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마'는 부정의 언어인데, 살면서 이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느낀다. 부정의 언어여서일까, 이 말을 하는 것은 극도의 피곤을 준다. 성추행 하지마, 성폭행 하지마, 여성비하 하지마, 몰카 찍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어제는 회식이었는데 나보다 나이 많은 부장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더라. 하아- '싫다'고 했더니 자기 나이 또래랑 사귀다 크게 상처 받았냐고 한다... 뭐래, 이 병신이.. 하아-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어리다는 이유로 호칭이나 반말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하고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그렇게 취급 당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음에도 말귀를 못알아들어.. 그래서 결국엔 화를 냈다. 싫다는 데 왜 자꾸 강요하냐고. 그러다보니 내게 곤조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맏딸이라 그런가보다며 자기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내고자 한다. 내가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타당한 이유... 싫어서다, 그냥 싫어서라고, 싫어!!
20대의 젊은 남직원은 내게 누나라고 부르더라. 그렇게 부르지 말랬더니 누님이랜다. 말귀 못알아쳐먹는 놈이 하나 또있네. 그렇게 부르지 말라구요, 라고 하자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런다. 내가 그런 거 알려줘야 하냐... 하아.... 한숨났지만 알려줬다. '차장님이라고 불러요'...................
며칠전에는 회사 행사에 일 많아 참석 못하는 여직원들을 서빙하라고 임원들이 부르는 걸 보고 행사 참석하는 남직원들 있으니 남직원들 시키자고 말해야 했다. 이런 거 일일이 알려주고 아니라고 말해야하고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게 진짜 극도로 피곤하다. 어제 회식자리에서도 젊은 남직원이 '제가 원샷하면 절 예뻐해주시나요?' 이런 개드립 치고 있길래, 아니라고 그걸 왜 원샷하냐고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말해줬다. 자꾸 몇학번이냐고 물으면서 내동생이 너보다 나이 많다 이런 말을 하는 부장에게 그래서 뭐 어쩌라는거냐 자꾸 말하는 것도 피곤. 즐거운 자리여서 즐겁게 먹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결국엔 극도의 피곤이 몰려오더라. 왜 나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하지마, 그러지마, 싫어, 를 말해야 할까. 피곤해..
2차를 파하고 나오려는데 다른 여직원 하나가 내게 달려와서 나를 막 안는다. 차장님, 저 차장님하고 언제 또 술마실 수 있어요? 이러면서 막 안아. 피곤에 쩔어있던 나는 **씨가 술 살 준비 되면 불러, 라고 했는데 이에 그 여직원은 '차장님께 술은 언제든지 살 준비가 되어있어요' 라더라. 술집에서 나와 걷는 길에는 여자과장1이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저 남자부장은 술만 마시면 저러는데, 그나마 차장님이니까 함부로 못하는거지 우리끼리만 있었으면 벌써 달랐을 거에요, 한다. 요즘엔 여자들하고 이야기하는 게 좋고 여자들하고 술마시는 게 좋다.
내가 했던것처럼 싫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곤조 있게 행동해야만 말귀 알아듣는 척 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건 진짜 피곤하다. 어제는 2차를 나오면서, 아, 이놈의 직장생활 더럽게 피곤하다, 생각했다.
직원들과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려다가 극도의 피곤함으로 실신할 지경, 스트레스가 폭발할 것 같아, 나 혼자 반대로 걸어서는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서는 칠봉이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얼마나 피곤했는지를 하소연했다. 결국 나는 칠봉이에게, '아 이놈의 남자들 진짜 피곤해' 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전화를 끊자 택시기사님께서 웃으시면서 '그놈의 남자들 죄다 한강물에 빠뜨려버려요' 하신다. 같이 웃었다.
그나마 직장생활을 십년이상 해왔고 또 워낙에 싫다는 말 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쎈성격이라서 이정도인데, 싫다는 말 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겐 조직에서 여러 남자들과 함께 일하는 일이 더 피곤하겠다고 느껴졌다. 아니, 일일이 싫다고 말하는 내가 더 피곤한건가.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싫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막 대하는 사람도 싫다. 어리고 약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알고 있는 지식만 늘어놓으며 맨스플레인 하는건 더 꼴보기 싫고(걔네도 잘못했지만 너네들도 잘못했어! 라고 말하는 꼴이라니 -_-). 결국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노력이나 의지 없이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인데, 그걸 계속 설명해줘야 하는 게 앞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의 과제가 될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이 하지마, 싫어, 안돼, 를 말하며 살게 될까. 부정의 언어를 말하는 건 듣는 사람에게도 하는 사람에게도 몹시 피곤한 일인데.
요즘에는 벨 훅스 가 책에서 말했던 바가 자꾸 생각난다. 최근의 책에서 그녀는 '여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여자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거다. 좀 극에 치달은 주장이 아닌가, 라고 책을 읽을 당시에 생각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이지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된다. 아, 물론 모든 여자들이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남자가 보는 시선에 길들여져 커피 사먹는 여자를 사치한다 욕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개념녀 프레임에 갇혀서 남자가 보기에 개념녀로 인식되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얼마전에 친구가 여자는 나이들수록 남자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고 결국 여자를 원하게 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는데, 나도 그럴 것 같다.
성적 관계 혹은 낭만적 관계를 이성애로 시작한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상대 남자를 바꾸는데 지쳐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훨씬 쉽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책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