이들의 결속력은 더 높아진다.
노부요와 유리가 같이 목욕을 하다가 노부요의 팔뚝에 난 화상 흉터를 유리가 오래오래 만져주는 장면에서 눈물이 살짝.
겨우 다섯 살 난 아이가 다리미 흉터를 용케 알아보고 나도 그렇게 다쳤다고 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유리'는 이들과 같이 지내고 나서야 바다에 처음으로 가본다.
자가용으로 편하게 가는 것이 아닌 전철을 다같이 타고 도착해서 돗자리를 편다.
오사무는 수영복이 아닌 팬티 바람이고 '유리' 수영복은 마트에서 슬쩍한 것이지만 모두가 즐겁다.
그러나 이들의 짧은 평화는
할머니의 죽음과
쇼타의 돌발행동으로 막을 내린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이들은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할머니를 집 마당에 묻고 할머니의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오사무는 산재를 당했고 노부요는 세탁부 자리에서도 밀려나 실직중)
쇼타는 유리가 자신과 같이 양 손가락을 맞대고 돌리다가 도둑질을 하는 것을 보고 유리가 들키지 않게 눈에 띄게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가 다치고 경찰에 잡힌다. 쇼타로 인해 오사무와 노부요는 할머니 시신 유기와 유리의 유괴라는 죄목으로 잡힌다.
생모는 남자 만나는 데나 관심이 있고 아이를 학대했고 아이가 실종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신고하지 않았는데도 나중에 유리를 다시 맡게 된다.
쇼타는 유치장에 갇힌 노부요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그 가족의 일원이 된 까닭을 알게 되지만 친부모를 찾기보다는 시설을 택한다.
결말에서 쇼타는 오사무와도 부자 관계를 끊게 된다. 오사무가 아저씨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도 쇼타가 타고 가는 버스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게 너무 짠하다.
쇼타는 버스 안에서야 속엣말로 '아빠' 라고 불러본다.
그렇게 원했는데 아빠 소리 한번 못 듣고 헤어진다.
고레에다 감독 작품에 자주 보이는 릴리 프랭키는 진짜 이런 짠한 아버지 역에 최적화된 배우다.
엄청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도 없지만 아이에게는 한없이 다감한.
(현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아빠는 사양하겠지만 ㅋ)
우리에게는
하이킥 신애 아버지로 나온 배우 정석용 님이 있다.
드라마에 이 분 나오면 그 가정은 IMF시기에 도산하거나 가게를 몇 개나 말아먹은 그런 집.
지붕뚫고 하이킥 결말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씁쓸하고 당연한 결말이다.
아직 사회복지나 여러 가지 제도가
혈연을 기초로 한 가정에 맞추어져 있고
인간의 자식은 제대로 사회에 나가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
고레에다 감독은 좀도둑질을 해야 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을 윤리적으로 비판하거나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렇게 경제적, 감정적 유대를 지속하며 살아가는 유사 가족이 있고
이들이 혈연을 기반으로 한 가정과 무엇이 다른지 조용히 묻고 있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은 항상 그렇듯이 마냥 미숙하지만은 않고 나름의 생각과 판단이 있다.
쇼타는 오사무와 같이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기는 했지만 여동생인 유리가 자신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누구에게나 있다.
쇼타는 순간 인생의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이가 보살핌을 받고 잘 성장하다보면 자신만의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는 시기가 있다, 분명히.
유리는 오사무 일행에서 벗어나 친엄마에게 돌아가서도 할머니와 같이 부른 수 세는 노래를 부른다. 가족은 이렇게 함께 살아가며 알 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라서 어릴 때일수록 정말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가족을, 그것도 부모를 택할 수 있다면 버림받는 부모도 꽤 많을 텐데.
언제까지 아이들이 이렇게 학대당하고 힘들어야 하는지 안타깝다.
(아이 낳고는 정말이지 뉴스 보기가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그런 역기능 가정이라 해도 가정을 벗어나면 아이에게는 그냥 정글이다.
가출 청소년들끼리 만든 팸에서 일어나는 범죄라든가 홀로 있는 노인들을 보살펴준다는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 등을 보면
이 영화는 동화 같은 판타지.
고레에다 감독의 사회적 약자를 향한 애정어린 시선은
쇼타가 도둑질하는 걸 알면서도 눈감아주며
동생은 도둑질 시키지 말라고 했던 잡화점 아저씨의 행동에 드러나듯이
어떤 사람의 일탈 행동을 단죄하기보다
인생 전체의 흐름을 보자는 데 있다.
어떤 인생이든 한 순간은
실수를 눈감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같이 놀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