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
어떤 문제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 중심에 내가 있을 때, 그 때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문제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 당시의 내 기분에 몰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때 내뱉는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철저하게 내 위주로 내뱉어버리기 때문에. 실제로 나의 경우 기분 나쁜 댓글이나 이메일을 받았을 때 바로 대응하면 반드시 후회가 찾아왔다. 시간을 좀 두어야 했다. 시간을 좀 두고 거기에 대응을 하면 분노에 가득찬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업무에 있어서도 그리고 연인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시간을 두면, 화가 가라앉고 모진말을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을 두면, 후회하지 않을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게 가능하다.
이 책속의 케이트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로부터 배신감을 느꼈다. 화가 났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녀는 변명을 하기 위한 그의 뺨을 때리고 그를 멸시한다.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는 그런 말들을 듣는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분노를 그대로 안고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현재의 애인에게 이야기한다. 그 얘기를 다 듣고난 애인은,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그 팅커라는 친구는‥‥‥."
디키가 말했다. 자신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학비를 탕진해버리는 바람에 사립학교에서 쫓겨났고, 취직해서 일을 하다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그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그 친구를 꾀어 뉴욕으로 오게 했다는 거지? 너와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우연히 만났고, 그리고 그 친구는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도 우유배달 트럭에 부딪혀 망가진 네 친구를 택했고, 나중에 네 친구가 팅커라는 친구를 찼어. 그리고 팅커의 형도 그 친구를 차다시피 했고‥‥‥."(p.445)
아. 나는 케이트가 되어 팅커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트가 받은 상처에 푹 빠져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제삼자의 입으로 다시 듣는 그 일들은, 내가 팅커를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이미 여기저기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까지 그를 그렇게 대했다. 나 하나만큼은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이 모든게 그를 떠나보낸 후에, 그 후에야 눈에 보이다니. 그게, 그렇게까지, 이해못할 일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것이다.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는게 호감인지 미움인지. 물론 때로는 빗나가기도 하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상대와 나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솟아나고 있다면, 그건 상대와 나, 둘 다 느끼고 있을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의 대화는 특별할 수 밖에 없다. 비록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화일지라도.
케이트와 이브는 사이 좋은 친구이고, 그녀들은 우연히 팅커를 만나 아는 사이가 된다. 늘 셋이 만나 함께 놀았는데 어느날 낮에 케이트와 팅커가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심장이 덜컹할 만큼 놀랄 일이었다. 팅커 그레이라니.
그의 귀 끝은 엘프의 귀만큼이나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의 얼굴을 마치 나쁜 짓을 하는 나를 현장에서 잡아내기라도 했다는 듯이 히죽 웃고 있었다. 유리창 뒤에서 그가 뭐라고 열심히 말을 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래, 여기에요?" 그가 칸막이 좌석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여기라니, 뭐가요?"
"혼자 있고 싶을 때 오는 곳이 여기냐고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팅커는 짐짓 실망했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p.64)
일전에 둘은 이브가 잠깐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케이트는 혼자 있고 싶을 때 가는 곳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대답을 팅커가 듣기 전, 화장실에 갔던 이브가 돌아온 것이다. 혼자있는 케이트를 우연히 보게되고, 그 대화를 기억해, 그게 여기였냐고 묻는 팅커라니.
여기까지 쓰면서 나는 씨익 웃고 있었는데,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아주 많은 것들을 내게 가져다 주지만, 특히나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것도 같다. 나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부르짖지만, 한 번도 잘생긴 남자랑 연애를 한 적은 없다. 잘생겨서 호감을 품을라고 하다가도 몇 마디 대화로 확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라고 속으로 생각하다가도 대화를 하면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상대에게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사랑을 톡톡 건드려 깨어나게 하는건 외모가 아니었다. 외모는 이상형일 수 있지만 현실의 사랑은 외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모로는 나를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떠오르는 단 한명의 남자, 를 돌이켜봤을 때도 만날때마다 번번이 못생겼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 또 웃고 있는데, 그런데 그 남자가 정말 좋았다. 그를 만난게 감사할 정도로. 아, 그러니까 이 얘기를 왜 했냐고 하면, 나는 이 책속의 팅커가 그다지 잘생긴 편이 아니라고 해도 저 말 때문에, 지난번의 대화를 기억하고 '그래, 여기에요?" 라고 묻기 때문에, 팅커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런 대화가 내 안의 사랑을 건드린다. 게다가 나로하여금 완전 이 남자한테 정신을 잃고 빠져들게 한 건 바로 다음의 대화였다.
"정말 근사한데요." 팅커가 말했다.
나는 내 커피잔을 건배하듯이 들어 올렸다.
"내가 교회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안돼요."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팅커는 진지했다.
"아무도 모르는 것?" 내가 말했다.
"딱 하나면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그는 자기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심장 앞에서 성호를 그었다. (p.70)
아, 나는 정말이지, 이 대화가 자지러지게 좋다. 내가 팅커와 마주보고 있고, 팅커가 내게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라고 했다면, 앉아있는 내 다리가 흐물거렸을것 같다. 심장은 녹아버렸을 것 같다. 딱 하나면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라니. 나는 그 앞에 나의 비밀을 하나 툭, 던져주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에게 푹 빠져버렸으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까. 내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남자라니, 아무도 모르는 걸 딱 하나만이라도 알게 해달라니, 그건 내게 특별해지고 싶다는거잖아.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섬세하게 드러나는 이 대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이 때부터 나는 이 책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해지고 싶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걸 나 혼자 알고 싶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내게만 말해주는 그 순간,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될 테니까. 아, 나는 팅커와 케이트의 대화가 무척 좋아서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브와 케이트와 팅커는 대화를 하던도중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무얼 가져가겠냐고 서로에게 묻는다. 그 때 케이트는 소로우의 『월든』이라고 답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팅커는 서점에 가서 월든을 산다. 반복해 읽고 주머니에 그 책을 꽂고 다닌다. 아, 내가 읽고 좋았다고 하는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하는 남자라니, 너무 근사하잖아! ㅠㅠ 역시 멋져. 흑흑. ㅠㅠ
"설마 주말 내내 이렇게 참기 힘들 만큼 들떠 있을 건 아니죠?"팅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위험도 있기는 해요." (p.342)
게다가 정작 나와 단 둘만 있게 됐을 때 들뜨는 남자라니, 들뜬걸 내게 다 들키는 남자라니. 이뻐라. ㅎㅎㅎㅎㅎ 아 좋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케이트가 팅커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내 말에 팅커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p.346)
이 때 팅커의 대답을 나는 사랑한다. 아, 정말? 그런거였어? 라고 생각하며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지. 휘융. 케이트도 그의 대답에 "말도 안 돼!" (p.347) 라고 답했다니까.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였는데 페이퍼안에 다 넣을 수가 없다. 그러면 엄청 길어질테니까. 이 책은 끝까지 좋았다. 결말까지. 이 책은 엄청난 사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보면 이렇다할 특별한것도 없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나는 여기에 없었다. 나는 책 속에 푹 빠져들어 도무지 현실을 살아내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만들고 싶을것이고 어떤 이들은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을것이다. 어떤 이들은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을것이고 어떤 이들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싶을것이다. 이 책의 책장을 덮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이십년간 그 남자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면,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그 선택으로 인한 인생도 역시 각자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지만, 내가 케이트였다면, 이제 그 행복한 삶에 안녕을 말했을 것이다. 행복을 끝내고 불행으로 가겠다는게 아니라, 이제 '이런 행복'이 아닌 '다른 행복'을 찾으러 가겠다고.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겠지만, 그를 떠나 마음속 그리운 상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것 같다. 그리워만 하던 사람, 그렇게 일상속에 서서히 잊혀졌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그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게 되는 사람을 찾으러 가겠다고. 찾으러 간다고 다 찾아지는 것도 아닐테고, 어쩌면 끝내 그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생의 이정도 부분은 그렇게 보내도 되지 않을까 싶어지는거다.
먹먹한 마음에 물에 젖은 휴지처럼 늘어져있다가 다시 행복해지기도 했다. 내게 그리워할 사람이 있어서. 지금 행복한 틈틈이 혹은 지금 우울한 틈틈이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참 괜찮은 인생이 아닌가. 그러다 현빈 같은 남자를 만나면 나도 말해볼 것이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그나저나 『월든』을 샀었는데...어딨지? 교과서처럼 생겨서....팔았나? 기억이 잘 안난다. 월든을 읽어봐야지. 아니, 나는 맨 왼쪽에 교과서처럼 생긴걸로 샀는데, 왜 이걸로 샀지? 이렇게 많은 버전이 있는데? 반값이라 산거였나? 다시 사야겠다.
이 책, 『우아한 연인』을 읽고 푹 빠져서 어제도 술마시는 내내 이 책에 대해 친구에게 얘기하고, 그런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고, 암튼간에 엄청 좋은데, 내가 무슨 얘기를 쓰려고 했더라, 아, 암튼 그래서 이 기분을 방해하기 싫어서 오늘 출근길에는 하루키의 책을 들고 나왔다. 가볍게 읽을만한 걸로, 우아한 연인을 방해하지 않을만한 선택으로는 탁월하지 않은가, 하면서. 그런데 이건 뭐가 이렇게 메롱이야. 절반 이상이 그림이다. 진짜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기에 망정이지.
어제 우아한 연인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내린 결론은 나는 나쁘단 거였다. 수키가 항상 나쁜 여자들을 보면 쌍년이라고 욕하곤 했는데, 그런 수키식대로 표현하자면 나는 울트라쌍년 이다. 나는 지독하게 내 위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뭐든 내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어릴적의 나는 늘 남을 배려하는 착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었다. 내가 내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곤 새삼 놀랐다. 내가 이정도로 내 위주의 삶을 사는구나, 하고. 뭐, 그렇다고 좀 더 착해지겠다, 라는 결심 같은걸 하진 않았다. 나는 그저 계속 울트라쌍년으로 지낼것이다.
그건그렇고, 이 『우아한 연인』의 작가 '에이모 토울스'는 남자다. 제목만 보고 여자라고 짐작했는데, 책을 읽기 위해 펼쳤을 때 책 날개에 실린 작가 사진을 보고 놀랐다.
그건그렇고, 친한 친구와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하지 말자. 내가 포기해야지.
그건그렇고,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