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커플과 중년의 커플 그리고 노년의 커플이 나오는데, 셋 중에 노년 커플의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이제 65세인 남자와 60세인 여자가 만나 새로이 시작되는 이야기. 남자는 독일에서 대학 교수였는데 이제 그리스로 와 정착하기로 했다고 한다. 여자는 전업주부로 살고 있었지만 매우 우울했다. 예순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다정한 관계가 될 수 있다니, 그게 너무 좋았는데, 그래서 이들이 이대로 함께여도 좋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했다. 더이상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움직이는 삶. 여자는 영어에 서툴렀고 독서에 그닥 취미도 없었지만, 천천히, 남자가 주는 책들을 읽기 시작한다. 여자는 '나는 사랑이야기가 좋아요' 라고 말했는데, 남자는 '나도 사랑이야기가 좋아요' 라고 하더라. 이런 대화도 좋다. 사랑 이야기가 좋다고 말하는 남자라니, 이런 거 너무 좋아.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부끄럼이 없이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궁극적으로 사랑을 하고 살거면,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로맨스 소설 같은 거, 여자들이나 읽지' 하는 남자들보다 백배는 더 연인으로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사랑이야기 같이 읽고, 같이 보고, 그러고 같이 사랑에 대해 얘기 나누는 거 너무 근사하지 않나. 어쨌든 그렇게 남자가 주는 책들을 즐거이 읽었는데, 어느 날엔 남자가 여자에게 영어로 써진 책을 주는 거다. 여자는 영어에 서툴고 잘 못하므로 나한테 영어로 된 책을 주면 어떡하냐고 하지만, 남자가 자신과 함께 읽자고, 어렵지 않을 거라고 격려하고, 이에 여자는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뜻을 써가며 즐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한 장 한 장 읽는다. 아 너무 좋아. 나는 왜이렇게 새로운 걸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흠뻑 빠지는 지 모르겠다. 여자가 서툰 영어 원서를 읽는 게 너무 좋아서, 나도 얼른 집에 가서 영어 원서 읽어야지, 천천히... 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결심했지만, 집에 오기가 무섭게 콩나물 불고기를 해먹고 와인을 마시고 취해서 잠들었으며, 그 뒤엔 원서를 읽겠다는 생각마저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인생...
중년의 커플은 여자가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헤어스타일이 진짜 너무 예쁜 거다. 게다가 까칠한 성격도 마음에 들고. 그러나 너무 냉정하달까, 그래서 남자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러니까 남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여자는 우울증을 앓고 약을 먹는게 '약하다'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 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이에 남자는 말한다.
'니가 밤에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들어와서 너를 흔들어 깨우고 마구 때리고 집어 던진다고 생각해봐. 지금 우리 그리스 사람들은 다 이런 상황에 놓인 거라고.'
그러자 여자는 그 말을 가만 다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밤에 자고 있는데 그 '누군가'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니가 문을 열어놓은 건 아닐까? 문단속을 잘 하지 않은 건 아닐까? 누가 침입했을 때 너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잖아?'
여자는 북유럽 사람이고 그리스에 출장차 왔다. 회사를 합병하기 위해 온 사람인데 남자의 회사를 맡게 되고 인원을 감축한다. 약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했던 여자고, 우울증 약을 먹는 걸 이해하지 못한 여자였지만, 한 회사의 근로자들을 자꾸 해고하면서 이제 자신이 약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 약을 먹고 불안해하고 견디지 못하는 감정에 휩싸이다가 회사에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게 주어진 일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 여자는 내가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배우였는데, 너무 예쁘더라. 짧게 자른 머리도 너무 잘 어울리고 키도 훌쩍 큰 거다. 헤어스타일이 나랑 비슷한데 키는 내 두 배고 몸무게는 내 절반인건가... 자괴감이 드는 마음에 이 배우를 검색창에 넣고 검색했는데, 몇 편 안되는 영화를 찍었고 거기에 내가 본 영화는 없더라. 그리고 키가 175센치라고 나와 있었다. 우와... 크다.....멋져. 집에 와서 거울을 보았다. 내 헤어스타일과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크게 차이가 없는데, 그런데 그녀는 그녀이고 나는 나인 것은, 키 때문인가..... 나이도 나랑 별로 차이 안나던데......하다가, 아아, 그녀가 금발이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 내렸다. 다를 게 뭐람? 눈에 띄는 차이는 뭐, 키 조금에다가, 금발이지 뭐. 나는 갈색머리, 당신은 금발..이것이 우리의 차이...
헬로우 스트레인저.
헬로우 북유러피언.
아 임 코리언....
자 가장 젊은 커플의 이야기로 가면, 여자는 대학생이고 그리스의 경제위기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저마다 이민자들 탓이다를 얘기하는데, 얼마전에 성폭행을 당할 뻔한 여자주인공을 구해준 것은 이민자 였다. 그녀는 토론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민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이 이 나라를 떠나야 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자는 그 이민자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이민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본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민자들에 대해 정부가 손 놓고 있으므로 본인이 직접 이민자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단체에 소속된 채 길에서 이민자들을 내쫓고 때리고 급기야 총을 들고 그들을 찾아가기도 한다. 정부도 손 놓고, 아내랑 자식은 현실을 모른다고 광광 울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의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그 일이 그렇게 자랑스럽다면 왜 당신 자식들한테 당당하게 그런다고 말하지 못해? 왜 숨겨? 당신도 알고 있는 거야.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나 역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아무리 혼자 소리쳐봤자 남들에게 숨겨야 하는 거라면, 그 일이 정말 '잘하는' 일인걸까?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나서는 너 사랑해, 오천번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 대신 자꾸 숨긴다면, 그것은, 사랑일까?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없고, 누군가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알까봐 숨기게 된다면... 그건 대체 뭘까? 일이든 사랑이든 그게 뭐든, '응 그것이 내 선택이었어' 라고 당당히 말하는 대신, 누가 알까봐 자꾸 꽁꽁 숨기는 거라면, 그것은 그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걸 뜻할 것이다.
여자는 시리아에서 온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둘이 만나서는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만, 학교에 가서는 '결국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시리아에서 온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의 엄마에게만 말한다. 나는, 엄마에게도 말하고 아빠에게도 말하고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조카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사람이야, 하고. 그리고 상대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 망설임과 고민이 없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숨겨야 하는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은 그냥 안하는 게 장땡이다. 사랑 안해도 인생 너무 재미있고요, 할 것도 많습니다. 맛있는 것 먹고 마시고 살아도 인생은 쏘해피해피야~ 사둔 책 읽으면서 지내도 시간은 잘만 흐르고요~
영화는 별로였다. 나는 그리스를 보고 싶었는데,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보고나면 그리스 가고 싶다고 열병을 앓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의 풍경에 대해 기억나는 건 별로 없고, 그리스가 경제 위기로 많이 어렵구나, 하는 것만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난민들에게도, 직장인들에게도, 그리고 가정에 까지도, 당연하지만, 아주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아름다운 그리스를 상상하고 그걸 보고 싶었던 건 나의 로망이었던 거다. 실제로 그리스든 어디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현재를 살고 삶을 산다. 당연히 아름다운 풍경 대신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우울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질 것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 신경질적인 사람들, 우울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웃고 사랑하는 시간들까지. 여기에는 풍경보다 더 리얼한 삶이 있는 것이다. 여행객의 시선과 그곳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속에서 65세 남자가 60세 여자에게 읽으라고 주는 영어 원서의 제목이 《second chance》인데, 알라딘에도 아마존에도 검색되지 않는, 오래된 책인 것 같다. 네이버 검색해보니 'k simmons' 작가의 책이라는데, 알라딘에 검색하면 '다니엘 스틸' 책이 나오네. 나는 그냥 이 책이 그 책이다, 생각하고 다니엘 스틸을 읽어볼까...다니엘 스틸은 로맨스 소설의 대표 작가잖아... 그러고보니 내가 산드라 브라운은 많이 읽었지만 다니엘 스틸을 읽진 않았던 것 같아... 아, 지난 번에 읽겠다고 원서 샀다가 다시 팔았지.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 인생은 뭐지? 왜 샀다가 안읽고 파는 짓을 하는거지? 이번에도 또 사면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그냥 사지 말아야겠지?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