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
마리 루티 지음, 김명주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어떤 말을 써도 나는 마리 루티가 하는 말을 반복할 뿐일 것 같다. 이 책 읽으면서 앞으로 마리 루티의 책은 다 읽을거라고, 리베카 솔닛과 정희진 책처럼 다 내 책장에 꽂아둘거라고 결심에 또 결심을 했다. 진화심리학의 모순과 견고한 성차별 앞에 완전 성난 어조가 이 책 내내 유지되는데, 나는 그런 감정이 이 똑똑한 책을 통해 전해지는 것도 좋았다.


화성남자 금성여자라면, 그냥 남자들은 화성가서 살고 여자들은 금성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킁킁.








남성 학자들은 자신들끼리 논쟁은 안하는지 주로 대중을 상대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망라한 ‘성과학 이론‘을 주장하는데 이런 표현은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머리에서 불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저들이 ‘지식인‘인가 싶을 정도다. (추천사, 정희진, p.9-10)

나는 진화심리학자들이 학계에서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비전문가인 일반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이 분야를 알면 알수록 놀라움도 커졌다.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가장 나쁜 성 고정관념들의 과학적 타당성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이 학문의 주된 목적처럼 보였다. 이 학문은 전반적으로 뻔한 성 고정관념들에 기대고 있는 분야였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보살핀다. 남성은 독립적이고 여성은 관계중심적이다. 남성은 공간을 갈구하고 여성은 친밀함을 갈구한다. 남성은 생산하고 여성은 생식한다. 남성은 재미를 보려 하고 여성은 애정 표현을 좋아한다. 남성은 전봇대와도 섹스하려는 반면 여성은 조신하고 성욕이 별로 없다. 남성은 여성의 젊음, 아름다움, 연약함에 끌리지만, 여성은 남성의 권력, 지위, 돈에 끌린다. 남성은 유전자에 바람기가 새겨져 있고, 여성은 정절이 새겨져 있다. 남성은 포르노에 흥분하지만 여성은 미세한 설렘에 흥분하기 때문이 긴 구애-꽃, 대화, 비싼 저녁, 멋진 이벤트-가 필요하다.(밑에 계속)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 사장님이 어린 여비서와 자는 동안, 속이 문드러진 그의 아내는 현명하게도 그것을 모른 척 하는 세계. 문제는, 이것이 덜 계몽한 시대의 남녀 관계를 비판하기 위해 설정된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p.16-17)

여성에 대해 다윈이 했던 말 가운데 압권은, 여성은 성욕이 거의 없는 천사 같은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현대 진화심리학은 이것을 여성들이 타고나기를 성적으로 소극적인 존재라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여성의 성에 대한 다윈의 평가에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이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진화심리학자들이 시인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대개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의 왜곡을 통해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다윈의 당대의 남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해도, 여성에 대한 그의 평결은 여전히 옳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싶을 정도로 이러한 평결에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는다. (p.18-19)

‘과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때 편리한 점은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비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진짜 과학과 조금도 닮은 점이 없을 때조차 그렇게 할 수 있다. (p.26)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생각조차 박해받지 않고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니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조신함을 기본 축으로 하는 성 문화를 예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단 이러한 예찬이 과학적으로 정당하다는 말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 (p.35)

한 과학 이론이 "수많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아마 문제가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이론일 것"이라고 러프가든은 지적한다. (p.58)

진화심리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여성은 조신하게 타고난다고 되풀이 하는 것은 여성이 조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님을 우리더러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속지 않는다. 나를 냉소주의자라고 부른다 해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타고나기를‘ 조신하다는 증거가 거의 없고, 따라서 이 주장은 처음부터 이념적 조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그 주장을 입증하는 데 쓰인 과학적 ‘방법‘은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사실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다. 이념을 세뇌하는 방식이 정확히 이것이다. 우리가 어떤 말을 자주 들을수록 그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처음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처럼 보이던 것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믿음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잊고,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여성의 조신함이라는 수사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p.83)

"많은 남성 과학자들이 여성들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인지와 선택이 불가능한 존재인 것처럼 썼다" (밀러의 말 재인용, p.87)

과학자의 성별에 많은 것이 달려 있는 과학 이론은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 물론 남성 과학자와 여성 과학자는 초점이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구자 개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과학 지식의 생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남성 과학자와 여성 과학자가 상호 배타적인 가설에 이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 과학자들은 여성들이 성적으로 소극적이라고 말하는 반면 여성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은 여성 과학자들이 "내부자의 시선으로 본 여성의 심리"를 남성 과학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 신호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여성이 똑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분야가 ‘내부자‘의 시선에 의존하는 과학이라는 가정에서 나온다. (p.89)

여성의 욕구에 대한 장에서 버스(욕망의 진화)는 자신의 연구에서 "상호 끌림 또는 사랑"은 여성에게 2.87점, 남성에서 2.81점을 받아 남녀 모두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자질로 밝혀졌음을 시인한다(이 연구에서 3.0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자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남녀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또한 버스는 조사 대상에 포함된 37개국 가운데 32개국에서 "배우자감의 열세 가지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중 하나로 남성과 여성 모두 친절함을 꼽았다"고 시인한다. 하지만 버스는 같은 장의 관련 절을 마무리하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과 친절을 요구하는 것은, 자식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원을 확보하는 중요한 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단정 짓는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남성과 여성이 사랑과 친절을 똑같이 가치 있게 여긴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들에서 어떻게 이러한 자질들이 여성에게 특히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 (p.102)

신뢰성이라는 자질에서도, 버스는 37개의 문화 가운데 21개 문화에서 남서오가 여성이 똑같은 선호를 보이고, 그리고 37개국 평균을 보면 여성들이 2.69, 남성들이 2.50점으로 이 자질을 남녀가 비슷하게 중요하게 꼽는다고 밝힌다. ‘정서적 안정 또는 성숙함‘의 경우, (모든 문화의 평균을 냈을 때) 여성들은 2.68점을 주고 남성들은 2.47점을 준다. 하지만 그 단락을 결론짓는 문장은 이렇다. "사실상 모든 문화에서 여성은 이 자질에 대단히 높은 가치를 둔다." 많은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이 그 자질을 거의 똑같이 평가한다고 인정해놓고, 동시에 그 자질을 가치 있게 여기는 쪽은 ("모든 문화에서")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순이다. 버스는 자신의 책을 읽는 비전문가 독자들에게 이런 식의 왜곡된 논리를 주입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제시한 모든 사례에서 그는 남성과 여성이 배우자에게 선호하는 자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음을 시인해놓고 갑자기 말을 바꾸어 특히 여성이 그 자질을 가치 있게 여기며 그들은 진화적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p.102-103)

나는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 이런 종류의 성급하고 부주의한 추론에 화가 난다. 버스는 열여덟 가지 변인을 조사한 연구에서 여성들이 배우자에게 바라는 자질들 가운데 교육정도와 지적 능력을 5위로 꼽았음을 강조한다. 그는 남성이 그 자질을 6위로 꼽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37개 문화 가운데 27개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이 지적 능력을 똑같이 높게 평가했음을 시인해놓고, 결론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사회에서 지적 능력이 높은 배우자를 선호한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자식들을 위한 사회적, 물질적, 경제적 자원을 홥고하는 데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현대 여성들은 모든 문화에 걸쳐 이러한 선호를 보인다"고 말한다. 표본의 거의 4분의 3에서 남성과 여성이 이 자질을 똑같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식의 특정한 성에 초점을 맞추는 논증("모든 문화에 걸친"‘ 여성에 대한 논증)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여성이 지적 능력이 높은 배우자를 원치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버스 본인의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많은 곳에서 남성 역시 그러한 배우자를 원한다. (p.103)

전반적으로 버스가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성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할 때조차 필사적으로 성차별화된 결과를 생산하려는 망상이 엿보인다. (p.103)

어떤 행동이 여러 문화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이 생물학적 본성임이 자동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버스의 저격수 중 한 명인 행동심리학자 린다 캐포라엘Linda Caporael의 명쾌한 지적에 따르면, "진화한 성차이를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 기반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성차이들과 구분할 방법은 없다." 남성과 여성은 "똑같은 선호를"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사회 구조가 성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동감한다. 그리고 나는 생물학적 힘을 문화적, 사회 역사적 힘과 분리할 수 없을 때 생물학적 본성을 내세우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적, 사회역사적 조건화의 경우와 달리 불변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본성도 진화하지만, 진화는 한 세대 내에 뭔가를 바꿀 만큼 빠르게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유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차이가 사람의 한평생 동안에는 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p.114)

버스는 마치 순결과 정절이 동일한 개념이라도 되는 듯 두 가지 문제를 융합한다. 사실 그는 순결-사전 성경험이 없는 것-이 결혼 이후의 정절을 예측하는 변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논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신앙심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모를까)아무도 결혼할 때까지 성생활을 미루지 않는 현대 서구 사회의 성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어떤 남성은 특정한 여성과 결혼하기 전에는 상당히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어도, 결혼하고 나면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성은 한 남자와 처음 만난 날 동침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문란해서가 아니라-그 여성은 이날까지 수년 동안 한 트럭분의 남성들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그녀를 진정으로 흥분시키는 남성이 마침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서 그녀가 ‘순결‘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부정을 미리 귀띔하는 징후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을 완전히 오판하는 것이다. (p.120-121)

인간의 성적 표현이 변화무쌍한 것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진화심리학이 그 모범 답안을 여태 개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못 놀랍다. 사실 모범 답안과 인간의 성 현실 사이의 괴리를 해결할 방법은 경험적 증거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밖에는 없다. 피임이 보편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 없이 섹스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무시해야 한다. 물론, 생식이 목적이 아닌 섹스에 눈을 흘기는 사회들이 여전히 있지만, 이유는 늘 종교적 또는 문화적인 것이다. 생식이 목적이 아닌 섹스를 ‘자연적‘ 이유로, 즉 사회역사적 문제와 무관한 이유로 꺼리는 사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많은 사회가 성-특히 여성의 성-에 제약을 가하는 데 그토록 열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성욕이 생식의 요구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p.145)

미첼은 두 개의 시내가 소용돌이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그 물줄기들이 만나기 전에는 각각을 분리해서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두 물줄기가 만난 뒤에는 그 안의 물방울들이 서로 섞인다. 이때부터는 소용돌이에서 물 한 컵을 떠서 각각의 물줄기에서 온 물방울들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성과 양육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p.149)

문화는 생물학적 기원을 갖지만, 일단 생기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생물학에서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 문화는 진화의 경로를 결정하는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p.150)

밀러가 인간의 성행동을 로맨틱 코미디로 보자고 제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 위한 ㅏㅇ의성뿐 아니라, 새로운 성적 관계를 맺을 때마다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각기 다르게 행동한다 …. 구애할 때 우리는 자기 생가겡 매력적일 것으로 여겨지는 배역 속으로 들어간다." (p.154)

밀러의 주장처럼, 어느 시점에 약간의 이타심이 배우자로서 매력적인 형질이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면, 요즘 사회의 평등주의적 사고방식이 번식 적응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밀러는 이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 같다. 그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악몽에서 벗어난 것은 유전적 진화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변화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잠시 진화론의 사고방식을 채택한다면, 나는 오늘날 평등주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 남자가 정기적으로 섹스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고 주장할 것이다. (p.159)

현대의 남성과 여성들이 평등주의적 역할 모델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이것이 그들이 현실에서 남녀관계를 경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이 그들이 경험하고 싶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와 텔레비전의 판타지 요소는 현대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공정하고, 품위 있고, 정서적으로 열린 관계를 원한다. (p.160)

나는 대부분의 독자보다 바람피우는 남자들-그리고 바람피우는 여성들-의 심정을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용서 운운하며 오버하지는 말자. 한 남자가 아내를 두고 바람피우면 그것은 그 남자 잘못이다. (p.218)

라이언과 제타는 이와 관련한 맥락에서, 1960년대에 멜라네시아의 한 섬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던 인류학자 윌리엄 데이븐포트William Davenport의 연구 결과를 만족스러운 어조로 보고한다. 이 섬사람들은 성적 고민이 별로 없었고, 모든 여성이 오르가슴을 충분히 느낀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파트너가 오르가슴을 한 번 느낄 때마다 여러 번의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보고했다. 데이븐포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면 남편들이 아내에게 흥미를 잃고 더 젊은 여자를 취하는데, 그 섬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섬의 아내들은 남편의 정부들을 지위 상징물로 간주했고, 남편의 혼외 섹스에 전혀 질투심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섹스 하기 시작할 때 그 아내들의 오르가슴을 잘 느끼는 몸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p.219)

나는 10년 동안 한 여성과 결혼 생활을 한 남성이 다양한 성경험을 찾아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단, 이 남성과 1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여성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자. 여성이 남성보다 욕구를 행동에 덜 옮긴다고 해서 욕구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러한 욕구에 대한 사회적 금지가 여성에게 더 강력하다는 뜻일 뿐이다. (p.220)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실제로는 당신의 성장에 장애가 될 때, 그것은 잔혹한 낙관주의와 관계가 있다. -로랜 벌랜트 Lauren Berlant 재인용 p.231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 결정이 ‘선택‘인 줄 안다. 하지만 생물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을 꾸려가는 가장 합당하고 가치 있는 방식이 결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복잡한 문화적 조건화 기제의 결과다. 그리고 내가 이미 강조했듯이 결혼하라는 설득은, 비교적 예측 가능하고 비교적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인구 집단을 생산하는 엄청나게 효과적인 수단이다. 간단히 말해, 결혼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생활을 덜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사람들보다 매일 아침(결근하거나 지각하지 않고)출근할 가능성이 높다. (p.242)

우리의 욕망은 사회적 조건화에 처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식민화될 수는 없다. 실제로 예로부터 욕망에 가해졌던 수많은 사회적 제약들-특히 여성의 욕망에 대한 제약드-은 그러한 욕망을 원천 봉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할 뿐이다. 욕망을 포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참는 만큼 불만이 생긴다. 그리고 키프니스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불만족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대로는 비판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강한 충동, 일시적 욕망, 새로운 생각으로 발전한다.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이런 견지에서 욕망의 불만족은, 인생에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다는 자각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것"을 떠올리면, 습관적인 삶의 기준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p.269)

젠더 프로파일링은 단지 생기를 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어 가기를 바라는 것을 딱 하나만 고른다면, 그것은 젠더 프로파일링이 관계를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임을 아는 것이다. 우선 무엇이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만드는가에 시선을 고정할수록, 우리는 사랑한다고 고백한 상대방을 포함한 타인들의 특이성을 볼 수 없게 된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타인들이 품고 있는 특이한 의심, 욕망, 고난, 불안, 불안정, 혼란, 갈망을 덮어버리고, 그럼으로써 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어렵게 만든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남성과 여성을 파넹 박힌 틀에 끼워 맞추기 때문에, 우리는 좁은 시야를 통해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고, 그 결과 어떤 한 사람이 남성 또는 여성 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천 가지 이상의 방식을 놓치게 된다. (p.283-284)

물론 집단적인 성 고정관념들을 빈틈없이 내재화함으로써 이러한 고정관념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조차 우리가 고정관념에 머문다면,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정관념을 포착한다면,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작은 통찰을 한 가지 제공할 때마다 무수히 많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고정관념이다. 그것은 고정관념이 조건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관념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의 관계는 얄팍한 수준에 머물게 된다.
나는 서로 존중하는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으며 값진 인생을 영위하려는 복잡한 일에, 판에 박힌 성 고정관념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p.284)

이분법적 사고가 폭력저깅 ㄴ것은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 중간 지대를 모두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특이하ㅗㄱ 비교가 불가능한 존재를 짓밟기 위해, 사람들을 두 개의 작은 상자에 깔끔하게 분리해 넣으려고 한다. 그리고 잘 맞지 않거나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을 무정하게 배제해, 부적절한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런 식의 사고가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이분법이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에 명료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이러한 사고의 억압적인 잠류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젠더 이분법의 경우,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여길수록, 그들은 더 불평등해진다. (p.286)

관계의 윤리학이란 어떤 부분은 영원히 얽힌 채로, 질퍽한 채로,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p.289)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는 항상 내 이해 능력 밖에 있기 때문에-그리고 확실히 내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정서적 투자의 안전을 보증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재앙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설계의 비극적인 흠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진정한 탐험으로, 진정한 발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숙한‘ 사랑은 연애에서 환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냉철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현실을 겨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관계 맺기라는 양가성의 땅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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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9-2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아주 후련했던 기억들이,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니 솔솔 돌아오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특히 이 문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생각조차 박해받지 않고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니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조신함을 기본 축으로 하는 성 문화를 예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단 이러한 예찬이 과학적으로 정당하다는 말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 (p.35)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다만 그게 과학적이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
나도 일정 정도 내 ‘주관‘에 휘둘린다는 점을 인정한다.
너도 그렇다는 걸 인정해라.
여자인 너의 의견 말고, 남자인 내 의견은 ‘객관적‘이라고 ‘과학적‘이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다락방 2018-09-20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주 재미있고 유익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잘 읽었어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잇은 또 얼마나 많이 붙였다고요!!

마리 루티의 이 책을 읽는데 다른 책 [하버드 사랑학 수업]도 떠오르더라고요. 문화, 사랑, 젠더 등에 관해서 정말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이해하는 학자구나 싶었어요. 이 책 에서는 진화심리학 때문에 빡쳐한 게 막 너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빡쳐서 내가 다 반박해주마!! 하고 화르르 불타오른 느낌이에요. ㅎㅎ

여기 말고 또 밑줄 그은 부분 있는데, 그건 잠시 후에 페이퍼로 쓸 예정이에요. 근데 너무 졸려서 페이퍼를 쓸 수 있을지..

아무튼 마리 루티 만세에요! 저 하버드 사랑학 수업 중고로 팔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시 사야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책장에 마리 루티, 리베카 솔닛, 정희진은 반드시 꽂아두는 걸로!!

카알벨루치 2018-09-2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리 루티가 마틴 루터로 첨에 보였다는 ㅋㅋㅋ

다락방 2018-09-20 16: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18-09-2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다락방 2018-09-20 18:38   좋아요 1 | URL
인용문만 잔뜩인 이 글 말씀이십니까!! ㅎㅎ 좋은 책입니다, 공장쟝님.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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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사용해보니 포스트잇 플래그보다 좀 더 단단해 나은 것 같다. 재구매 하는걸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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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8-09-1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사용전이에요 쓰던거 마저 써야 하는 병에 걸려있어서 ;ㅂ;

다락방 2018-09-17 15:12   좋아요 1 | URL
저는 한 번 더 써볼까 해요. 물론 아직 하나 다 쓴 것도 아니지만요. 그렇지만 마리 루티 책 읽고 있으니 아마 금세 하나 다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훗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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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등장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해도 결국은 인간애에 대해 말하는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읽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존재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회복하고 극복하게 도와주는 것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종류의 것이다. 작가가 그런 사람이라면 등장인물도 그러할 수밖에 없다. 시종일관 섬세하고 따뜻한 작가의 시선이 보여서 내내 기쁜 마음으로, 물론 초조해하기도 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라고 생각했다. 


'로스토프' 백작은 정부에 반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되는 벌을 받는다. 호텔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총살될 거라는 협박과 함께. 그렇게 호텔 안에서의 생활만 해야 하는 그의 나이는 서른셋. 


다행히도 그가 연금된 호텔은 매우 큰 호텔이었다. 세탁실과 재봉실이 따로 있고 레스토랑과 바도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숨겨둔 돈도 있었고 책도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만 살아야 하다니, 하는 절망 대신 그는 호텔에서의 삶을 잘 살아낸다. 물론 어느순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호텔의 옥상에 올라가 떨어지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때 호텔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는 불러내어 따뜻한 시간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자살을 조금 뒤로 미루게 된다.


그는 자신이 처한 한정적 상황내에서 그러나 긍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정함을 잃지 않고 친절을 베푼다. 나는 이 사람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결국은 잘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의 어린 딸 역시 그가 가진 장점-내가 알아챈 능력-을 알고 있었다.



"건배를 제안하고 싶어요. 제 수호천사이자, 아버지이자, 친구인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을 위해. 우리 모두에게서 장점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p.578)



다른 사람에게서 장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의 그런 성향은 결국 그에게 좋은 직장과 직장동료(그렇다, 그는 호텔내의 웨이터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좋은 친구와 좋은 애인을 주었다. 물론 좋은 딸도! 그가 그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했기에, 그 역시 그런 사람들을 얻게 된다. 그는 호텔 안에서만 생활하고 호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면서도, 그러나 그 누구보다 좋은 사람들을 사귀고 벗하게 된다. 그가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은 그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같이 나서서 도와준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위험한 결정에 있어서도, 저마다 기꺼이 돕기를 청한다. 


물론 그라고 실수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해서 지적을 받을 때면 기꺼이 인정하고 바로 사과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런 점이 그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는데 큰 영향을 줬을테다.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 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p.460)

 

바깥 상황은 시끄러운데 그가 호텔 내에만 있기 때문에 행운아가 된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면, 어디에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그 상황을 행운으로 바꿔놓았을 것이다. 


로스토프 백작은 몽테뉴를 장농받이로 꽂아두었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딸은 몽테뉴를 읽으려고 안나 카레니나를 대신 장농받이로 꽂아둔다. 책을 살아하고 책 읽는 것을 사랑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것은 내게는 정말이지 짜릿한 기쁨인데, 로스토프 백작은 종종 문학과 작가에 대한 찬양을 하는 통에 아주 즐겁게 읽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두꺼운 책에 나오는 사소한 일화들과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작가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이 책을 쓰는데 얼마나 오래 생각했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나는 이 책의 아주 많은 대화들과 일화들이 좋았지만, 마지막에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일렁일렁해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백작의 울음은 자신을 위한 울음이기도 했다. 마리나와 안드레이와 에밀과의 우정에도, 안나에 대한 사랑에도,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찾아든 특별한 축복인 소피야에도, 미하일 표도로비치 민디흐가 죽음으로써 젊었던 시절의 백작을 알던 마지막 사람도 함께 사라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카테리나가 부탁한 대로, 적어도 그는 살아남아서 기억해주어야 했다. (p.589)




세상에는 수많은 감정이 있다. 그중에는 내가 겪어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거다. 사람은 좀처럼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써준 작가라니, 작가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로스토프 백작은 서른셋에 호텔에 갇혀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고맙게도 그 안에서 새로운 우정들을 만들고 사랑도 만들었지만, 그를 지탱하는 데에는 호텔이 아닌, 호텔 이전의 우정도 있었다. 호텔 이전의 학창생활에 자신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그가 백작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서는, 로스토프 백작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친구가 호텔로 백작을 방문해야 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아는 친구. 시간이 흐르고 여러가지 사건이 섞이면서 백작은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백작은 운다. 친구의 죽음이 슬퍼서도 울지만, 자신이 호텔 이후에 사귄 좋은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 이전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자신을 위해 운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환경의 변화, 호텔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환경의 변화에 있어서, 그 전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견고하게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축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감정이 너무 손에 잡힐 듯해서 너무 안타까웠다.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로스토프 백작처럼, 자신이 사는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야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내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해주기 전에는 몰랐다. 그가 나를 만나서는, 환경의 바뀌기 전의 자신과 바뀌고난 후의 자신까지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자신을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라고, 이 만남이 그에게는 필요했다고 그는 내게 말했었다. 그가 그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그 감정에 어떻게 이름을 붙여야할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감정'이 있었던 거다. 나는 그런 감정을 그를 만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일상적으로 겪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모 토울스'가 바로 그 감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모 토울스가 그 감정을 백작의 입을 빌어 얘기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이 책을 사랑하기로 했다. 얄짤없다, 이 책은 사랑이다. 누군가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감정에 대해 얘기하다니, 이것만으로도 나는 작가에게 큰 감사를 보낸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나는 정말 좋았다고 쓰려고 햇는데, 쓰다보니 자꾸 개인적으로 흘러버리고 마네.



오늘 친구와 그런 얘기를 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아주 많은 것들이 아쉽고 슬프지만, 나는 자랑할 수 없는 게 너무 힘들다고. 나에게 일어난 좋은일, 자랑할만한 일을 얘기하고 싶다고.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나를 자랑스러워 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걸 할 수 없어서 너무 속상하다고. 몇 번 얘기한 적 있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고 싶다. 궁극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하는 내가 얼마나 뿌듯한 사람인지 느끼게 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에게 자랑스러움을 선사할 수 있는 좋은 사람. 그런 마음, 그런 바람이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고.



"내겐 너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음악원 경연 대회가 열렸던 밤이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최고의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안나와 네가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가 아니야. 그것은 바로 그날 저녁, 경연을 몇 시간 앞두고 네가 경연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p.609)




아, 정말 너무 좋지 않은가!

나는 백작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라서 눈물이 날만큼 좋다. 그 자부심이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해서이기 보다는, 그것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걸 알아채서라는 게 자지러지게 좋다. 네가 우승해서가 아니야, 우승의 여부를 알지 못함에도 도전하는 거, 그 용기가 너무 자랑스러워. 나는 이 말이 진짜 너무 좋은 거다. 


인생에 있어서 나는 그다지 많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아주 많은 사람들과 크게 또 작게 연결되어 살 수 밖에 없지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나 역시 그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 이것만 있어도 살아가는데 큰 좌절과 절망쯤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자부심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특출나게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서 오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어디가서 어깨 힘 뽝 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거, 진짜 너무 좋잖아. 그런데 그 어깨힘 뽝- 이 되는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환호 여부의 불확실함에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지녔어'일 수 있다는 거, 진짜 짜릿하잖아. 


이런 식의 감정을 적어내다니, 에이모 토울스, 사랑합니다. 



이런 문장들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살포시 쌓였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문장들을 나직하게 읽어주고 싶다. 밑줄을 그어놔야지. 언젠가 나의 조카가 내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을 때, 이 문장을 보고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또 접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리해도 이렇게 섬세한 작가가 될 순 없을 것 같아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교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지." 그가 말했다. "습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거나 아니면 활력이 주는 탓에 우리는 갑자기 몇몇 익숙한 사람들과만 사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지금 단계에서 너처럼 멋진 새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 ( p.153)

"이 로비에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운명인 것 같네요." 그녀가 말했다.
백작은 놀란 표정이었다.
"수치심이라고요?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수치심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은 눈이 멀었나 보군요."
그녀는 젊은 감독이 밀고 나간 회전문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쪽을 바라보았다.
"난 그 사람에게 술 한잔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내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할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백작이 말했다.
그녀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진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계단을 가리켰다.
"그럼 나와 함께 위로 올라가는 게 좋겠네요."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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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9-16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신다기에 기다렸습니다. ㅎㅎㅎ 아아 그렇군요. 그런거에요. 역시 인간은 줄을 꼬기도 하지만 풀기도 하죠. 읽을게용~~

다락방 2018-09-17 08:13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이 책은 제가 참 좋아라 하는 종류의 책이었어요. 저는 따뜻하고 예의바르고 다정한 인간이 나오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지켜보는 것도 너무 좋고요. 긴 소설이지만, 소소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세요!

지나 2018-09-1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만의 백작이 너무 인기가 많네요

다락방 2018-09-18 01:56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 그는 신사인 것입니다!
 
스티키 북마크 - 6 Colors

평점 :
절판


나는 예쁘지만 무용한 것들에 대해서 크게 애정이 없다. 나에게는 언제나 '쓸모'가 중요했다. 포스트잇 플래그는 나에게 그런 '쓸모'로 작용하는데,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쓸모 있으면서 예쁘다면, 그건 좋다!


덧붙여봤자 부질없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가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고 사고가 확장될 가능성이 넓은 사람이라면 나는 애정을 느끼는데, 그 사람이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면 그건 좋다. 그러나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으나 지극히 편협한 사고만 가지고 있고 배우려는 자세가 없으며 고집만 세고 안티 페미니스트라면, 나에게 그 사람은 하등 쓸모가 없고 관심도 없다. 나에게 외모는 언제나 '그 다음' 문제이다. '그 다음'이라기 보다는 사실, '별 상관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스티키 북마크는 너무 예쁘다! 생각한 것보다 사이즈가 작았지만, 그래서 나쁜 게 아니라 그래서 '어? 생각보다 더 예쁜데?!'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단순한지, 가끔은 예쁜 것만 봐도 기분이 확- 좋아지잖아!! 물론, 나에게는 쓸모가 그보다 앞서는 것이기에, 이 스티키 북마크가 '너무 예뻐서 기분이가 좋다' 했다가, 그 쓸모 때문에 점수를 깎아먹어 버리고 말았다.


쓸모..

쓸모란 무엇인가..

우리는 쓸모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 봐야 한다..


는건 개소리고요..


그러니까, 이 스티키 북마크는 예쁘다. 나야 어차피 책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은 부분에 포스트잇 플래그 붙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이것은 나에게 쓸모 면에서도 무용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붙여놓고 나면 예뻐!!



(검은책과 검은 배경이라 뭔가 예쁨이 잘 살아나지 않은 사진이군..유감...)



이렇게 예쁘고 쓸모도 있다면서, 그런데 왜 별이 세개냐! 그러니까 왜 나는 이번 구매를 마지막으로 이것을 다시는 사지 않겠다!! 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이것은, 나로 하여금, 쓸데없는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기존에 내가 늘 써오던 포스트잇 플래그는 색칠된 면이 길어서 더 안쪽으로, 나와있는 부분이 마구 접히지 않게 색깔있는 면을 안쪽으로 쑥- 넣어서 붙이곤 했다. 쉽게 말하면, 딱히 신경써서 붙이기 보다는 '여기가 내 밑줄 그은 곳이오'를 표시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 스티키 북마크는 색칠된 면이 딱 밖으로 나오기에 적당한 사이즈라서, 선을 맞춰 붙이고 싶어지는 거다!!




이렇게 책의 면이 끝나는 선과 색칠된 북마크의 선을 맞추고 싶어지는 거야. 아니, 그래야할 것만 같은 거야. 그래서 나는 이걸 붙이다가 뭔가 선이 안맞으면 다시 멈춰서는 떼어내고 다시 선을 맞추고 떼어내고 다시 선을 맞추고...

아니, 제기랄, 이거 왜이래 자꾸 삐딱해,

아니 내가 지금 책 읽다 말고 이것이 시방 뭐하는 것이여... 이러면서 빡이치고, 결국,


성질이 나빠지는 거다!!!!!


이 내가,

이 다정한 사람이,

다정하지만 사실 손으로 뭔가 차분히 해내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인지라,

빡이 쳐!!!!!!!!



그래서 다시는 안사기로 했다. 나에게 집착을 불러 일으키다니..나는 집착하는 사람이 아닌데(응?), 나를 집착하게 만들어서...똑바로 붙이고 싶은 이상한 강박에 시달리게 만들어서.....안사기로 했다 앞으로는.



나도 당연히 집착하는 게 있다.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가, '나에게 이런면이?!' 하고 화들짝 놀라게 만든, 그런 집착이 내게도 있어. 그런데 다른 집착을 늘려갈 수 없다... 북마크 똑바로 붙이기 집착 같은 것은 나에게 없어도 좋을 것... 그러므로 너는 이만 안녕...


너는 나에게 쓸데없는 집착을 불러일으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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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8-09-10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문서작업하는 직업이라 색깔배합은 물론 간격까지 집착하면서 붙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돌아갈 수 있을때 돌아가는게 좋죠 암.

다락방 2018-09-10 09:04   좋아요 0 | URL
아, 조언 감사합니다.
저는 워낙에 몇가지 강박과 집착을 가진 사람이라 더 늘려갈 수가 없어요. 돌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휘모리님. ㅋㅋㅋㅋㅋ
 
유럽 낙태 여행 - Journey for Life
우유니게.이두루.이민경 외 지음 / 봄알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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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반대한다'고 기독교는 말한다.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는 모든 신앙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애초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을 어떤 이유로든 반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천주교는 낙태를 합법화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뱃속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임신한 여성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을 않는다.



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이 책, [유럽 낙태 여행]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세상이 여자를 미워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종교만이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종교가 큰 축이 되어서 어떻게든 여자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구나. 이건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들이 찾아간 모든 곳, 우리가 흔히 선진국으로 알고 있고 여성의 인권이 이곳보다 훨씬 높을거라 짐작한 곳들에서도 그랬다. 종교는 정치랑 손잡고 여자들을 제맘대로 하고 싶어했다. 통제하려고 했다. 


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신은 애초에 무어라 말했을까? 동성애를 쳐죽어야 한다고, 낙태하는 여자는 타락한 여자라고 그렇게 신은 말했을까? 그랬기에 종교를 믿는 자들은 신의 말을 따르는 걸까?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연대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매달 있었던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각 지방에서 버스까지 대절해가며 와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자국의 여성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억압받는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위해서도, 페미니스트들은 할 수 있는 힘껏 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아일랜드, 폴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까지 날아가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듣는 여자들이 있고, 기꺼이 그들에게 시간을 내주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자들이 있다. 게다가 낙태가 불법인 곳의 여자들을 돕기 위해 낙태가 합법인 곳의 여자들이 손을 내민다. 읽다보면 각국의 절망스런 상황에 우울해지지만, 다 읽고나니 여자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연대하는한 세상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각국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실제 행동에 옮기고, 충실히 기록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일. 보통의 에너지로는 되는 일이 아닐텐데, 좋지 못한 환경들을 마주할지라도 기어코 해내어 독자들앞에 내어준 것이 감사하다. 나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여행하고 기록하고 출판해준 사람들 덕에, 다른 나라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책에 실린 이 사진이 너무 좋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동하는 중에 기차 안에서 저마다 마구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읽고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 애정을 느낀다. 책 읽는 모습에도 숑- 가버리지만 이렇게 쓰는 모습에도 반해버려..)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더 잘 싸우기 위해서 더 잘 알아야 하니까.




(유럽 낙태 여행은, 하노이에서 읽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읽었지만.)












플로랑스 모에르노는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로, 국가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지금까지 열여덟 권의 책을 펴낸 왕성한 학자이자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성들의 모임인 ‘제로마초‘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제로마초는 ‘성매매에 반대하는 남성들‘이라는 선언을 주창하는등 남성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남성들로 모인 단체다. 이들을 ‘남성 페미니스트‘가 아닌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성들‘이라 지칭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이틀 전 마르틴과의 대화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중에 "프랑스에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은가"를 물었을 때 마르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없어요.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자는 있지만." (프랑스, p.36-37)

유럽 내부의 연대에 대해서도 물었다. "다른 나라와도 협력을 하신다고 들었는데"라고 운을 떼자 그는 즉각 "페미니스트들과"로 정정했다. 국가적 협력이 아닌, 국경을 넘은 페미니스트들의 연대다. 스페인에서 낙태를 다시 불법화하려는 조짐이 보였을 때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의 열차‘라 이름 붙은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갔다. 폴란드에서 검은 시위가 있었을 때는 주 프랑스 폴란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런 식으로 어떤 나라의 여성 인권이 퇴행의 위협을 받을 때에 다른 국가에서 그 상황을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 유효한 전략이라고 그는 말했다. (프랑스, p.47)

낙태를 하는 여성은 갓 스무 살쯤 되어서 아무 남성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하는 이로 그려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기혼자가 낙태를 더 많이 한다. 이런 현실을 더 많은 이가 직시해야 한다. 한국의 통계도 마찬가지다. 임신 중절 수설을 받는 여성 가운데 기혼 여성의 비율이 언제나 더 높았다. 1971년부터 플라닝 파밀리알에서 일했던 플로랑스가 주로 만났던 이들도 아이를 이미 너무 많이 낳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고 찾아오는 부부였다. 이러한 현실을 토대로, 잘못 만들어진 이미지를 부수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여성들의 무분별한 성행위와 그에 따른 낙태‘라는 이미지에는 쾌락적인 성관계에 형벌로서 임신을 뒤따르게 하겠다는 징벌 심리가 분명하게 깃들어 있어요." (프랑스, p.46-47)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새로 맥주를 한 잔 더 시킨 뒤 아들린이 좀 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아들린에게로 귀를 기울였다.
"다들 연애를 어떻게 해요?"
듣자마자 그의 심각한 마음이 너무 이해되어 웃음이 터졌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뭐든 설명해주고 이해시키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거두절미 공감했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접할수록, ‘과연 남성과의 연애, 가능한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마저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음, 저는 거의 포기했어요. 애인이라고 해도 모든 걸 설명해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만 알면 좋을 것 같아요."
깊이 공감되는 데 반해 해줄 수 있는 답은 신통치가 않았다. (프랑스, p.56)

민경의 친구여서인지 엘리즈에게는 궁금한 것들을 더 편안하게 물을 수 있었다. 아들린과 비슷한 나이대인 엘리즈 역시 길거리 성희롱이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사안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게 별 거 아니라고들 하지만 한 번 길을 지나가는데 대여섯번씩 똑같은 일을 겪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지."
그리고 이어진 말도 아들린의 고민과 닿아 있었다.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이 문제가 나한테 얼마나 큰지 설명하는 데 힘이 많이 들어서 피곤해." (프랑스, p.61)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보다 보수적인 스페인을 본받아 낙태를 불법화하자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낙태가 합법이긴 하지만 낙태 수술을 받을 병원을 찾는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한다. 의사에게 낙태 수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수술 거부를 하지 않더라도 12주를 넘겨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엄연히 불법임에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프랑스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프랑스, p.62)

사과주 한 병을 다 비워갈 즈음, 늘 궁금했던 것을 엘리즈에게도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낙태권을 갖게 된 건지 학교에서 배웠어?" 엘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학교에서는 안가르쳤을 걸. 나는 아마 어디서 우연히 들어서 알았던 거 같은데."
주어지지 않은 권리를 거머쥐고자 싸웠던 과거를 배우지 않으면 과거와 현재는 단절된다. 투쟁 이전을 살지 않았던 이들에게 권리는 태초부터 있던 것, 확대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것으로 남는다. 특히나 여성의 권리를 걸고 싸운 투쟁의 역사는 우연한 기회가 아니면 잘 전해지지 않는다. (프랑스, p.65)

그는 31살 때 임신을 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사비타는 일을 그만두고 인도에 있는 그의 양친을 초대했다. 그러나 임신 17주째인 10월 21일, 심각한 등 통증을 호소하며 골웨이 대학병원을 찾았고 의사로부터 태아가 생존 가능성이 없으며 이미 유산이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비타는 병원에 임신 중절 수술을 거듭 요청했으나 태아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어 불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곳은 가톨릭 국가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10월 24일, 태아의 심장박동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사비타의 몸에서 죽은 태아를 제거하는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패혈증에 걸렸다. 유산 중에는 자궁 경부가 열려 여성은 감염에 보다 쉽게 노출되고 유산 기간이 길어질수록 감염 확률은 높아진다. 사비타의 남편에게 의사들은 부인이 젊으니 곧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28일 사망했다. 사비타를 살릴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의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비타가 인도나 영국에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 여성들은 국가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똑똑히 확인했고, (아일랜드, p.115)

분노했다.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사비타의 죽음을 추모했고 추모 물결은 정치적 흐름이 되었다. 사비타 사망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만난 ARC와 로자를 포함헤 아일랜드 여성의 재생산권 운동을 하는 페미니즘 단체가 다수 생겨났다. (아일랜드, p.115)

섹스를 해서 즐거움을 누렸다면 아이를 임신해서 그 쾌락에 대한 죄를 치러야 한다는 이 가톨릭 관념에서 탄생한 끔직한 실례가 바로 ‘막달레나의 세탁소(The Magdalene Laundries)‘다. 막달레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이 시설은 "몸을 버린 여자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가톨릭 시설로, 18세기(1765년)부터 20세기(199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 여성들은 섹스를 했거나, 강간당했거나, 아기를 낳았거나, 아니면 그냥 너무 예쁘다거나 하는 이유로 납치당해서 이곳에 수용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더럽혀진 몸과 죄를 씻는다.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예쁜 사람은 필연적으로 오만해질 것이므로" 막달레나 세탁소에 끌려간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이 세탁소를 거쳐 간 여성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3년 이 시설 중 한 곳에서 시신 155구가 암매장된 묘지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막달레나 세탁소의 폐쇄성과 각종 문데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고 2013년에 국가 차원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운영해온 것은 가톨릭 세력이었지만 은밀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p.121)

"검은 시위를 계기로 겨우 이게 정치적 의제가 됐어요. 지금까지 정치에서 낙태나 여성 인권은 늘 뒷전이죠. 민주화가 완성되면 얘기하자, 경제가 더 좋아지면 얘기하자는 식으로요. 하지만 이제 낙태는 분명히 메이저 이슈예요."
전면 금지 법안 발표와 그 법안이 내포한 끔찍한 통제에 들불처럼 일어났던 여성들은 이제 그저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권리는 점점 더 위협당할 뿐임을 경험으로 첨예하게 인지하고 있다. 검은 시위 이전까지 재생산권이나 모성, 양육 등 여성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주제들은 계속 진퇴를 반복할 뿐ㅇ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공공에서 이야기되고 있으며 나아져야 한다는,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공유된 열망이 있다. (폴란드, p.194-195)

보수집권당의 전면 금지 법안이 발표되자마자 수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유산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 여동생이 범죄를 당해 임신을 했는데 의사들이 그를 돕지 않으리라는 것, 여성들이 건강하지 못한 태아를 가져서 죽을 수도 있을 때 의사는 여성을 돕지 않으리라는 걸 안 거예요. 여성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국가가 여성 시민의 편이 되기는커녕 현실과 괴리된 명분을 위해 그저 통제하고 처벌하리라는 데서 공포를 느낀 거죠."
국가와 사회가 여성이 아니라 태아를 도우리라는 공포. 수많은 폴란드 여성은 낙태 전면 금지 법안에서 그것을 읽어내고, "목숨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폴란드, p.196)

"우리는 두렵지 않다, 혼자가 아니다. 그날 우리는 그저 그 공간을 주장했어요. 바르샤바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모습. 내게는 그게 강력했습니다."
마디마디 힘주어 말하는 우르술라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가 전해주는 검은 월요일 당일의 바르샤바를 상상하며, 그리고 그의 어조에 우리는 울컥했고 넷 중 세 명이 눈물을 찍어냈다. 국가의 폭력 앞에서 여성들은 들고 일어났고, 서로를 보고 힘을 얻으며 혼자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 경험은 폴란드 여성들 그리고 활동가들에게 선명한 자산으로 남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 p.199)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정치적 보수파와 결탁해 공교육과 공공기관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톨릭 이념은 사회적 인식 전반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폴란드 사회에서는 낙태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낙태 전면 금지화 법안 발의 전 가톨릭교회는 자원활동가를 조직해 낙태 반대 캠페인을 했고 그들을 지원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지역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낙태를 하는 여성들조차 낙태는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죄이며 낙태라는 행위가 여성에게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안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죄악시는 낙태뿐만 아니라 피임에도 해당된다. 폴란드에서 여성이 피임약을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은 폴란드에 오면서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였다. 낙태가 불법이고 실제로 낙태 수술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다면, 피임이 매우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교육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폴란드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폴란드, p.202)

폴란드의 가톨릭적 교육과 이념은 피임 또한 낙태와 같은 의미에서 죄라고 치부한다. 피임약을 구하는 과정은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피임약 처방을 해주는 의사를 찾아야 하고, 처방을 받으러 간다 해도 피임약을 원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비난하거나 무례한 언사를 하는등 수모를 겪는 일이 흔하다. 한 번의 처방으로 약을 계속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약값 자체도 비싸다. 이런 식으로 폴란드 사회는 여성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주면서 피임과 낙태, 즉 여성 당사자의 재생산권 행사를 막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신앙 있는 이들은 실제로 피임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이 나왔다. 여성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몸과 인생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검은 시위를 전후로 변화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런 매커니즘은 이 나라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폴란드, p.202-203)

놀랍지 않게도, 사후피임약도 마찬가지다. EU에서 사후피임약 구입에 처방전이 필요한 나라는 폴란드와 헝가리 뿐이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도 2년 전까지는 처방전 없이 사후피임약을 구할 수 있었다. 사후피임약을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도록 명시한 EU의 권고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역행한 셈이다. "왜?"라는 우리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에는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실소가 났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만약 여성이 ‘응급피임약을 사탕처럼 먹으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사후피임약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어느 여자가 한 알에 100즈워티(Zt)나 하는 사탕을 먹겠어요. 그런데 정말로 저렇게 말하면서 처방전을 도입했죠. 그들은 여성이 자기가 원하는 사탕을 먹을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아요. 원하는 사탕을 양껏 먹을 수 있는건 남자뿐이죠. 여자는 안 돼요."
한편 폴란드에서 비아그라를 사는 데는 처방전이 필요 없다. 비아그라는 몸에 유해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때문에 미국이나 독일에서도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폴란드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이 사탕을 제한 없이 허용하고 있다. (폴란드, p.203-204)

낙태를 금지하면서 피임도 금지하는 나라. 계속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이것이 폴란드의 현재였다. 그리고 그 기반엔 가톨릭 이념이 있다. 생명은 신이 주는 것이므로 인간은 성행위 이후 즉 재생산을 스스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낙태와 피임을 둘 다 죄악시하는 폴란드의 현실이 이 이념에 충실한 결과라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정자와 난자부터가 이미 생명의 씨앗이라고 하지만 남성의 자위는 처벌되거나 비난받지 않는다.
"모든 건 여성을 통제해요. 남성이 아니라요. 가부장제와 가톨릭은 여성에게 그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으려 해요." (폴란드, p.204-205)

우르슬라는 우리의 책에 행운을 빌어주며, 임신 중단은 당연히 얻어내야 할 권리임을 다시금 강조했다. 임신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생겼을 때 여성은 자신의 삶을 위해 당연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여성 개인은 자신이 임신할 일이 없다 생각한다 해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어, 나는 레즈비언이지만, 낙태권은 가져야 해요." (폴란드, p.209)

꽤 신중하게 이어진 그의 답을 간추려보자면, 폴란드 남성들은 임신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더라도 피임을 하는 것을 "꺼린다".
여성이 "알아서 어떻게든 임신을 피하기를" 바란다. 거기까지 듣고 우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자 카타지나는 우리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짓을 하며 덧붙였다.
"가톨릭 기반 교육은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남성의 정액은 축복(blessing)이며 여성의 건강에 좋다‘고." (폴란드, p.214)

유명한 여자들이 낙태가 불법인 와중에 ‘나도 낙태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후헤 보비니 사건이 있었죠. 열일곱 살 아이가 강간을 당해서 임신을 해 낙태를 하려고 한 건데 낙태 시술을 한 사람과 조력한 사람들, 그러니까 아이와 아이 엄마를 포함해서 다섯 명 정도가 죄다 법정에 선 거예요. 이 사건으로 여론이 모였죠. 그러자 이번에는 300명 넘는 의사들이 서명을 했어요. 낙태 시술을 한 걸로 처벌이 되니까, 의사들이 다들 ‘나도 낙태 시술 했다‘고요. 사실 한 적 없는 사람들도 성명에 많이 참여했는데, 너무 많은 수가 이렇게 나오니까 법을 적용할 수가 없었어요."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p.228-229)

"그리고 베유법이 통과됐죠. 베유는 남자로 가득한 국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직후에 욕을 무지하게 먹었어요. 웬걸, 나치라고 욕을 먹었다니까요."
베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당시 베유는 의원 490명 중 481명이 남성인 국회에서 낙태를 합법호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연설 직후 그에게 욕이 쏟아졌으나, 막상 법을 통과시키는 데는 우파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불법 낙태를 하면서 여성들은 과한 출혈,감염, 질병을 감수해야 했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렀다. 낙태를 한 뒤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쨌든 여성들은 낙태를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았던 거예요."
그렇게, 프랑스 사회는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일종의 ‘합의‘에 도달했다.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p.230-231)

임신 중단권은 여성이 시민권 문제이면서 원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폴란드의 우르술라가 말했듯 이는 존엄하고 고통 없는 삶의 문제다. 가톨릭의 모순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정말 배아를 생명으로 보고 소중히 여긴다면 배아의 수정에 참여한 남성에게는 왜 죄를 묻지 않는가? 남성은 왜 피임을 기피하는가? 남성을 위한 피임약은 왜 진작 상용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단죄와 처벌이 여성을 향하는가. 자신의 몸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라면 여성의 모든 선택에 대한 자유는 늘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맺는 글,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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