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사랑합니다!) 의 단편집 『축복받은 집』을 읽고 있다. 첫번째 단편부터, 오,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아주 마음에 든다. 첫번째 단편 「잠시 동안의 일」은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삼십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주인공이다. 이 둘은 사이가 좋았으나 아이를 잃고 난 후로 같이 식사하는 일도 없고 대화도 줄어들었고, 서로 한 공간에 있기조차 불편해지고 만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동안 저녁 여덟시에 정전이 될 거라는 공지를 보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정전이 되기때문에 촛불을 켜두고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되고, 그 어두운 곳에서 아내는 그에게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얘기 해보자고 한다. 그의 아내가 먼저 얘기한다. 

"당신의 아파트에 처음 들어갔을 때, 당신의 주소록을 살짝 들추어 보았어요. 내 이름을 적어 놓았나 싶어서요. 그때가 만난 지 2주쯤 되었을 때예요." (p.30) 

그러자 남자는 처음 데이트 했을 때, 자신이 왜 레스토랑의 웨이터에게 팁 주는걸 잊었었는지 얘기한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나는 당신과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묘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는 그녀에게는 물론 그 자신에게도 처음으로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정신이 산만해졌어." (p.33)
 

어우, 정신이 산만해졌다니. 비슷한 표현으로는 정신 사납다 쯤이 있겠다. 나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지다니. 정말 근사하다.
그 다음날의 정전. 여자가 얘기한다. 

"당신의 어머니가 지난번 우리 집에 다니러 왔을 때의 일이에요."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야근이 있다고 말하고서 질리언과 함께 마티니를 마셨어요." (p.38)
 

남자가 얘기한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동양문명사 시험에서 커닝을 했어." (p.39) 

 

사실 이 이야기는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이 보여주는 달콤한 분위기의 이야기는 아니다. 또 나는 사랑하는 남자 여자가 서로에게 백프로 솔직해질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몇가지쯤은 가지고 있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숨김없이 모든걸 다 얘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으면서는, 한번쯤 이렇게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불을끄고, 대신 촛불을 켜두는거다. 그리고는 그동안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해보는거지. 

당신에게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엄청 기뻤어요. 아닌 척 했지만 사실 나,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푹 빠졌거든요. 

반드시 촛불만 있어야 한다. 이런말, 불 켜놓고 하면 얼굴 빨개지잖아?  

한번도 그런적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테지만, 당신 핸드폰에 나는 단축번호 몇번인지 궁금해서 핸드폰 뒤져보고 싶어요.  

나는 단축번호를 지정하지 않고, 단축번호에 의미도 두지 않고, 단축번호로 전화걸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단축번호는 어떤 의미가 있는건 아닐까.  

매일 잠들기전에 잘생긴 남자연예인 생각한다는 거, 뻥이에요. 당신 만난 뒤로 당신 생각만 했어요. 

뭐, 이런 말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때 하는것도 좋을 것 같다. 아, 물론, 나 잠들기 전에 잘생긴 남자 연예인 생각하고 뭐 그러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단 둘이 정전속에 몇시간을 함께 있는다고 해도 내 모든 비밀을 말할 수는 없을거다. 이 소설속의 여자도 가장 중요한걸 내내 숨기고 있었으니. 아무리 어둠속에 있어도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끝내 할 수 없지 않을까. 음, 글쎄. 잘 모르겠다. 음, 역시 모르겠다. 음, 진짜 모르겠다. 암튼 줌파 라히리는 좀 짱인듯. 

 

이 책은 '40자평'을 쓰면 적립금5만원을 주는 이벤트 중인데, 그래서 뭔가 근사한 40자평을 쓰고 싶었는데, 아, 정말이지, 내가 이 책을 읽고 뭘 느껴야 할지를 모르겠다. 뭔가가 느껴질 듯 느껴질 듯 하는데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고, 그 희미한 느낌조차도 좀 헷갈린다.  

 

이 책은 하드커버도 아닌데 엄청나게 무겁다. 그리고 밀실살인인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 어느 통로로 침입이 가능하고 어디로 왔다갔다 하는게 가능하고 하는 설명들을 계속 하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머릿속에 전혀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이건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읽었을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책속에서 아파트에 대해 엄청 설명을 해줘도 대체 이 아파트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없는 거다. 뭐 별로 그리기도 싫고. 그러니까 나는 공간적인 감각이라고 해야하나, 공간 파악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게 엄청 모자란 인간인건데, 길치에 방향치, 그것도 모자라서 내가 지금 있는 층수가 몇층인지도 에스컬레이터 몇번 내려가면 도무지 종잡지 못하는 인간인데, 이런 (건물)구조적 설명이 가득한 책은 어휴, 완전 나를 미치게 한다. 밀실 살인이면 그냥 꽉 막힌 밀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만 하면 좋았잖아. 왜 천장을 뜯어보고, 화장실 천장과 연결되어있는지를 확인하고, 이방 저방 막 연결되고 아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 토요일.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내게 그랬다. 우리 한달에 한번씩은 만나고 살자고. 처음 만난 사람이 또 만나자고 하는것, 가끔 보는 사람이 자주 보자고 하는 것,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것. 이런건 쫌 좋다. 그러니까 뭐랄까. 괜찮은 사람 인증쯤 된달까. 나를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건 참 괜찮은 기분을 안겨다 준다. 음, 참 괜찮은 기분. 

- 1월1일. (나의)이십대부터 나를 알던 친구를 만났는데 갑작스레 그리고 우연히 삼십대부터 나를 알게된 친구와 합석하게 되었다. 그러자 삼십대때부터 날 알던 친구가, 이십대때부터 날 알던 친구에게 물었다. 

"다락방님은 이십대때 어땠나요?" 

아, 무슨 이런 질문을 하지? 이런게 궁금했나? 열나 참신한데? 어떻게 이런 예쁜 질문을 하지? 난 그 자리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예쁜 사람들은 원래 예쁜짓만 하는구나..  

- 어제. 후버까페로부터 카드를 받았다. 술과 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카드에는 쓰여져 있었다. 나는 나한테 술과 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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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든것들의 처음, 그 부질없음
    from 마지막 키스 2012-11-08 09:46 
    어느날 문득 다시 읽고 싶어졌을 때,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읽는것이 가능하다는 게 단편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장편소설이라면 책장에서 꺼내어 침대로 가 앉아 아무곳이고 펼쳐야 하고, 부분만을 읽어야 하지만(다 읽으면 잠 못자요), 단편소설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 완전한 이야기를 잠깐동안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장편소설을 좋아하지만, 잠들기전 문득 어떤 단편들이 떠오르는 때가 있다. 어제는 아침부터
 
 
2011-01-12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2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1-1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여. 반가워여.
제가 가끔 와서 다랑방님 페이퍼 되게 열심히 읽는 거 아셨어여?
몰랐죠? 아하하.
문득 생각난 건데, 어느 날 다락방님 페이퍼에 등장하는 책을 하나하나 다 담아둔 적이 있었어요.
구매로 이어졌는지 어떤지는 비밀.^^
오늘 기분이 되게 좋아서 몰래 왔다가 한마디 적고 갑니당.
노하지 마시기를.^^

다락방 2011-01-12 18:22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 아이리시스님 서재에 갔었답니다. 서재 퍼스나콘 사진을 크게 확대해 보기도 했는걸요. 아이리시스님도 몰랐죠?

아이리시스님이 오셨는데, 오셔서 이렇듯 말도 걸어주셨는데 제가 왜 노합니까.
:)

레와 2011-01-1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몇살때 만났더라..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만났을때부터 지금까지 다락방은 한번도 날 실망 시키지 않았어요.
알면 알수록 당신 참 괜찮은,은 부족하고 제대로 진국인 사람이라. ^^
다락방 덕분에 내가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아요.


그나저나 옛날엔 나만 좋아한다고 그러더니, 이 여자사람 이젠 바람둥이가 되어 버렸어. 에힝~

다락방 2011-01-13 08:11   좋아요 0 | URL
우리는 20대에 만났어요, 그쵸? 그러고보면 우리도 알아온 시간이 꽤 되었어요.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좋다니, 정말 신나지 않아요?
레와님은 나를 만나지 않았어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고, 또 그랬을거에요.

전 여전히 레와님을 가장 좋아해요. 창원에 사는 사람들 중에선.. ( '')

=3=3=3=3=3=3=3=3=3=3=3=3=3=3=3=3

2011-01-12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2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1-01-1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정전이 공포의 소재가 아니라 이렇게 로맨틱한 이야깃거리가 되다니 참 근사해요.
정전이 되어서 뭔가 하나씩 털어놓을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도 두근거리고, 무언가를 묻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도 막 설레어요. 전 다락방님이 더 짱인 것 같아요.^^

다락방 2011-01-13 08:14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유치하게 진실게임 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서로의 비밀들을 하나씩 어둠 속에서 고백하다니, 아우, 근사해요!
상대가 어떤 말을 하게 될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설레이고 두근거려요. 정말 그래요. 그가 말하기 직전까지, 숨을 참게 되지 않을까요?
마노아님도 짱이에요!
:)

브론테 2011-01-1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줌파 포에버~ !!!
'40자평'을 쓰면 적립금5만원을 주는 이벤트 ==> 그렇답니까! 그럼 빨리 뭐라도 느껴보세요!!!

다락방 2011-01-13 08:14   좋아요 0 | URL
저 이 댓글 읽고 완전 빵터졌어요. '뭐라도 느껴보세요' 라니요!
그나저나 현빈 군대 보내고 우린 어떻게 살수 있을까요? 아,,,,한숨나.....

외국소설/예술MD 2011-01-1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녕하세요. 청소년MD입니다.
<1월 0일> 이벤트는 일반 리뷰 및 40자평..입니다. 그러니 길게 쓰셔도 됩니다.;
맘에 드셨으면 좋았겠..는데요 ㅎ. 저는 좋았어서요.

아, 우주로부터의 귀환은 결국 읽으셨는지?

다락방 2011-01-13 08:15   좋아요 0 | URL
저 어제 메모장에다가 40자평을 멋지게 막 밤에 써놨는데, 아침이 되니까 도무지 올릴 수가 없네요. 음...밤에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침엔 부끄러워지는지....에휴.

[우주로부터의 귀환]은 사놓기만 했습니다. 네, 사놓기만 했어요. 사놓기만 한겁니다. orz

섬사이 2011-01-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크릿 가든을 보니까, 현빈은 식탁에 촛불을 켜놓던데요..
요즘은 좀처럼 정전이 되질 않으니까,
다락방님이 두꺼비집만 내려놓으면 될 것 같아요. ^^

그런데 현빈이 군대를 간대요?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다락방 2011-01-13 10:51   좋아요 0 | URL
해병대에 자원했대요. 1982년생, 184cm, B형의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해병대에 ㅠㅠ
너무 가슴이 시려요. 전 이렇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라에 또 빼앗기고 마네요. 저같은 일개 국민은 나라와 대항해 싸워 이길수가 없군요. 이 나라는 왜 .... 히융 ㅠㅠ 전 현빈을 군대에 보내고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하아- 한숨만 나와요.

두꺼비집 내리고......촛불.......아우 막 간질간질하네요, 섬사이님. 히히

비로그인 2011-01-13 19:36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해병대는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지원해도 탈락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아마도 육군 보병으로 가겠지요.(난 여자인데 왜 이런 걸 아는건가)

다락방 2011-01-16 20:25   좋아요 0 | URL
쥬드님,
해병대든 육군보병이든 뭐든 군대에 가는게 싫어요, 현빈이.
그렇지만 아마도 그를 보내게 된다면, 저는 아마 쉽게 잊겠죠. 여자의 마음은 갈대니깐요. ( '')

치니 2011-01-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40자평 쓰는 이벤트가 있었어요? 난 몰랐구만요. ㅋㅋ 그래도 써봐요, 다락방님이 어떻게 느꼈나 궁금증이 더해지네.

다락방 2011-01-13 11:34   좋아요 0 | URL
음....저 80바이트 딱 맞추기는 했는데 뭔가 좀 ..... 흡족하질 않아요, 치니님. 음...... 음....좀 마음에 안들어서..... 수정의 과정을 거쳐보고.....하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