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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1~2권 세트 - 전2권 ㅣ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 L 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 / 시공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소설이 여기에 가학-피학 성적 관계를 보여주는 선정성을 가미한 작품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로맨스 소설은 클리셰적인 구조를 변주해나가며 성립하기 마련이고 비슷한 설정이 반복되는 것도 필연적이다. 중점은 여기서 어떻게 개별성을 얻으면서 독자적인 작품으로 호소하느냐 하는 것인데, E L 제임스는 놀랍게도 여성 로맨스 서사에서는 공공연하게 언급되지 않았던 관계를 넣어 작품의 강도를 높였고 이는 대중의 마음을 붙드는 데 성공했다. (2권, p.358, 옮긴이의 말 中 에서)
이 소설의 1권의 절반쯤을 읽었을 즈음, 나는 이 책을 마저 읽을까 말까를 잠깐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불리는 소설에 너무 많은걸 기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노'라는 장르라고 소문나 있는 책에서 나는 작품성과 문학성을 바랐던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기대한 나의 실수가 아닌가 싶었던거다. 이 소설을 그저 '로맨스' 나 '에로'라는 장르에 맞추어 읽었다면 내가 실망할 이유따위가 어디있단 말인가, 하고. 그래서 나는 내가 일반적으로 '책' 혹은 '소설'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걸 버리고 이 책을 읽기로 다시 마음을 정하고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기 위해 책을 들었다.
그렇다고해도 이 책은 결코 재미있지가 않았다. 위에 옮긴이의 말처럼 그래, 로맨스 소설이라는게 전형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로맨스 소설들은 거기에서 약간의 변주를 가할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도 그렇게 말하면 굳이 욕먹을 이유가 없는게 아닌가 싶지만, 이 책은 변주를 가했으되, 서툴렀다. '얼굴이 빨개진다'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는 책 1,2권을 통틀어 수십번 나오는 표현이다. 게다가 '니가 아랫입술을 깨물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따위의 대사는 아랫 입술을 깨물때마다 번번이 튀어나와서 사람 질리게 만든다. 성적인 부분을 과감하게 터뜨리고자 했던건 분명 놀라운 시도였지만 이 책의 내용 자체가 놀라운 것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사춘기때 읽었던 할리퀸 소설이 내용적으로 더 흥미있게 느껴졌다. 게다가 에로틱한 부분을 빼놓고 얘기하자면, 이십년전 읽었던 할리퀸 소설들에서 대체 무엇을 더 발전시켰단 말인가.
전용 헬리콥터에 여자를 태우고, 맥북을 선물하고 아우디를 선물하고 빈티지 와인을 선물하고 테스의 초판본을 선물하고 블랙베리를 선물하는 것? 옷장 가득 새 옷으로 채워주는 것? 새로운 기계들을 선물한것은 이 시대에 선물했기 때문이지 그가 한 행동이 진보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여자는 남자의 유머감각과 냉정함 그 사이의 변덕에 대해 쉼없이 설명하지만, 그녀가 설명할 때 나는 대체 그 남자에게서 무엇이 달라진건지 모르겠다. 그는 한결같은데 여자는 그의 감정의 기복을 순식간에 캐치한다. 그녀의 설명으로 내가 그의 감정을 캐치해야 한다면, 그건 좋은 소설이 아니다. 그것이 좋은 소설이 되려면 내가 그의 감정을 캐치할 수 있어야 한다. 여주인공의 입을 빌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 나는 역시 자꾸만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는걸까.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상처를 가진 돈 많은 남자와, 그에게로 향하는 끌림을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여자. 여자는 그가 너무 좋아서,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낀적이 없어서(스물 한 살이다), 그가 원하는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소설 2권의 끝에서는 그녀는 결코 이런식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프게' 깨닫고 그를 떠나고자 한다. 아마 이 책의 2부와 3부에는 그 둘이 재회하는 과정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걸 깨닫고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조금은 죽이면서 여자에게 다가가는 모습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그 다음 시리즈를 읽고 싶다거나 하지는 않다. 이건 글쎄, 좀 더 두고볼 일이다. 게다가 1권의 절반을 지나면서부터는 계속 성관계하는 얘기만 나오는데, 그게 굳이 두 권 분량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양한 체위로 섹스하는 걸 계속 계속 읽어야 하는걸까? 할때마다 천상의 기분을 느끼는 여자주인공을 번번이 봐야 하는걸까?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했던 스물 한 살의 여자가(게다가 주변에 구애하는 남자가 둘 씩이나 있는데도!) 사랑에 서투른 것은 물론 지극히 당연하다. 게다가 이 책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 책 또한 서투른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독자인 내가 서투른 주인공이 나오는 서투른 책을 마땅히 읽는 것은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니다. 뭐, 어쨌든 다 읽었지만.
다만, 그녀가 묘사한 성애 장면의 그 다양한 방식들을 조사(?)한 노고에 대해서, 이 작품으로 인해 여자들이 드디어 성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정말? 그동안에는 정말 말하지 않았단 말이야?)만 별을 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