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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 키드 - [할인행사]
찰리 채플린 감독, 찰리 채플린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의상은 채플린의 떠돌이 의상일 것이다. 그 의상은 채플린을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만든, 허영과 위세의 복잡스런 혼융을 의미하면서, 사회적 신분과 개성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중략) 채플린이 인간을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의상으로 상징화된다. 즉 자기 기만, 허영, 부조리 그리고 끝으로 신랄할 정도의 취약성 등이다. (자네티, 영화의 이해, p.325)
*편집버전-_-인 관계로 스토리만 훑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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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나 퍼비안스(1915년부터 8년 동안 35편의 채플린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부자집 앞에 서있는 자동차에 아이를 버린다. 그때 도둑들이 자동차를 훔치고, 아이는 슬럼가에 버려진다. 그리고 산책하던 채플린이 그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슬럼가라는 더러운 공간의 영상화가 무척 잘 되어있는데, 채플린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슬럼가 세트에 투자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슬럼가의 미장센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 뒷부분에서의 에드나와 에드나의 전남편이 등장하는 부분은 당시의 사교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짤막한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슬럼가와의 대비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쿠건이 아프게 되자 의사가 오게 되고, 그는 쿠건을 고아원 비스무리한 곳으로 보내려고 한다. 클로스업이 사용된 바로 이 장면에서 눈물 흘린 사람 많을 것이다(채플린의 명언: “코미디에는 롱 쇼트, 비극에는 클로스업”). 여기서 고아원 원장이나 경찰 등은 역시 기득권계층(유산계급)의 대유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부랑아나 고아와 같이 사회 안정(=기득권계층의 번영)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은 억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자.)
그러나 채플린은 쿠건을 구출(?)해 여관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여관주인은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쿠건을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여기서 에드나는 이미 유산계급의 반열에 들어선 상태인지라 돈의 힘으로 미디어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녀는 자본주의 속에서 성공하고 자본주의의 힘으로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녀가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나누어주고 하는 등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돈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다. 이러한 에드나에 대해서 채플린은 부정적인 시각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쿠건이라는 작은 행복 하나만으로도 살 수 있는 채플린에 반하여1) 물질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지만 마음속의 큰 空洞을 어찌하지 못하는 에드나나 에드나의 전남편이 긍정적으로 비추어지지 않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확대하자면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엔딩은 쿠건과 에드나와 채플린이 모두 함께 살게 되는 해피 엔딩이다. 그들이 그 이후에도 전만큼 행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엔딩에서 중반의 쿠건이 끌려가는 부분의 페이소스가 완전히 해소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엔딩 부분이 너무 짧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미소는 지을 수는 있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으레 해피 엔딩이라고 하면 별로 환영하지 않는 편인데 채플린의 영화만은 예외인 것 같다. 뻔한 엔딩이라 해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은은한 미소를 짓게 된다.
솔직히 말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슬랩스틱만이 채플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감상이 채플린이라는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에 대해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기에 기쁘다. 채플린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 웃음과 페이소스의 공존 그리고 현대사회의 병폐에 대한 비판 등 - 에 대해 그의 영화를 더 많이 접한 뒤에 다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02.4.8 작성.
05.7.22 짧게 편집해서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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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플린에게 있어 쿠건의 존재는 천사와도 같다는 암시가 채플린이 꾸는 백일몽 속에서 나타난다. 단, 그 속에 등장하는 악마는 안티 테제로서의 자본주의로 보기에는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어쨌거나 채플린에게 있어서는 쿠건이라는 행복의 부재가,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의 비판보다 더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