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회식이나 약속이 있는 날에도 꼭 짬을 내 나에게로 왔다. 그러고는 카페라테 톨 사이즈가 다 식어갈 때까지 두 눈을 마주한 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찍 퇴근한 날도 일단 카페라테 톨 사이즈가 다 식어갈 때까지 두 눈을 붙잡고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이야기하는, 카페라테처럼 거품 많고 열량 높은 의식을 치르고나서야 밥을 먹든가 영화를 보든가 했다. 한 달 동안 뮤지컬도 네 편이나 보았는데, 그는 마치 데이트 전문가코스를 이수한 사람처럼 매사에 능숙했다. 그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완벽한 사람이었다. 성격도 좋을뿐더러 아무리 봐도 미남이었다. (p.12)
'아무리 봐도 미남'이라는 건 주관적인 느낌이고 기준 자체가 다를 수 있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퇴근후 꼬박꼬박 만나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기란 힘들다. 아니지, 일단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서로 마음이 끌린다는 증거가 아닐까. 어떻게든 짬을 내어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나랑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면 대체 왜 짬을 내 나에게로 온단 말인가? 그러니 당연히 그런 남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을거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일은 그 한 달의 마지막 날에 일어났는데, 그가 카페라테 톨 사이즈의 반도 다 마시지 않았는데 대뜸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축하해달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적당한 단어를 찾다가 포기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p.13)
아....진짜.....개자식이다. 친절하고 사려깊고 다정한 성격탓에 별 의도없이 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도, 나랑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 자체로 즐거웠지 나랑 사랑한게 아니라고 해도, 일단 그의 행동은 나로 하여금 '사랑'이란 감정으로 오해하게 했다. 그것이 오해라면 말이다. 왜 어딜가나 이런 놈이 있을까. 나도 이런 놈을 만나봤던 봐, 이 단편,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를 읽는데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 이런 개똥같은 경우가 다있어.
여자는 그 소식에 놀라고 허망해 스스로를 원망한다. 내가 어쩌자고 착각한걸까, 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걸까, 하고. 나 역시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고, 그는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해 내게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내가 먼저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니'라고 했고, 그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도 나를 원망했다. 자책했다. 내가 어쩌자고 '착.각.' 했을까. 내가 병신이었고 내가 등신이었구나. 그는 나를 그저 속 깊은 이성친구로 생각했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는 이성으로 생각한거구나. 우리가 향한 감정의 방향이 달랐구나. 달랐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남동생 덕에 알았다. 내가 고백한다고 했을 때 남동생은 잘 생각해보라고 해주었었고, 그것이 실패로 끝나 절망에 빠졌을 때 내 남동생은 내가 아닌 그에게 화를 냈다. 남동생은 그 때 분노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누나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냥 고백했겠어? 누나도 뭔가 느껴서 그런거잖아? 그건 그새끼가 그렇게 한거잖아?
그 말을 듣고보니 그랬다. 나로 하여금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게끔, 그걸 그가 했다. 물론 그것이 내 기준이었음을 안다. 내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게 사랑한다는 표현이라면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 것도 사랑이라는 표현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한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켜켜이 쌓인 사연들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내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듯이 그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여자는 그에 대한 마음이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프다. 자꾸 그의 생각만 난다. 그와 '헤어져' 지내고 두달뒤, 그로부터 안부전화가 온다. 허허 그것참. 안부전화라니, 그 안부전화를 대체 왜 '약혼자와 시간을 두고 떨어져 지내기로 한' 시점에 거느냔 말이다. 그것부터가 여자를 단순한 친구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않나? 단순한 친구라면 약혼자가 있든 없든, 결혼을 했든 안했든, 그냥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거잖아. 이래놓고서 여자가 오해한거라고 말할 수 있는거야?
남자는 팔에 깁스를 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집에 바래다주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선숙씨, 저번에 선숙씨한테 욕먹고 나서 생각해봤어요. 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여자들한테 얘기 많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인걸요. 또 선숙씨를 실망시킬 생각하면 나 속상해요. 앞으로 회사 일로 바빠지고 그러면 만날 시간도 없을 거고 ‥‥‥이제 그만 오세요." (p.20)
하아- 말하는 것도 재수없어. 거절의 말은 언제나 단칼에, 의도를 분명히 해야한다. 미적지근하게 하는건 정말이지 쌍방에 도움이 안된다니까. 여자가 자신을 바래다주는 게 좋은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면 설사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도 '이러지마' 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에 상처받지만 길게 볼 때 덜 상처받는 길이다. 이 머저리 병신아. 그런데 말하는 걸 보니 앞으로도 저 성격 고치긴 힘들것 같다.
"그동안 선숙씨한테 중독됐나봐요. 집에 혼자 오는데 허전하더라고요. 가끔 이렇게 같이 걸을 수 있죠? 우리 아직 친구 맞죠?" (p.23)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진짜 울트라 짜증난다. ㅠㅠ 저렇게 다정하게 속살거리는 남자보다 더 짜증나는 건, 그 말에 '우리는 친구라도 할 수 있어' 란 생각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나같은 여자다. 난 친구 따위 필요없다고 냉정하게 돌아서면 되는데, 그간 사랑했던 남자를 앞에 두고 확 뒤돌아 가기는 또 얼마나 어렵단 말인가. 그래, 친구로라도 곁에 있자, 그 생각을 하면서 또 얼마나 비참할까. 친구로 지내다가 또 가끔은 어떤 말이나 행동에 '어쩌면..'하는 기대를 하게 될 지도 모르고. 정말 지옥같아 지옥같아.
어제 여동생과 엄마가 <따뜻한 말 한마디>란 드라마를 보고 있던중에 나도 옆에 가 앉았다. 3분쯤 봤나, 가서 책을 읽는게 더 낫겠단 생각이 들어 난 내 방으로 갈게, 하는데 조카가 이모 가지말고 여기 앉아있어, 라고 하길래 아아 마음이 샤라라랑~ 녹아버려 그래 알았어, 하고 좀 더 앉아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의 상황은 이랬다. 김지수와 지진희는 부부인데, 지진희가 한혜진과 바람을 폈다. 그 여파로 김지수의 남동생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지진희는 그런 상황을 자책하고 있었으며 김지수는 때로는 자신을 때로는 남편인 지진희를 원망하고 있다. 내가 본 장면에서 지진희는 속상한 마음에 양주를 따라 마시고 있었는데, 김지수는 그런 지진희에게 원망을 퍼붓고 있었다. 왜그랬니, 라며. 그건 바람을 지칭한 거였는데, 물끄러미 지진희를 보다가 나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근데, 저런 상황에서도...지진희라면....도무지 미워할 수 없을것 같지 않아?
여동생은 웃으며 맞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거다. 나는 물론 내가 읽은 저 단편 소설속의 남자가 짜증난다. 화가 난다. 그래서 여자가 내 친구라면 이 등신아, 멍청이처럼 굴지말고 만나지 마!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여자의 입장이라면, 소설의 내용만 놓고 봤을 때, 이런 놈이라면 헤어져야지, 라고 당연한 결론을 낼 수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 사람을 대입해보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진다. 만약 남자가 지진희라면, 혹은 현빈이라면? 내가 너 따위 안봐, 라며 거칠게 돌아설 수 있을까? 나 역시 찌질하게 '친구'라는 관계로 어떻게든 그의 옆에 있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아-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당당하게 빠져나와 나의 사랑을 찾아야 하는 법. 그러나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언제나 언제나 멀고도 먼 간극이 있다. 장담한대로 행할 수 없는 멀고도 먼 간극. 저 상황의 남자는 여자에게 지진희고 현빈이었겠지.
"나는 선숙씨가 기대하는 건 줄 수 없어요. 여자를 계속 오해하게 만드는 남자는 지옥 간다고 선숙씨가 그랬잖아요." (p.21)
맞다. 여자를 계속 오해하게 만드는 남자는 지옥에 간다. 지옥에나 가버려라 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남자들아!!
갑자기 어제의 통화가 생각난다.
친구: 내일 날씨 더 춥대. 알고있어?
나: 아니.
친구: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거야, 날씨 춥다는 것도 모르고.
나: 이렇게 너가 말해주잖아.
난, 내가 하는 어떤 말들이 상대를 기분 좋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친구도 웃었으니까. 단편 소설속의 남자도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말들이 여자에게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가 박힐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거다. 그러면서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걸 은근히 즐기고 있을것이고. 정말 몰랐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길 바라면서 나는 너랑은 감정의 결이 달라, 라고 말하는 순간에 약간은 뻐기는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지옥에나 가버려라.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지옥에 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