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롤런드에게는 이렇다할 직업이 없다. 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딱히 이거다, 라고 말할만한 게 없다. 시를 쓰지만 딱히 시로서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풀타임 직업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7개월된 아들을 두고, 아내가 집을 나갔다. 싱글 대디가 된 그는 돈벌이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라서 국가에 한부모 보조금을 신청해 타게 된다. 나는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그가 심히 걱정스럽다. 늘상 아이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돈은 어떻게 벌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아내는 이런 상황에서 집을 나갔단 말인가. 아내는 집을 나간 상황이 있겠지만, 아니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아이를 두고 간단 말인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그리고 경찰이 찾아온다. 아내가 사라졌을 때 남편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게다가 형사는 그 집을 둘러보다가 시인이라는 롤런드가 써둔 시를 보게 된다. <나에게 평온이 필요할 때, 그녀는 죽어 있어야만 한다 p,44> 라고 적힌 글을 읽고, 형사는 그에 대한 의심을 풀 수가 없다. 아내가 자신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며 엽서를 보내와도, 형사는 그를 의심한다. 설사 아내는 안죽였어도, 당신은 과거에 다른 누군가를 죽인거 아니야?
그가 평온이 필요할 때 죽어 있어야 했던 여자는 그의 어릴 적 피아노 선생님이다. 기숙 학교에서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선생님. 그가 열네살일때 스물다섯이던 선생님. 그가 열한살일 때 이미 그를 만졌던 선생님. 세상에 미사일이 쏘아지고 그렇다면 그걸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거 아니냐는 말을 친구들과 하다가, 그는 '나를 찾아오라'고 말했던 피아노 선생님을 삼년만에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섹스를 하고 연인이 된다. 그러니까 남자 아이가 아직 열네살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섹스라는 단어를 쓰는게 아니라 강간이라는 단어를 써야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어쨌든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리고 서로에게 집착하며 섹스에 탐닉한다.
어른인 선생님이 아이인 그를 처음 만진것부터 잘못되었지만,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사춘기의 소년을 몰아내지 않고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에게 사랑이라고 말하며 욕망을 채운것도 잘못되었지만, 그녀의 집착은 그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했고, 나는 그 점에 더 분노했다. 그는 그녀가 정해주는 시간에 그녀에게로 가야했고 그리고 그녀 옆에서 섹스해야했고,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했다. 그가 학업에 집중할 수 없는건 뻔한 일이었으며 그는 결국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한다. 자신의 성적에 충격을 받은 그에게 학교 선생님들은 한 번 더 기회를 줘보기로 한다. 그는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지역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과학 선생님에게 인상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에세이를 써서 에이플러스를 받기도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똑똑한 학생이라고 선생님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보자고 학교장을 설득한 후다. 롤런드는 그에게 주어진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마땅히 기뻐하며 감사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피아노 선생님은 그런 그를 말린다. 학교에 돌아가지 말라고 한다. 롤런드가 있어야 할 곳은 그녀의 침대라고 말한다. 심지어 열여섯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곳에서 결혼하자고 그를 설득한다. 아니, 그래도 결혼은 좀 아니지 않나, 그렇게 롤런드는 그녀를 떠난다.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마친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그는 학교에 돌아가지 않기를 선택하고, 그리고 돈을 번다. 그리고 자라고, 어른이 되고, 여자들을 만나고, 섹스를 좋아하고, 그러나 풀타임 직업을 갖지는 못한 채로 지금 한 아이의 아버지가, 싱글 대디가 된 것이다.
나는 롤리타를 생각했다. 험버트의 성적 노예가 된 롤리타. 롤리타 옆에는 롤리타를 지켜줄 어른이 없었고, 롤리타를 이용하는 의붓아버지 험버트가 있었다. 롤리타는 연극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롤리타에게 집착하고 롤리타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숨겨야하는 험버트는, 롤리타가 즐거워하는 테니스도 못하게 하고 롤리타가 재능을 보이는 연극도 못하게 한다. 그렇게 롤리타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더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롤리타에게 올 수 있었던 어떤 미래들을 차단한다. 롤리타가 험버트를 벗어나 도망을쳐도, 그녀에게 펼쳐진 미래는 또 그녀를 이용하려는 다른 남자의 기다림이었다.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1955년 작품이다. 나보코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은 2022년 작품이다. 이언 매큐언 역시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그 아이의 미래를 어떤 식으로 방해하는지. 그러나 이 70년 사이에 세상은 변했다. 롤리타의 편이 되어준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고 롤리타가 쓰여졌던 당시 많은 평론가들의 험버트의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롤런드가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다. 가해자의 서사가 그 범죄에 변명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내가 집을 나가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였던 롤런드는, 얼마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가진 남자가 되었지만,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시를 가지고 다시 그를 찾아온 젊은 형사는 그에게 말한다.
"베인스 씨는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이건 범죄 문제예요." -p.481
롤런드의 삶은 순간순간 '그 때 그 일이 없었다면'을 생각하게 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은, 섹스에 집착하게 된 것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것은, 어떤 일에도 제대로된 성과를 낸 적이 없는 것은, 그 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악몽을 꿀 때면 피아노선생님이 나왔지만, 그러나 그는 싱글 대디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갔다. 아이는 자랐고 다른 여자들과 연인이 되기도 했다.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축하카드의 문구를 써준 걸로 돈을 여유롭게 가질 수도 있었다. 그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했을 때, 그리고 나도 그 당시 원했다고 얘기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너는 고작 열네살이었다고. 롤런드는 롤리타와 달랐다. 롤런드는 세상이 그 일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잇었고, 사실 그러나 나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일이 자기 아들에게 일어나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도 안다. 어떤 것이 잘못이고 어떻게 잘못된건지 아는 일은 중심을 잡는데 필요하다. 롤런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삶에 있어서 고난을 만나고 고통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쁨과 행복을 만난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이해하기도 한다. 어릴 때 그 일이 없었다면 그의 미래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펼쳐졌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게 지금 불행한 삶을 사는 걸 뜻하는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타인의 삶을 불행하다고 혹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남들이 그러듯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구나 그러하듯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된다. 아이가 있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부모를 떠나보내고 손주들을 만나게된다.
롤런드의 이야기가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롤런드가 만나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롤런드는 통일전의 독일인과도 친구였고 지금은 정치적으로 꼴도 보기 싫은 정치인과 과거에 밴드를 같이하기도 했다. 그를 두고 떠난 아내는, 보잘것 없는 소설을 써서 그가 비웃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가 읽어도 크게 놀랄만한 대단한 소설가가 되어 노벨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노년이 되어 이제 자신의 삶을 백 장의 사진으로 정리하기 위해 천천히 준비하는 롤런드는, 망설이다가 그 백 장안에 피아노 선생님의 사진도 넣는다. 그의 인생에는 그 선생님이 있었다. 단순히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그녀의 존재가 거기, 그와 계속 있었다.
이 책이 의미를 가지는 건, 이 책이 단지 '아동 성폭행 피해자 롤런드'를 얘기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러나 롤런드라는 한 인간의 인생 전체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이 그의 인생 전체를 의미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있었고, 그 일은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러나 그의 인생이 그것 만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역시, 그 사람들 고유의 인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각자 고유한 인생을 살아갔던 사람들과의 총체적 합이다.
그의 아내 앨리스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은 아주 많이, 그 아내의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어린 아이와 남편을 두고 떠나버린 여자. 자신이 침몰할까봐, 자신의 엄마가 글쓰기를 포기하고 침몰했던 것처럼, 자신도 침몰해서 계속 우울하게 인생을 살까봐 기꺼이 버리고 돌아선 여자.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정말로 대단한 작품을 써냈다. 대단한 작품을 써내고, 또 써냈다. 매몰차게 아이와 남편을 무시하면서 보란듯이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롤런드는 수시로 얘기한다. 만약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집에, 그녀가 떠나지 않고 우리와 살았다면, 그랬다면 그런 작품을 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도 해내면서 훌륭한 작품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떠났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글에 대한 이야기. 작가는, 세상에 글을 써내는 사람은, 그 글에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에 대해 얼만큼의 이야기를 해야하는걸까.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에 있어서 윤리란 어떤 것일까.
롤런드의 인생을 그리고 앨리스의 인생을 좋은 인생이었노라 그리고 나쁜 인생이었노라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는 없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는 어떤 일을 후회하고 어떤 일에 있어서는 만족하는 것일테다. 어떤 비극이 나에게 있었고 또 어떤 후회가 나에게 남았어도 또 어떤 자랑스러움과 어떤 행복이 공존한다. 아이었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떤 실수를 하고 또 어떤 행복과 안정을 느끼기까지, 이언 매큐언은, 그 삶을 살아냈기 때문에 써낼 수 있었다. 늙어가는 부모 그리고 결국 부모를 떠나보내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 않았다면 어떻게 써낼 수 있을까.
롤런드에게 의붓형이 있었다는 것을,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언 매큐언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의붓형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된 일. 책 속의 롤런드가 그랬듯이 이언 매큐언도 기숙 학교를 다녔다. 그 기숙학교의 어떤 선생님은 실명으로 이 책 속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느 정도 이언 매큐언의 이야기이구나,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는데, 이언 매큐언은 감사의 말에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 학교에 미리엄 코넬 같은 피아노 선생님은 없었다. -p.688, <감사의 말> 중에서
스스로 만든 지옥은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누구나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만들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런 지옥일 뿐이다. 성격이 불행을 자초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롤런드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자기 손으로 고문 기계를 만들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 P35
그의 오른쪼긍로 난 농로는 평평한 들판을 가로지른 후 크라우치하우스를 지나 워런 레인을 따라 오리 연못과 어워턴홀로 이어졌다. 앤 불린이 어릴 적에 그곳을 바문해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며, 나중에 헨리 8세가 그녀에게 구애하기 이해 그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모든 학생이 알고 있었다. 앤 불린은 왕의 명령으로 런던탑에서 참수되기 전에 자신의 심장을 어워턴교회에 묻어달라고 간청했다. - P186
그는 일을 마친 후 침실에서 자신의 O레벨 시험(과거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보통 16세가 된 학생들이 치던 과목별 평가 시험) 결과가 은 갈색 봉투를 떨리는 손으로 뜯었다. 그느느 침대에 앉아 목록을 바라보며 특정한 한 글자가 다르게 보이도록 애썼다. 모두 열한 과목이었는데 단 한 과목도 통과하지 못했다. 모든 과목 옆에 ‘F‘가 찍힌 얄팍한 인쇄지는 그야말로 물리적 충격이었다. 영어마저도. 영어는 저능아만 낙제한다고 다들 말했다. 음악까지도. 그는 합격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 식스폼에 못 올라가고, 상급 영어와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대학도 물건너간 일이었다. - P356
"넌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한 나이야." "그래도 선생님을 만나러 갈 거예요. 전과 똑같을 거예요." "난 네가 여기에 항상 있기를 원해." "네." "난 네가 학교를 떠나기를 원해. 네가 내 침대에 있기를 원해." 그는 공중전화 부스 문에 몸을 의지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P361
"내가 이미 여러 번 부탁했잖아요. 아프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면 그는 심통을 부렸다. "다정하게 대해준 대가가 고작 이거야?" 그런 분위기에서 아버지는 부루퉁함과 격노의 조합을 능숙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술도 즉각 와인에서 맥주와 독주로 바꿔 교대로 마셨다. 로절린드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마친 뒤 곧장 침실로 가버렸고, 롤런드는 거실에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싶을 때, 그리고 롤런드도 함께 넘어가주기를 바랄 때 늘 그러듯 이렇게 말했다. "신경쓰지 마라, 아들. 신경쓰지 마." - P371
그리고 올드타운을 지나 렉토리그로브를 따라 집을 향해 짧게 걸어가는 길에도 끔찍하고 부적절한 생각이 고개를 드렀다. 해방감. 그는 더 커진 하늘 아래 서 있었다. 넌 더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야. 넌 그저 아버지일 뿐이야. 이제 너와 네 무덤으로 가는 분명한 길 사이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아. 아닌 척하지 마-스픔만이 아니라 고양감도 온당한 감정이야. 그는 죽음에 관해서는 초심자였지만 처음 드는 감정을 의심할 줄은 알았다. - P420
그의 아버지에겐 친구가 없었다. 군대 동료, 장교클럽의 술친구는 상황에 의해 억지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들은 수년 동안 그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롤런드는 이제야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잔디깎이 사건은 작은 일례일 뿐이었다. 고립된 남자, 그는 동네 술집에서 편하게 어울리기엔 너무 독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남의 말에는 귀를 닫았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능은 높으나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해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매일 보는 신문 외에는 관심사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군대식 질서 의식과 시간 엄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깊은 권태감을 가렸는데, 술이-적어도 그 자신에게는-모든 걸 견딜 만하게 해주었다. - P427
그는 걸음을 옮기며, 아이를 키우는 것 외엔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비정형의 상태로 남아 있고 그걸 바꿀 방버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돈은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삼십년 전 비틀스에게 보내려고 쓰기 시작했던 곡은 어떻게 되었는가? 없었다. 그후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백만 번쯤 테니스공을 치고, 천 번쯤 <클라임 에브리 마운틴>을 연주한 것 말고는, 자신이 쓴 진지한 시들을 읽을 때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아버지는 한순간에 쓰러져 죽었다. 어머니는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뇌 검사를 받아보면 확실해질 터였다. 부모의 운명은 그의 운명을 말해주었다. 그는 부모의 운명으로 자신의 삶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 나이 때 부모님이 어땠는지 또렷이 기억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병든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 P441
반면 앨리사는-그녀의 결단에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느 바람 부는 화창한 평일 아침에 그녀는 작은 여행 가방을 꾸린 후 열쇠를 남기고 현관문을 나서며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때 그녀는 야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고통을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442
그는 잠들기 전에 귀사타브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30쪽 정도 읽었다. 청년 프레데렉 모로는 나이 많은 유부녀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어느 저녁 사교 모임에서 작별인사로 그의 손을 잡았고, 그 직후에 집으로 걸어가던 그는 퐁네프 다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황홀한 상태에서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것 같은 영혼의 전율을 체험한다". 롤런드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손을 잡다. 이 단계에서 둘 사이에 섹스의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는 아마 그의 감정에 대해 전혀 모를 터였다. 롤런드의 문고본에 적힌 작품 소개에 따르면, 작가 플로베르 자신도 열네 살 때 스물여섯 살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 여자는 거의 반세기 동안, 여러 차례 공백기를 두고 그의 삶에 남았다.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렸다. - P453
"베인스 씨는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이건 범죄 문제예요." - P481
"당신이 참아줄 수 있다면 하나 더 이야기하죠. 나는 당신이 다른 학교에 다녔는지, 지난 세월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프로 콘서트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다는 건 알아요. 수년간 계속 찾아보고 알아봤으니까. 당신이 성공하면 내가 당신에게 끼친 피해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하지만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나 때문에 당신이 갖지 못한 것, 음악을 사랑하는 세상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너무너무 미안하게 생각해요. 당신에게 광기를 쏟아부은 것도." - P512
지금, 마침내 그가 갑작스러운 동작에 약간 현기증을 느끼며 일어섰을 때, 잔에는 위스키가 4분의 3이나 남아 있었다. 그의 뱃속에 들어가 수면을 망치느니 거기 있는 게 나았다. - P5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