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는 가을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아이들 방한용품 정리에 기본 가사에 할일은 많았지만 버리려고 둔 여성영화제 리플렛을 보다 <오 ! 루시>를 발견하고 독립상영관 가는 버스를 탔다.
독립상영관 근처 카페에서 은행나무 잎이 쏟아질듯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라떼를 마시다 영화관으로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영화 첫 장면부터 아주 세다.
흡사 우리나라 출근 풍경과 닮은 일본 지하철 역사 내에서 생면부지의 젊은 남자가 세츠코에게 잘 있어, 라고 한마디 하고 철로에 몸을 던진다. 크게 동요하지 않고 출근이 지연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 세츠코도 담배를 피우며 담담하게 이 상황을 정리한다.
역시나 익숙한 사무실 풍경.
세츠코는 조카에게서 자신의 남은 영어수강권을 대신 수강하고 그대신 돈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세츠코가 조카의 말에 따라 체험교실에 가니 학원답지 않은 요상한 분위기에 노래방같이 구획된 곳에서 '존'이라는 강사가 세츠코를 맞이한다.
존은 세츠코에게 노란 가발을 씌우고 이름을 뽑게 하여 '루시'라는 새 이름을 준다. 그리고 존은 세츠코를 '허그'한다.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한 '허그'에 세츠코는 달라진다. 그러던 중 실은 존이 조카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직접 목격한다. ㅜ.ㅠ
세츠코는 조카 미카와 존이 떠나자 무작정 휴가를 내고 언니와 함께 조카를 찾으러 나선다. 익숙한 사무실에서 벗어나 샌프란시스코의 풍경과 다시 만난 존의 친절에 세츠코는 생기를 찾는다.
하지만 존은 세츠코의 조카를 기만한 흔한 유부남이었고 세츠코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츠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끝까지 존에게 돌진하고 상처받고 모든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결국 세츠코는 일본으로 돌아오고 휴가 이후 원치 않는 인사발령을 받은데 불복해 사표까지 쓴다.
루시의 인생을 망친
진심 짜증나는 존이라는 인사,
무책임과 이기주의, 탐욕, 멍청함
동양권 여성들이 서양남성에게 가진 환상이 결국 이런 일들을 자주 만든다.
그저 여기가 아닌 진짜 다른 어딘가
뭔가 다른 새로운 세계로 가보고 싶은 욕망이 파국을 불러왔다.
진정 가련한 루시!
오 ! 루시!
꼭 그래야만 했나요?
괜찮아요, 괜찮아.
누가 뭐래도 자기 인생 , 자기 돈이에요 이렇게 처절하게 낭비해볼 수도 있어요.
하필 그 시기가 중년이라 큰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니까요.
영화를 마치고 소설가 이화경 님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잘 모르는 작가분이었는데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나올 수 있게 관객들을 잘 이끄셔서 좋은 이야기 듣고 나도 중간에 이야기에 끼어들게 되었다.
중년에 이른 여성에게 세상이 얼마나 무례할 수 있는지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관객들과 이야기하셨다.
중년에 이르면 힘들고 아픈 걸 돈을 주고 받아야 성립되는 관계 속에서 해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는 말씀에 얼핏 동의한다. 작가님처럼 나도 한의원에 다닌 시절이 있어서.
작가님이 의사에게 갱년기가 되니 '감정의 파고가 크다'고 고백해서 의사가 못 알아듣자 작은 일에 빡이 친다고 표현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셔서 많이 웃었다. 뭔가 나같은 지적인 중년의 여성은 평범한 중년 여성과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는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자기 반성에 동의한다. 나 역시 흔하디 흔한 욕심 많은 학부형인데 뭔가 의식 있는듯이 굴 때가 있고 지역민인데 어딜 가든 내가 있던 서울 어쩌고저쩌고를 가끔 한다.
그냥 우리지역에 이런 귀한 자리가 있으면 열심히 다니면 되는 거다.
의사가 허리가 아프면 말씀하라고 했는데 작가님이 의사선생님이 누르던 데가 아프다고 하니 의사가 거긴 살이잖아요, 하고 무례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다 웃었다.
살처럼 보이는 어떤 허리, 옆구리 아세요? 의사선생님.
허리가 없는데도 허리가 아플 수 있다는 거 아세요?
잘록한? 20대? 여성의 허리말고 그냥 허리
여성의 진짜 몸을 얼마나 아시는지요.
여성이 아니라서 그 나이가 아니라서 느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더 중년여성에게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
내 나이도 이제 병원 의사선생님들 나이보다 비슷하거나 살짝 많게 되면서 차이나는 친절도에 씁쓸해진다.
이렇게 중년여성은 사회적으로 투명한 존재가 된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여기면 다행인데 어떤 살덩어리, 무례함, 탐욕, 오지랖 이런 부정적인 수식이 잔뜩 붙는다.
대접받을 수 있을 때는 오로지 소비할 때뿐이다.
고객님, 어머님으로서만 존중받고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한 인격체로 대해주지 않는다.
*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세츠코 역의 테라지마 시노부의 그 지치고 까칠한 초반의 표정과 존을 알고 나서의 돌진하는듯한 결연한 표정, 미소, 웃음들이 아직도 선하다.
중년 남성은 가정을 꾸리고도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이용해 또다른 사랑을 해도 주변인들에게 비난받지 않는다. 중년의 위기로 인한 일탈로 치부하고 가정으로 돌아와 자기 위치를 다시 지키면그냥저냥 넘어간다. 시청하지는 않았지만 이선균의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는 인품 하나 좋은 것만으로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한테 사랑을 받을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 특히 중년여성의 로맨스는 봉쇄되어 있다. 기혼중년여성의 로맨스나 작은 일탈은 가정 붕괴, 삶의 기반 붕괴로 이어지기에. 기혼 여성의 작은 일탈은 주책, 정신병, 도덕성 끝의 타락으로 비난받는다.
최근 문제가 된 논산여교사 사건만 봐도 미성년자와 관계한 기혼 여성 교사들은 신상이 탈탈 털리고 여기저기 회생이 불가능하게 까여도 동일한 죄를 저지른 남성 교사들은 신상이 탈탈 털리거나 이혼당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다 범죄자라서 이런 비교 자체가 의미 없기는 하다. 다만, 동일한 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여성에게만 유독 더 가혹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신상공개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도 일단은 차치하기로 한다)
세츠코의 경우 독신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많은 비웃음과 무례를 겪는다. 같은 연령대 중년 남성의 사랑 찾기라면 진국이라면서 나이 차이 따위는 문제 되지 않는다며 응원하기도 한다.
여러 매체에서 중년 남성은 나이들수록 원숙해지고 중년 여성은 무례하고 히스테릭한 존재로 자주 그려진다. 드라마 작가들 대다수가 여성인데도 왜 그럴까? 막장 드라마, 욕드(욕하며 보는 드라마)가 소비되는 구조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다. 아직은 욕망이나 대리욕구의 분출 정도라고 짐작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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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이모와 조카가 한 남자를 두고 치정에 얽힌다는 설정이 불편하다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정말 맞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랑은 자주 도덕을 뛰어넘기에 이런 설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조카 역시 이모에게 얼마나 무례했고 자기 편의만 취했는지 알 수 있게 되어 세츠코만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우리는 다 때로는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도 있지 하고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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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파국 끝에 세츠코는 일본으로 와서 자살을 기도하는데 존의 수업을 같이 들었을 때 만난 사별한 남성 '톰'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톰은 역사에서 자신이 너무 강경하게 대해 아들이 죽었다고 고백하고 서로 '허그'한다.
거창하지 않은 이 '허그'가 뼛속깊이 외로운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객석의 60대 어머님이 이들이 결혼해서 살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난 아니다.
세츠코도, 루시도 아닌 존재로 다시 시작해보았으면 한다.
그게 삶이든, 죽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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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해체 가족이라 고백한 여성분이 새벽에 술 마시고 들어가 간만에 엄마를 안아보았다는 고백에 나는 그만 휴대용 티슈를 들고 말았다. 루시도 짠하지만 역시 현실이 더 슬퍼. ㅜ.ㅠ
단풍나들이 가기 좋은 이 시절에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가운데
이 상영관에 앉은 모든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있을 테지.
상영관 토크까지도 다 마치고 나서 시크한 수세미도 샀다. 어릴 때는 그런 데서 머그나 에코백을 샀으나 결국 잘 안 쓰게 될듯해서 카키와 그레이 섞인 시크한 수세미를 하나 샀다.
이제부터 설거지를 하며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들어야겠다.
마지막까지 진짜 의식의 흐름에 따른 페이퍼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루시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동반사로 이 노래가 떠오르는 옛날사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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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Picture yourself in a boat on a river
강위의 보트에서 오렌지 빛 나무와 마멀레이드 하늘을 낀
With tangerine trees and marmalade skies
너 자신의 모습을 그려봐
Somebody calls you, you answer quite slowly
누군가가 널 부르고, 넌 천천히 대답을 하지
A girl with kaleidoscope eyes
복잡한 눈을 한 여자 아이가
Cellophane flowers of yellow and green
노란 녹색을 띄는 셀로판 꽃을 들고
Towering over your head
네 머리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구나
Look for the girl with the sun in her eyes
눈 속에 해를 품은 여자애를 찾아야 돼
And she's gone
그녀는 떠나갔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루시는 다이아몬드를 들고 하늘에...
Follow her down to a bridge by a fountain
하강하는 그녀를 따라 흔들리는 말 모양을 한
Where rocking horse people eat marshmallow pies
분수대 옆의 다리로 가봐. 사람들은 거기에서 마시멜로 파이를 먹어
Everyone smiles as you drift past the flowers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빨리 자라는 꽃밭을
That grow so incredibly high
네가 떠내려 지나가는 동안 모든 이들은 웃지
Newspaper taxis appear on the shore
신문 모양을 한 택시가 강가에 나타나서
Waiting to take you away
너를 데려가려 기다리고 있어
Climb in the back with your head in the clouds
머리는 구름에 맡기고 뒤에 올라타면
And you're gone
넌 떠나가는 거야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루시는 다이아몬드를 들고 하늘에...
Picture yourself on a train in a station
기차역에 정차한 기차안에서 거울로 넥타이를 보며
With plasticine porters with looking glass ties
점토 광고 포스터를 든 너 자신의 모습을 그려봐
Suddenly someone is there at the turnstile
갑자기 누군가 회전문에 나타났어
The girl with the kaleidoscope eyes
바로 그 복잡한 눈을 한 여자애야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루시는 다이아몬드를 들고 하늘에 있어...
네이버 블로거 Lovely Annie 해석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