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평소에 회사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니 지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움직였다. 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 어제 배달온 기모스타킹의 포장을 뜯으려 했는데 잘 안 뜯어지는거다. 난 이렇게 언제나 닥쳐셔야 행동하는 기질이 있다. 어제 뜯어 놓았으면 좀 좋아.. -_- 여튼, 그래서 칼을 가지고 포장을 뜯으면서, 설마 병신같이 스타킹을 찢어버리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포장과 함께 스타킹이 찢어졌다.
.........스바...
이것을 신을것인가 말것인가 오래 갈등하고 싶었지만, 난 지금 몹시 바쁘니 오래 갈등할 시간이 없다. 다행히도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뜯어졌으니 걍 신자, 라고 생각하고 신었다. 집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면서 버스가 오는 시간을 조회해보니 앞으로 이 분 뒤. 앗, 이거 타야돼! 나는 아파트 입구를 나가면서 다다다다닥 뛰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무단횡단을 하면서 또 다다다닥 뛰었다. 내가 뛰어 버스정류장으로 도착하는 그 즈음, 버스도 저 쪽에서 오고 있었다. 다행. 탑승.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다리가 포근하고 따뜻하다. 캬. 역시 기모스타킹이 짱이야. 이건 바지보다 따뜻해. 지상 최고의 발명품이야. 크. 따뜻해. 이러면서 만족만족 하고 있다가 지하철 역에 내려서 또 다다다닥 뛰었는데 지하철이 막 출발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책을 꺼내들고 다음 지하철을 기다렸다. 그리고 지하철이 와서 탔는데, 사람들이 몇 없는 지하철안, 내가 앉은 자리의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었고, 여성용 지갑이 떨어져 있는게 보였다. 헐.
나는 책을 읽으려다 틈틈이 그 지갑을 노려봤다. 분명 지금 이 안에 저 지갑의 주인은 없다. 누군가 주인을 찾아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누군가 저 지갑을 들고 간다고 해도 저 지갑의 주인을 찾아줄 거란 걸 보장할 순 없다. 그래, 내가 내릴 때까지 아무도 저 지갑을 들고 가지 않으면 내가 들고가자, 내가 들고가서 지갑의 주인을 찾아주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정직하지 않을거야, 나만이 저 지갑안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은채로 주인에게 돌려줄 사람일거야,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지갑 안의 현금은 빼겠지, 그래, 내가 하자, 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내리는 오금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아무도 그 지갑을 건드리지 않더라. 할 수 없이 내가 그 지갑을 주워 들었다. 내가 그 지갑을 줍는 걸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보셨는데, 그 눈길이 도둑을 보는 것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주인 찾아줄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내가 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것 같아 걍 아무말도 안하고 그 지갑을 들고 서 있었고, 그 할머니는 자꾸 나를 쳐다봤다. 아씨...줍지 말걸...괜히 주웠나...이제와서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자니 그게 더 이상하고.
그리고 오금역에서 3호선을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너무 찜찜하고 걱정이 쌓이는거다. 지갑을 뒤져서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낸 뒤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 나에게 받으러 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 괜히 뭔가 나를 의심하면 어쩌나 싶으니 찜찜하고....그래, 경찰서에 갖다 주자. 라고 생각하다 보니 마침 양재역에서 내려 5번출구로 나가면 지척에 파출소가 있지 않은가. 그래, 바로 거기야, 거기다 가져다 주자. 그러면 주인을 잘 찾아주겠지, 경찰아저씨들은 그 지갑안의 내용물을 가져가지 않겠지, 그래, 바로 그거야! 라고 생각하고 안심한것도 잠시, 그렇지만 내가 양재역까지 가는 동안엔 그 지갑이, 남의 지갑이 내 가방 안에 있다. 나는 주인을 찾아줄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만약 지갑 주인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지금의 나에게 남의 지갑이 있다는 걸 알고 내 가방에서 그것을 꺼내면, 나는 그 물건을 훔친 게 되는건가? 이런 걱정이 또 생겨버리는거다. 그러니까 나는 어쨌든 그 파출소에 가서 지갑을 제출할 때까지는, 훔친...뇬 인건가. 만약 지금 누가 내 가방에서 그 지갑을 꺼내어 '이건 네 지갑도 아닌데 왜 가지고 있지?' 라고 캐묻고, 내가 '경찰서에 가져다 주려고 했어요, 주인 찾아주려고 했어요' 라고 했을 때 과연 상대는 내 말을 믿을것인가, 를 생각해보니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갑자기........김기덕의 <나쁜 남자> 가 생각났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무서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스바. 이 미친 오지랖. 괜히 주웠어. 이제와서 그렇다고 꺼내어 버릴 수도 없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내가 안주웠다면, 다른 사람이 주워서 그녀의 신분증이 타인에게 노출된다면, 지갑 주인이 험난한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을테니 잘한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자꾸 김기덕의 나쁜 남자가 생각나서 ㅠㅠ 그 여자가 서점에서 남의 지갑을 주웠던 게, 그러다 결국 나쁜놈들에게 끌려가버렸던 게, 자꾸 생각나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책을 읽으려고 펼쳤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아, 이 재미있는 책이 눈에 들어오질 않아. 나는 자꾸만 지금 도착한 역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드디어 양재역. 내가 양재역에서 내려 파출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으면 돼, 그러면 돼. 라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 파출소로 향했다. 파출소로 가는 길의 버스정류장 안내판을 보니 내가 타야할 버스가 앞으로 3분 뒤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래. 파출소에 가서 이 지갑을 주고 돌아나오는 데에는 2분정도면 충분하다, 저 버스 탈 수 있어.
그리고 파출소에 도착해 지갑을 주웠다고 하며 경찰의 손에 건넸다. 경찰 아저씨들이 많았고 젊고 잘생긴 경찰은 그들중 아무도 없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라고 돌아서 가려는데 경찰아저씨 한 분이 내용물을 같이 확인하자고 했고, 한 분이 내게 아가씨 연락처를 적으라며 무슨 노트를 내밀었다. 거기엔 어디서 주웠는지를 써야했다. 그 과정을 마치고 가도 될까요? 저 출근해야 해요, 라고 물으니, 아 출근하시는 중이구나 네 가셔도 돼요, 라고 한다. 나는 바쁘게 움직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마침 버스가 온다. 꺄울. 나이쓰. 버스를 탔다. 그런데 기분이 좋은거다. 그건 지갑의 주인을 찾아주게 되어서가 아니라 경찰아저씨가 '아가씨' 라고 했기 때문. 지난 주말에 산에 가다가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내게 '아줌마 길 좀 물읍시다' 라고 했었는데, 그 상처가 아직 지워지지 않고 깊이 깊이 남아있어서.........그랬는데...............아가씨라고 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회사에 도착했는데 타부서의 직원 한 명이 모카번이라며 빵을 준다. 나는 그 직원에게 말했다.
내가 우리회사에서 당신을 제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나요? 라고.
나도 눈동자 이런 색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런 색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