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맡긴 돈을 잘 운용해나갔다. 그래서 얼마 뒤에는 아버지의 약속대로 내가 관리할 품목도 늘어났다. 이제부터 나는 필요한 물건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그 돈으로 충당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내가 받는 돈의 액수도 증가했다. 더구나 아버지는 이제부터 돈을 매달 주는 것이 아니라 분기마다 건넸다. 좀 더 긴 기간에 나를 적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기간을 반년이나 1년으로 늘리지는 않았다. 기간이 너무 길면 내가 무질서 상태에 빠질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내게 준 돈은 종조부 유산의 이자였다. 그것도 이자의 일부였다. 내가 그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썼음에도 내 전 재산은 나머지 이자와 원금이 합쳐지면서 꾸준히 불어났다. 그런데도 내가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고 식사를 얻어먹는 것은 문제였다. 결국 나는 집값과 밥값 명목으로 분기마다 일정한 액수를 부모님에게 지불하기로 했다. 그 밖에 필요한 것들, 즉 옷과 책, 기구 같은 것은 모두 내 분별력에 따라 재량껏 구입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pp.25-26)
이 책속의 주인공 하인리히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다. 좋은 집에서 교양있는 부모와 부족함없이 살고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진게 있는 상태로 태어난 것인데 심지어 종조부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도 상속 받았다. 어느정도 사리판단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그 유산의 이자를 정기적으로 그에게 건네고, 그는 그 돈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구입한다. 그래도 돈이 남는단다. '유산의 이자의 일부'만 받아 썼는데도. 남은돈을 다시 예금해서 자꾸 재산을 불려가는 게 그의 경제활동이고, 그는 '노동'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
아, 이쯤에서 미리 밝히자면 이 책은 '돈 많은 녀석의 유랑기' 를 보여주기 위한 책은 아니다. 물론 돈 많은 녀석이 유랑하긴 한다. 녀석은 해마다 오랜기간 여행을 하며 타지에 머무른다. 그래도 전혀 걱정이 없다. 돈이 많으니까. 녀석이 하는 일이라곤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고 그림 그리며 지식을 쌓아나가는 거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연극을 관람한다. 책을 읽는다. 그래도 밥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부자의 시간보내기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쓰여진 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삐딱하다는 것쯤은 안다. 그런데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것이다.
녀석이 또 들과 산과 뭐 기타 블라블라 관찰하기 위한 여행을 하다가 뇌우가 올 것 같은 생각에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집에 몸을 피하고자 들어가는데, 허, 여기도 만만찮게 부자다. 그 집의 주인 어른은 그에게 수년간 관찰한 결과 비가 쏟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자신의 집과 정원과 땅을 보여준다. 넓고 넓은 땅을 여기서부터 저어어어어어어어어기 까지 가리키며 저게 다 내 땅이네, 한다. 이 방 저 방 보여주며 여기는 서재고 여기는 손님방이고 서재에서 꺼낸 책은 여기서 읽고 여기는 식당이고...한다. 심지어 집 안에 목공예소까지 있다. 그가 하는 일도 뭐 하인리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양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좋은 대리석을 가져다가 뭘 만들고 장미꽃 잘 피게 하고....
날이 퍽 길어졌다. 항상 같은 시간에 차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도 하늘에 석양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여 우리는 식사 후에도 정원으로 나갔다. 우리 일행은 큰 벚나무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벤치에 앉았다. 주인어른과 부인이 가운데에 앉았다. 정원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주인어른 왼쪽에는 내가, 부인 오른쪽에는 나탈리에와 구스타프가 앉았다. 사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p.263)
하인리히가 그 집에 머무르는 동안 하는 일이라곤 점심 먹고 산책하고 저녁 먹고 산책하는 일이다. 때로는 점심먹고 쉬고 저녁 먹고 쉬거나 점심먹고 이야기하고 저녁 먹고 이야기하는 거다. 그동안 그들의 끼니는 여러명의 하인이 다 해결해준다. 식사 시간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식당으로 가서 하인들이 차려놓은 밥을 먹기만 하면 된다. 다 먹으면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치우는 사람 따로 있으니까. 그리고는 쉬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산책하거나 하면 되는 것이다.
노파심에 말하는데, 이건 한심한 소설도 아니고 부자 욕하는 소설도 아니다. 시종일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다. 숭고하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다. 그런데 나는 2권을 사지 않고 1권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책을 그만 읽을까를 고심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가득한 자연에 대한 묘사도 내게 인상깊지 않을 뿐더러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지 않는데 불어나는 재산을 가진 녀석을 꼴도 보기가 싫다. 물론 그렇게 여유있는 사람들이 학문에 깊이 열을 올려 열심히 탐구하고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애초에 태어나기를 부자로 태어난 것인데,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2권에 등장하게 될 이 부자들의 사랑이야기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부유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그렇다고 똥꼬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란 것도 아니다. 갖고 싶은 걸 다 사주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학교 준비물을 못가져 간 적은 없었다. 지금은 내가 필요한 걸 내가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명품백을 살 능력은 안되지만 책 오만원어치를 사서 에코백을 받을 능력은 된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고가의 와인을 마실 능력은 안되지만, 마트에 가서 2만원에 세 병주는 와인을 살 능력은 된다. 그리고 이만큼이 내 노동의 대가다. 만약 고가의 무엇이 필요하다면 나는 할부를 긁어야 한다. 내게 할아버지가 남겨준 유산 따위는 없다. 심지어 용돈을 주는 할아버지도 없다.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가 내 땅이네, 하는 사람을 나는 건너건너서도 알지 못한다. 내 주변엔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책속의 녀석은 궁금한 식물을 스케치북에 그리면서 학문을 탐구하는 게 전부인데-그게 별거 아니라는 게 아니다-, 재산은 불어난다.
나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그동안 자부해왔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는 못할 지언정 '잘 읽는다' 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속의 주인공에게는 도무지 공감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책장이 더디 넘어간다. 노동 없이 재산이 불어나는 녀석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그에게는 아주 장점이 많다. 상대가 사적인 것에 대해 감추고 싶어하는 듯 하면, 그걸 캐묻지 않고 넘길 만큼의 배려를 가지고 있고, 연극을 보면서 그 연극에 푹 빠질만큼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다. 그러나 그 배려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교양있는 부모 밑에서 여유로운 시간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하루에 얼마만큼의 땀을 흘리고 그 노동의 대가를 받는 사람들보다 무언가를 습득하기에 더 유리한 위치에 놓인게 아닌가. 그가 장점을 가졌다면, 그 장점을 갖기 위한 우선순위에 그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의도야 무엇이든, 어찌되었든, 나는 열등감이 폭발한거다.
정밀하게 묘사된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인간 내면의 조화로운 발전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으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더불어 19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성장소설로 평가받는다. 니체에 의해 최초로 그 문학적 진가를 인정받은 후부터 고전으로서 다시금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1, 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많은 작가들이 그의 심오한 예술성을 격찬하였다. [책 소개 中]
열등감이 나를 이렇게 만든것 같다. '19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성장소설' 이라는데, '니체에 의해 최초로 그 문학적 진가를 인정받'았다는데, '심오한 예술성을 격찬' 받았다는데, 나는 이 녀석은 노동없이 재산을 불리는군, 하며 자꾸만 시니컬해지는거다. 독서란 독자의 몫임을 새삼 실감한다. 책을 쓰는 자의 몫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자의 몫. 나는 아직 2권을 살지 말지 읽을지 어쩔지 결정을 하지 못하겠다. 후..
그건그렇고,
나는 요즘 핸드백 대신 이 에코백을 들고다닌다. 출퇴근 시에도 얄짤없이 에코백이다. 유후~ 저렴하고 가벼운 에코백. 게다가 이것저것 쑤셔 넣는대로 많이도 들어간다. 이 에코백을 메고 걸을 때마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미셸 윌리암스'가 분한 '마고'가 된 기분이다. 후훗. 이 여름엔 다 필요없고, 이 에코백만 들고다닐테다. 멋져..
나는 가끔 내가 너무 멋져서 나 스스로 나한테 반하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