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어두운 기억 속으로
여자는 공황장애와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출입문과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불안감이 솟구치는 날에는 세 시간동안 점검을 하다가 잠 잘 시간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그녀에게 지각은 일쑤고 그래서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조금 더 늦게까지 일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퇴근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지하철에서든 거리에서든 퇴근하는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의 강박증이 아프도록 내게 다가온 이유는 그녀가 문 점검을 하면서 숫자를 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꼭 여섯번을 센다. 그래야만 자신의 의식을 마친것이다. 물론 마쳤다고 그게 끝이 아니다. 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다시 점검하는 것이 일상이니까. 게다가 점검하는 도중 뭐라도 하나 흐트러지면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여러 차례 점검하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여자를 '정상'으로 봐줄 리 없다. 물론, 들키고 싶지 않은 장면이기도 하고. 나도 문을 잠그고난 후 몇 차례 확인하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 숫자를 센다. 그건 점검하는 횟수이기도 하고, 점검하는 동안 그저 세는 숫자이기도 하다. 강박증이 가장 힘든건, 내가 지금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때다. 물론, 알고 있다. 내가 좀 전에 점검했다는 사실을, 방금전에도 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주 작은 의심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게 가장 힘들다. 이걸 멈출 수가 없다는 걸.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여자가 아주 많이, 아팠다.
그녀의 강박과 공황 장애는 트라우마로부터 왔다. 그녀의 전 연인, 그토록 완벽했던 그 남자. 친구들도 모두 대체 어디서 저런 남자를 만나게 된거냐며 부러워했던 남자. 그녀가 불행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이건 뭔가 이상해' 라고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보다 그를 더 신뢰했다. 모두들 그녀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지독하게 너를 사랑하는 좋은 남자라고만 말했다. 그녀에게 부모님은 없었고,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얻어맞고 발길질 당하고 강간당하고 그녀의 집에 처박혔을 때, 그녀는 온전히 혼자였다.
왜 내 친구가 내 말을 믿지 않을까? 왜 내 상황에 귀 기울여주지 않을까?
나는 혹여라도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내 말을 믿어줄 친구가 있을까, 내 친구들은 내 말을 믿어줄까, 를 생각해보았다. 그럴때를 대비해서 내가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내 말을 반드시 믿어줘야 해' 라고 미리 말을 해두어야 하는건 아닐까, 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친구라 한들, 내 말을 믿어야 한다는 보증이 되는건 아니잖아? 이 책속의 여자도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했는데, 하물며 친구라고 어떻게 다 믿겠어? 그렇다면 내가 강해지는 수 밖에 없겠구나. 역시 나에게 닥친 문제는 나 혼자 해결할 수 밖에 없어. 강해져야 하는거야.
그런 그녀에게 윗집에 새로 이사온 남자가 다정하게 다가온다. 그는 그녀가 말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강박증을 알아채준다. 공황 장애에서 그녀를 끌어내오려고 노력한다. 그녀 대신 출입문을 점검해준다. 그녀에게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한다.
"기분은 좀 괜찮아요?"
"난 괜찮아요."
이가 딱딱 부딪치는데도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낮고 푹신하고 놀랄 만큼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무릎을 감싸 안았다. 갑자기 굉장히 피곤해졌다.
"나중에도 계속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요." 내 말에 그는 머뭇거리다가 차를 조금 마셨다.
"공황 발작이 일어날 것 같으면 나한테 알려주겠어요? 올라와서 노크할래요?" (pp.64-65)
누구에게 말하기도 힘들고 보여주기는 더 힘든 나의 강박 장애를 누군가 알아봐주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니, 나는 책 속의 이 장면에서 뭉클,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제발 그가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기를, 강박증을 떨쳐낼 수 있는 신뢰를 주기를 바랐다.
"여보세요?"
"안녕, 나예요." (p.309)
그가 여러 차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주고, '나예요' 라고 말을 할 때, 아, 정말이지 내 뱃속에 아주 따뜻한 스프가 한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리고 약한불로 보글보글 끓여지고 있는 느낌. 나예요, 라는 말은 친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건방지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예요, 라는 말은 애정을 가진 상대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속살거린다. 나예요, 라고 말했던 사람이 자꾸만 떠올라서 양 팔로 내 배를 감싸안고 싶었다. 그대로,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 책은 재미있다. 그리고 무섭다. 나로서는 아프기까지 하다. 그래서 자꾸만 책장을 넘기고 싶었다. 이 책에는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감탄할만한 문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감정 이입이 너무 심하게 된다. 나는 그녀를 따라 겁이 났고 그녀를 따라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문을 여러차례 점검하며 숫자를 셀 때 나는 같이 세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녀의 점검 과정에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서 자신의 집이 미묘하게 바뀌었다는 걸 인식하게 될 때, 나는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 책을 빨리 읽어야 했다. 그곳으로부터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러려면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끝에 그녀가 어떻게 되는지, 그러니까 그녀가 강박증을 이겨내는지, 출소한 전 연인과 맞서 싸우는지,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쪼록 강해지자.
이 책을 다 읽은 시간은 밤 아홉 시 무렵이었고 거의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 지하철 안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쪽으로 걷다가 나는 제과점에 들러 햄이 몇장이고 겹쳐져 들어가있는 샌드위치를 샀다. 당장 샌드위치를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샌드위치와 함께 속을 금세 뜨겁게 만들어주는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사다 놓은 와인이 없다. 일전에 내시경 하기전에 다 마셨는데, 그 때 사두면 내가 내시경을 앞두고도 와인을 마실 것 같아 사두지 않았더랬다. 그 뒤로 여태 사두질 않았더니 젠장, 정작 필요할 때 마시지 못하네. 어제 집에 가는길에 들르려니 정말이지 몸이 찢어질 정도로 피곤했어 -0- 오늘 사리라, 오늘 사 갈테닷.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