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있을때 정전이 된다면
어느날 문득 다시 읽고 싶어졌을 때,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읽는것이 가능하다는 게 단편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장편소설이라면 책장에서 꺼내어 침대로 가 앉아 아무곳이고 펼쳐야 하고, 부분만을 읽어야 하지만(다 읽으면 잠 못자요), 단편소설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 완전한 이야기를 잠깐동안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장편소설을 좋아하지만, 잠들기전 문득 어떤 단편들이 떠오르는 때가 있다. 아, 장편이 떠오를 때도 물론 있다. 장편과 단편중 뭐가 더 좋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ㅠㅠ 어제는 아침부터 줌파 라히리의 단편 하나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예쁜 드레스를 사고, 섹시한 속옷을 사고, 더 섹시한 구두를 사 신는 여자가 나오는 단편, 「섹시(SEXY)」.
이 이야기 속에서 여자가 느꼈던 설레임과 사랑을 그리고 기대와 허무함을 다시 느껴보자 했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뭐야, 이거 원래 문장이 이렇게 어색했어? 였다. 분명 미쳐가지고 좋다고 읽었는데 이렇게 어색한 문장들, 한번에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로 쓰여져 있었던거야? 했던거다. 뭐, 내용 파악에는 별 문제가 없긴 했지만 절로 인상쓰게 되다니. 일전에 N님이 이 어색한 문장들을 다른 사람들은 참고 읽는거냐고 구매자평 쓰셨던 게 생각났다. 아, N 님은 처음 읽는 순간 알았는데, 나는 줌파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그냥 넘긴건가? 여하튼.
스물두살의 미란다는 백화점에서 한 남자를 우연히 맞닥뜨리고 반하게 된다. 그건 그 남자도 마찬가지. 그 둘은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는데, 남자에게는 인도를 여행중인 아내가 있었다. 시차로 인해 아침 여섯시 쯤에는 아내의 전화를 받아야해서, 남자는 미란다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지 않는채로 늘 새벽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 모든것들을 그녀는 감당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미란다는 그에게 아주 많은 것들을 '처음' 경험하게 해 준 남자니까.
"당신이 처음이야."
그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존경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처럼 긴 다리를 가진 여자는 말이야."
그런 말을 그녀에게 해준 것은 데브가 처음이었다. 고교 시절의 남자 친구들보다 좀 덩치가 클 뿐인 대학 때 데이트 상대들과는 달리, 데브는 데이트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으며, 레스토랑에서 테이블 위로 상체를 깊숙이 숙여 그녀의 손에 키스했다.
그런 행동을 그녀에게 해온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여섯 개의 와인잔에 나누어 꽂아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부케를 그녀에게 가져온 남자도 그가 처음이었다. 사랑을 나눌 때 그녀의 이름을 거듭 거듭 속삭인 남자도 그가 처음이었다. (pp.63-64)
그녀에게 섹시하다고 말해 준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속삭임이 그녀의 피부 밑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70)
나를 포함한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처음이란 말이 앞에 붙는 순간, 그 모든것들은 특별해진다. 첫사랑, 첫키스, 첫데이트, 첫남자, 첫관계. 그러나 그 모든것들이 사실 부질없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깨닫게 된다. 스물 여섯때였나, 나는 친구와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 남자가 했던 어떤 말이 나를 몹시도 황홀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나는 정말 그 남자가 말한 그런 여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남자는 단순히 분위기에 취해 그 말을 했던 것 같다고. 그 말은, 어떤 남자도 할 수 있고, 어떤 여자도 들을 수 있다고. 진짜 그래서가 아니라 그건 일종의 매뉴얼 같은거라고. 내 말을 듣던 친구는 자신도 자신의 연인으로부터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스물 아홉에 만난 남자도 내게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들은게 처음이 아니듯, 그는 그 말을 한게 처음이 아닐것이다.
몇달전에는 회식자리에서 옆에 앉은 직원이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는 지금 이남자가 처음' 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자신의 연인을 지칭한 말이었다. 나는 그때 술을 마시면서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모든게 다 처음이지. 이 느낌은 이 남자한테 처음받고, 다른 남자한테는 다른 느낌을 처음 받고. 그동안 그러지 않았어? 그러자 그 직원은 홀린듯 그렇다고 답했다. 맞아요, 그렇네요. 사람이 다 다르니까 그때마다 각자 다른 느낌이 드는거지. 그게 더 세고 안 세고의 차이는 아닌것 같아. 지나고나면 그 놈이 다 그 놈이더라고.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앞자리의 y 대리는 그 여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씨, 과장님 말 듣지마요! 물들지마요!"
하하하하. 난 나쁜 물 들이는 여자구나. 하하하하. 다시 소설속으로 돌아가자면,
여자는 모든걸 자신에게 처음 경험해준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더 섹시하게 보이고 싶어서 은빛 드레스를 산다. 공단 슬립을 산다. 검은 하이힐을 산다. 그 옷들을 입고 어디에서 그를 만나야지, 하는 생각에 설레인다. 그런데 인도를 여행중이던 그의 아내가 돌아왔고, 남자는 미란다의 집에 운동복 차림으로 찾아온다. 아내에게 일요일마다 운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며.
그녀는 은빛 드레스를 입을 일이 없고, 공단 슬립을 입을 일이 없고, 하이힐을 신을 일이 없다. 그는 일요일마다 운동복 차림으로 오고, 그녀는 그를 집안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맞는다. 그녀는 벵골 출신인 그 남자 때문에 벵골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지도에서는 벵골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그녀는 고작 스물두살이다. 아니 그녀가 마흔두살이었어도 괜찮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춰야 하는 사실에 대해서, 또 그런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던 그런 감정들에 대해서, 그녀는 그 사랑이 끝나는 순간 후회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이 사랑으로 인해 발생됐던 여러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조금 더 나은 사람이, 조금 더 나은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랑의 허무함, 또 쓸쓸함에 대해서도 알게 됐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의 형태에 대해 하나쯤 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 욕망이라고 불러야할지,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하겠지. 그리고 그녀는 그 다음 사랑에서, 그 남자보다 조금 더 나은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내가 없는 남자를,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는 남자를, 거짓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찾아오는 남자를, 드레스를 입고 만날 기회를 가져오는 남자를, 운동복을 입고 찾아오는 것이 일상이 아닌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다른 많은 것들에 처음을 느낄 것이다. 모든 아프고 안타까운 감정들에 대해서 또 과거의 실수에 대해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거다' 라는 후회와 자책이 들 때가 있지만, 어쩌면 그런것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란다의 드레스와, 공단 슬립과, 검은 하이힐은 다른 순간, 다른 사람 앞에서 훨씬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위대한 유산』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줌파 라히리의 단편에 푹 빠져있었네.
- 어젯밤 식구들이 텔레비젼 앞에 둘러앉아 조카의 재롱을 보다가 [환경스페셜]을 보다가 했다. 잠깐 시선을 돌린 텔레비젼에서는 뱀과 개구리가 나왔는데, 나는 으윽, 싫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조카는 내게로 오더니 그 작고 작은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며 말했다.
"무셔? 이모, 보지마."
아, 대체 내가 이 아이가 아니면 다른 누구를 사랑한단 말인가!
- 책상위에 놓여진 초콜렛통의 뚜껑을 열고 딱 한 개만 먹고싶은데, 차마 그러질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매번 그렇게 결심했지만 한 개를 입에 무는 순간 손이 멈춰지지를 않았었으니까. 먹으면서도 중얼거렸다. 초콜렛은 왜 하나만 먹고 멈춰지지 않는거지? 왜이러지? 그래서 쓰레기통에 죄다 쏟아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었다. 물론, 그러진 않았지만. 신이시여, 제가 초콜렛통의 뚜껑을 연다면, 딱 한 개만 먹고 뚜껑을 닫을 수 있게 도와주소서. 흑흑.
- 오늘 아침에 나는 맹렬한 질투심에 휩싸였다. 그 질투심으로 가슴이 아프고 시리기도 했는데, 이런 종류(!)의 질투심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그 감정의 이름이 질투심인지 뭔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처음이라, 뭐라 이름붙여야 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