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는 뜬금없이 잉여로움이 터진 가운데, 내 책장에 꽂힌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세어보고 싶어졌다. 대략 오백권쯤 될 것 같은데...하면서. 그래서 세 보려고 한 줄 셌다가 또 갑자기 빡쳐서 너무 잉여로운 짓을 하는군, 하다가 또 갑자기 책장을 다시 정리하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음사 전집이 꽂힌 칸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던 거다. 그, 민음사 새로 나온 전집 이름이 뭐더라..현대고전이었나. 여튼 그게 점점 개수가 많아지고 있던 터라 새로이 한 칸을 내주자, 세 칸은 그냥 민음사 고전전집으로만 채우자 해놓고 다 빼서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안 읽는 책은 중고샵에 팔아버리자, 라고 마음먹었는데, 똭-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지만 '더럽게 재미없었던' 기억이 있던 터라, 팔어팔어, 이거 가지고 있어서 뭐해, 하고 한 쪽에 빼놨다. 또 뺄 거 없나, 하고 차곡차곡 책을 정리하는데, 더는 없었다. 민음사 고전을 그래서 세 줄에 깔맞춤하여 정리해 두었다.
굳굳, 좋았어.
그리고 저 《대머리 여가수》를 가져와 중고샵에 등록하고 새로이 중고 박스를 만들려는데, 아 글쎄 저 책에 포스트 잇이 두 개 붙어 있는거다. 응? 재미없게 읽은 기억만 나는데 왜 포스트잇이 붙어있지? 그래서 그 부분을 들여다본 뒤에 팔자 싶어 들여다봤는데 어? 좀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포스트잇을 떼고 이 책을 그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 처음부터 재미있다!
영국식 안락의자가 있는 영국 중류 가정의 실내. 영국의 저녁. 영국식 안락의자에 앉은 영국인 스미스가 영국식 실내화를 신고 영국식 난로 옆에서 영국식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영국 신문을 읽고 있다. 그는 영국식 안경을 쓰고 있고, 영국식의 작은 회색 코밑수염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다른 영국식 안락의자에 앉은 영국인 스미스 부인이 영국식 양말을 꿰매고 있다. 꽤 긴 영국식 침묵. 영국식 추시계가 영국식 종을 열일곱 번 울린다. (p.9)
'재미있다' 라는 표현보다는 '독특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텐데, 이 지문에서 묻어나는 어떤 비꼼(?) 같은 것들이 흥미로워, 책장을 넘긴다. 그러다 이렇게, 웃기지만 웃긴건지 아닌건지 웃어도 될지 안될지 잘 모르겠는 대화를 맞닥뜨리게 된다.
스미스 부인 요구르트는 위장에 좋고, 맹장, 신장, 신앙에도 좋대요. 맥킨지 킹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옆 집 존 선생네 애들 치료하면서요. 훌륭한 의사죠. 믿어도 되는. 그 양반 자기한테 직접 실험 해 본 약 아니면 절대 처방 안 하세요. 파커 씨 수술할 때도 멀쩡한 자기 간을 먼저 수술시 켜 봤대요.
스미스 그런데 왜 파커만 죽고, 의사는 살았죠?
스미스 부인 의사 선생 수술은 성공했고, 파커 씨 수술은 실패했거든요.
스미스 그럼 좋은 의사 아니죠. 두 번 다 성공하든지, 아님 둘 다 죽어야 돼요.
스미스 부인 왜요?
스미스 같이 회복되지 못하면 환자랑 같이 죽어야죠. 양심적인 의사라면. 선장은 파도 속에서 배하 고 같이 죽잖아요. 혼자 안 살아남고. (p.12-13)
아- 이런 글이 있었는지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완전 새로운 문장이야. '의사 선생 수술은 성공했고, 파커 씨 수술은 실패했'다고 말하는 부분은 유머스럽지만 '선장은 파도 속에서 배하고 같이 죽'는다는 말은 아프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이 희곡 《대머리 여가수》는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져있는데, 부조리극이 무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치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아, 이런거구나 싶어질 것 같다.
스미스 (계속 신문을 읽으며)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왜 꼭 신문엔 죽은 사람 나이만 나오는지, 새 로 태어난 사람 나이는 안 나오고. 말이 안 되죠. (p.13)
소방대장 (다시 잔기침을 하고 감동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체험 우화. 「개와 소 이야기」. 옛날에 어 떤 소가 어떤 개한테 물었답니다. "자넨 왜 늘 코를 쑥 빼고 있나?" 그러자 개가 대답했습 니다. "미안하네. 난 내가 코끼린 줄 알았어."
마틴 부인 교훈이 뭐죠?
소방대장 스스로 찾으셔야죠. (p.44)
메리 그럼 짤막한 시나 한 수 읊을게요.
스미스 부인 너, 정말 고집 세구나.
메리 하나 읊을게요. 괜찮죠? 제목은 「불」이에요. 대장님을 환영하는 뜻에서요.
「불」
수풀 속 모든게 타오르니
돌에도 불
성에도 불
숲에도 불
남자도 불
여자도 불
새들도 불
생선도 불
물에도 불
하늘도 불
재에도 불
연기도 불
불에도 불
온통 다 불
온통 다 불에도 불
메리는 스미스 부부한테 떠밀려 나가면서 시를 낭송한다. (p.52-53)
스미스 옥수수밭 옥수수엔 오이가 아니라 옥수수가 열려요.
스미스 부인 기린은 귀가 있는데, 귀는 기린이 없지.
마틴 부인 내 팔 건들지 마.
마틴 팔 좀 흔들지 마.
스미스 팔 좀 놔둬. 파리 좀 날리지 마.
마틴 부인 파리 날잖아.
스미스 부인 파리똥 떨어져.
마틴 파리채 잡아. 파리채 잡아.
스미스 파리 특공대. 파리 특공대.
마틴 부인 우주 특공대. (p.58-59)
이게 말이여 소여... 그러니까 이런 식의 희곡인 거다. 크- 이런 게 바로 부조리극인 것인가!
갑자기 '강신재'의 단편 <젊은 느티나무>가 생각난다. '오빠,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하는, 바로 그 문장! 내게 부조리는 강신재 단편에서 제일 처음 접한 단어였는데. 가질 수 없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 오빠, 그가 바로 여주인공에게 부조리의 상징이었는데.
여하튼, 나는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읽게 된것이다. 그러고보니 어제 읽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도 다시 읽은 책이네... 지금은, '다시'의 계절인가!
지난주에 중고샵에 책을 팔고 오늘 예치금이 입금되어 또 책을 샀다. 책을 사기 위해 책을 팔았다. 책을 팔아 책을 샀다. 사놓고 목록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으응? 다 재미없어 보이는 책들이네??
소설책이...딸랑 한 권 있는거야? 이거..내 주문 맞아?? 왜 요즘은 주문하면 소설책이 별로 없지?? 왜지?? 뭐지???
여튼, 후딱 또 중고 한 박스 만들어서 또 책을 사야겠다. 살 책이 아직도 많다.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오늘 트윗을 보니 '데이비드 실즈'의 책도 새로 나왔던데. 조조 모예스는 또 어떻고! 벨 훅스의 책을 읽다 보관함에 넣어둔 스캇 펙의 책까지. 흑흑. 아직 박연준의 책도, 한창훈의 책도 못샀는데! ㅠㅠ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이런 사진을 보게 됐는데,
와- 보는 순간 확- '후버까페' 생각이 나는 거다.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을 때, 책 속에서 레오와 에미가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채로 만나기로 한 장소. 사람이 많고 2층까지 있는, 바로 그 후버까페를, 나는 꼭 이렇게 생각했었던 거다. 에미와 레오는 독일에 있었고, 이 책은 스웨덴을 찍은 것이다. 그러니 에미와 레오가 여기서 만날 리는 없을 터. 스웨덴에서는 스웨덴의 에미와 레오가 이 곳에서 만날 수도 있겠구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문득 에미가 되어, 저 사람들 중 도대체 누가 나의 레오일까, 하고 둘러보기도 했다. 둘러봤는데, '아, 저 사람이 레오였으면...'하는 바람을 주는 사람은 없네?
뭐, 인생은 그런 거니까.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친구가 모닝 족발을 먹고 출근 중이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헐. 개부럽 ㅠㅠ 모닝 족발이라니! ㅠㅠ 완전 부럽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도 모닝 족발 완전 잘 먹는데! 모닝 족발을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 모닝 족발, 하고 생각하니 모닝 소주도....히잉 ㅠㅠ 그렇지만 현실은 묵묵히 미끄러운 길을 헤치며 출근...Orz
여하튼 그래서 이번주내로 나는 족발과 보쌈을 먹으러 갈 것이다. 나는 현재 다이어트 중이니, 아무리 족발이 맛있어도 막국수는 먹지 않을 거다. 킁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