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작은 바다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노르망디에 있는 옹플뢰르 항구의 썰물 때 풍광을 그린 그림이다. 언젠가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 황토색과 연노랑과 푸르스름한 빛깔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 그림 역시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p.263)
꺅 >.<
오늘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저 부분을 읽다가 급반가웠다. 설연휴가 시작하던 날, 나는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전시회에 다녀왔고, 그 전시회의 주제가 '노르망디' 였던 거다. 게다가 옹플뢰르 라면, 그 전시회에서 빈번하게 마주쳤던 이름이 아닌가. 썰물 때 풍광을 그린 그림이라는데, 나는 '밀물'이란 제목의 그림을 본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썰물 이란 제목의 그림도 있었던가? 갸웃갸웃. 여튼 내가 '아는' 무언가 나온것 같고, 그게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인 '그림'과 관련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오, 역시 아는게 많을 수록 보이는 게 많구나. 그저 스쳐지나갈 문장인데, 나는 그날 전시회를, 옹플뢰르를, 밀물을 떠올렸잖아. 그 전시회에 나보다 먼저 다녀온 동료가 '외젠 부댕'이란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고 해서 나와 대화를 나눴었는데, 아, 저 소설속 등장하는 그림은 외젠 부댕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 노르망디, 옹플뢰르, 썰물, 황토색, 연노랑....이건 외젠 부댕이잖아? 그래서 해당하는 그림이 무얼까 폭풍검색질을 해보았다.
황토색과 연노랑, 그리고 무엇보다 '썰물'이란 단어가 들어가니 아마도 이 그림이지 않을까, 싶긴한데, 으음, '푸르스름한 빛깔'이 이 그림엔 적지 않나? 이 그림이 아닌가? 일단 가장 확률은 높아 보인다.
이것이 내가 전시회에서 보았던 '밀물' 이었다.
이건 '해안에서' 라고 되어있으니 항구의 풍경을 그렸다는 인용문과 좀 어긋나지만, 황토색과 푸르스름한 색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저 맨 위의 썰물녘 풍경보다 이 그림이 더 좋다.
이번 전시회에서 느낀건데, 나는 그것이 그림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드러나는 게 좋다. 사진을 봐도 그림을 봐도, 내게는 사람이 중요했고, 인물이 들어간 것들만이 내 흥미를 끌었다. 아무리 멋진 풍경이어도 그 안에 인물이 없다면 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거다. 그림 속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어울렸을까를 들여다보는 게 나로서는 흥미로운데, 인물이 없다면 나는 생각할 무엇도 없는 거다. 나는 '그림'을 보고싶은 게 아니라, 그저 인물을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젠 부댕은 풍경을 많이 그렸고, 나는 그래서 외젠 부댕의 이름을 딱히 외우지 않았다. 동료는 외젠 부댕이 전시회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책 속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황토색과 연노랑의 비율이 좀 적지 않나 싶다. 그래도 멋진 그림임에는 틀림없지만.
내가 이 전시회를 가고자 했던 이유는 이 전시회의 포스터 그림을 보고 싶어서였다.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Vittorio matteo corcos)'란 화가의 「작별(Farewell)」이 그것인데, 와- 너무 근사한거다. 나는 페어웰, 이라는 제목조차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건 뭐, 제목 하나로 한 방에 끝나잖아? 이 그림이 너무 보고 싶어서 굳이 전시회를 갔던건데, 전시회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 이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중간을 좀 지나서 볼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 그림을 보고 싶은데 좀처럼 나오질 않아 막 초조했더랬다. 이 그림 언제나오지? 나는 친구에게 자꾸만 물었던거다. 그리고 이 그림을 마주쳤을 때, 아, 얼마나 좋았던지. 손과 양산까지 섬세한 디테일하며, 정면에서 얼굴의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이별중인 표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 그림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전시된 그림을 다 본 후에 친구에게 '우리 그 그림 한번만 다시 보자' 하고는 다시 돌아가 이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은 내 생각보다 컸고, 그 큰 그림이 좋았다. 만약 내가 집에 그림을 걸어두게 된다면, 그건 이 그림이었으면 싶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엽서를 사는 시간을 나는 너무 좋아하는데, 당연히 이 엽서를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없더라. 아, 전시회 마지막 날이라 다 팔렸는가보다 하고 시무룩해하며(다락방이 시무룩, 다무룩) 꿩대신 닭인 엽서를 몇 장 사들고 계산대로 가, 페어웰 엽서는 다 팔렸나요? 물었다. 뻔히 안보이는데도 물었던 건 일종의 아쉬움 때문이었는데, 아뇨 그건 저작권문제 때문에 엽서로 만들지 못했어요, 라는 대답을 들었다. 아, 그렇구나. 묻길 잘했구나 싶었다. 뭔가 안도하게 됐달까. 하하
그래서 이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화집을 사고 싶어졌는데, 알라딘에서는 당연히 검색되질 않았고, 그래 간만에 아마존주문 들어가주자, 하고 검색했는데 영어로 써져있어서 뭔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기랄, 화집을 파는게 아니라 죄다 그림을 따로 파는 것 같더라. 어떤 그림에 대해서 사이즈별로 금액이 다르게 책정되어 있는걸 보니 그저 그림을 파는거였고, 화집은 눈에 띄질 않아서 또 다락방이 시무룩..
알라딘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화집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떠날 것이야.
내가 이 영화를 보기 훨씬 전에 책을 읽고 엄청 빡쳐하며 리뷰 썼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 리뷰는 여기 ☞ http://blog.aladin.co.kr/fallen77/5788327)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도 당연히 나쁠걸 예상하고 갔다. 다만, 야한 장면들을 화면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 외로워..
이 영화를 다 보고난 후 옆에 앉았던 내 친구는 '마치 인간중독의 송승헌을 보는 것 같아 몰입이 안된다' 라고 했는데, 나는 빵터져서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난 몰입됐어.
그러자 친구가 그러냐며 놀랐다. 이게 다른 사람들 평 보니까 아주 난리가 나게 욕들어먹던데, 나는 뭐, 재밌던데? 책보다 영화가 나았다. 음, 물론 가장 많은 영향을 차지한건 영화가 책보다 잘 만들어졌다거나 한 이유가 아니라 역시나 '타이밍'의 문제인데, 이 영화를 내가 반년전에 보기만 했더라도 아마 욕이란 욕은 다 해줬을지도 모른다. 잘못했다고 벌을 주는 남주라니, 세상에 이런 괴물같은 남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이런 변종 괴물 그레이야!
책에서는 도무지 내가 알지 못했던 변태행위(?) 같은게 나와서 놀랐었는데-구슬을 이용한 거였다-, 영화에서는 그런 가학적인 행위가 많이 소프트해져서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묶고 때리고 하는 것들이 섹스 전에 잠깐 등장하고 그것도 강도가 세지 않아 '흐음, 저렇군.' 하며 보았으니까. 아마도 사람들 힘들지 않게 보라고 일부러 소프트하게 한게 아닐까 싶었다. 많은 대중에게 보여지려면 하드코어여서는 곤란할테니. 게다가 여자주인공인 아나스타샤의 음모도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 음모를 보는 것도 생각보다 충격이 덜하더라. 그걸 보는게 힘들지도 않고. 다만, 아나스타샤만 너무 많이 보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야, 그레이는 왜 엉덩이만 보여주냐!
잠깐, 이 음모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또 어제 출근길에 《오래오래》읽다가 음모 관련 글이 나왔던 게 떠올라 옮겨보겠다. 부질없나..
책 속에서 엘리자베트는 세비야에 도착해 낯선 소녀의 손에 이끌려 미용실로 향한다.
상반신만 보이는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어요. 그녀들 속에 끼일 생각을 하니까 덜컵 겁이 났죠. 그 와중에도 나를 보더니 입을 다물더군요. 아마 1초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동안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그 짧은 동안에 침묵 사이로 도시의 소음이 파고들었어요. 자동차 소음, 아이의 외침, 포석 위에 놓인 카페의 철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죠. 그러고 나서 여자들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었어요. 처음에는 가만가만 이야기를 하면서 상냥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나무판에 마지막으로 하나 남아 있는 구멍을 가리키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내 본성이 되살아나서 리듬이 빨라지고 다시 속사포가 되었죠. 물론 나는 망설였어요. 하지만 한 도시가 우리에게 열어 주는 문들을 거부한다면, 그 도시를 여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는 구멍 속으로 들어갔어요. 나 역시 그녀들처럼 반신상이 된 거죠. 그러자 곧 탤컴파우더를 바른 것처럼 아주 보들보들한 손 하나가 내 다리를 벌렸어요. 나는 거들을 입고 있었어요. 한여름의 스페인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옷이죠. 그래서 그것을 벗기려는 손길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어요. 내 허벅지 위쪽에 뭔가 차가운 것이 와 닿더군요. 쇠붙이 같은 것이었어요. 미지근한 물과 비누도 닿았어요. 비누 거품이 살을 따끔거리게 하는 느낌이 들었죠. (p.168-169)
그 뒤의 부분들을 인용하지 않겠지만, 여자가 찾아간 미용실은 음모를 다듬어주는(?) 곳이었다. 작업이 끝나고 미용실을 나설때, 직원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군께서 만족하실 겁니다.> (p.170)
자, 다시 그레이 얘기로 돌아가서. 나는 그레이를 보면서 많이 웃었다. 물론 친구가 말한 것처럼 그레이는 어색하다. 인간중독의 송승헌처럼 연기를 못하는데, 그래도 송승헌보다는 낫다. 그레이는 뭐 때리는 것 말고 별달리 하는 건 없어보여서 딱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많이 웃었다. 나에게 로맨스는 없다, 고 말하면서도 아나스타샤를 향한 끌림으로 어쩔 줄 모르는 남자라니. 하여간 남자들은 통 자랄줄을 모른다. 나이가 몇이든간에 애라니까. 지가 지 감정을 잘 몰라. 나는 이런사람이야, 하는 규정에 자기를 넣고는 그대로 행동하려고만 한다. 얘야, 좀 더 크렴.
영화도 책처럼 시리즈로 제작된 줄은 미처 몰랐다가 영화의 마지막이 책의 1부처럼 끝나버리자 멘탈에 붕괴가 왔다. 헐. 뭐여...이거 2부, 3부 다 보러 오란 말이냐, 나한테? 나는 반지의 제왕도 시리즈라 안봤는데? 해리포터도 안봤는데? 그런 내가 그레이를 보라고?? 뭐, 트와일라잇을 봤으니 볼 수도 있겠지만..여튼 두시간오분이나 보여주면서 1부의 끝이라니. 아니, 그레이가 1,2,3부 나눠서 만들 정도로 뭐 할 말 많은게 아니잖아? 흐음.
영화의 마지막,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이해해보고 싶다며 그레이가 하자는대로 한다. 즉, 벨트로 맞는 걸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아픔과 비참함에 눈물을 펑펑 흘린다. 그리고는 그레이에게 말한다. 네가 보고싶었던 게 이거냐, 너는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냐. 왜 이런 방식으로 너는 쾌락을 얻냐. 결국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받은 선물을 다 내려놓은 채 그레이를 떠난다. 아아- 나는 아나스타샤가 울 때 같이 울고 싶어졌어. 나란 여자, 왜 아나스타샤에게 이입됩니까. 왜죠?
그건 아마도, 머리 묶은 아나스타샤가 나와 닮았기 때문일거고,
그건 아마도, 다크 서클과 눈밑 지방이 닮았기 때문일 거야.
아, 언젠가 나의 어여쁜 조카는 내 눈의 다크서클을 가리키며 '이모 여기가 왜 초록색이야?' 한 적이 있었더랬지...
아나스타샤는 예쁘다.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몰입됐다. 이 두 문장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예쁘기 때문에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몰입됐다, 는 문장은 절반만이 사실이다. 킁킁.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친구에게 그레이 영화 재미있어서 아주 많이 웃었다고 깔깔대고 얘기하는데, 친구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렇게 혼내고 때리는데 아나스타샤는 왜 그레이 옆에 있는거야? 라고. 그래서 나는 까불거리던 목소리에서 장난기를 싹-, 싸악- 뺀 채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사랑합니다.
크- 명답이다.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사랑한다. 그래서 가장 심한 행위-벨트로 맞는 것-를 하고 그를 이해해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길과 다름을 알게 되고 울면서 떠난다.
나는 이 책을 1부만 읽고 더이상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의 흐름상 2,3부에서는 아나스타샤가 그레이랑 재회해 같이 변태가 된다, 는 이야기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그레이가 아나스타샤를 통해 변태행위로 부터 벗어나 정상적인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되는 쪽으로 흐를 것 같다. 나는 이런 식으로만 쾌감을 얻어, 나는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라 섹스를 해, 라고 말하는 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고통을 주며 즐기려는 게 아닌, 사랑을 나누는 그레이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레이가 결국 그렇게 변했다면 그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일테다.
그레이는 아나스타샤를 사랑합니다.
재미있는 영화였다. (응?) 그리고 스틸컷 찾다가 이런 사진을 봤어. 아, 에드워드도 그렇고 그레이도 그렇고, 왜 영화판을 벗어났다하면 이렇게 사람들에게 깨알웃음 주시나요?
그레이야, 네가 내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그 수염..안어울려... -0-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고 또 그렇기에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느끼고 매력을 느낀다. 그레이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나에게는 아웃오브안중인데, 아나스타샤는 그레이에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느낀다. 그건 그래서 의미가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레이를 좋아한다면 이 세상에 그레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는가. 다만,
노트북 고장났단 말에 노트북 보내주고(애플꺼였어..)
오래된 차를 보고는 자가용 한대 보내주고...
그러는 그레이는 좀 좋더라.
칠봉이와 통화하다가 내가 말했다. 그레이가 아나스타샤에게 차를 사줬다고, 자가용을. 그래서 멋졌다고. 그러자 칠봉이가 말했다. 내가 너에게 사줄수 있는 건 녹차뿐이라고... 하아- 이걸 드립이라고 치다니........
극중 그레이의 엉덩이가 자주 나오는데 작고 예뻤다. 그레이가 몸의 근육이 멋지던데, 운동을 즐기는 남자들의 엉덩이는 저렇게 작고 이쁜걸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아, 맞다. 그레이 영화속 노래들이 다 좋던데 사운드트랙 살까..
(중요하게 덧붙이는 말: 영화 《그레이의 오십가지 그림자》를 재미있다고 한건 '지극히 사적인 이유' 때문이므로, 아 재미있다니 보러갈까, 하는 생각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