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디에 가서 설까, 하고 두리번거리는 일인데 요즘엔 그러면서 책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책 읽는 사람이 눈에 띄면 그 주변으로 가서 그 책이 무엇인가 하고 힐끔힐끔 쳐다본다. 표지를 보이게끔 들고 책을 읽는다면 어떤 책을 읽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표지가 보일락말락해도 그 책이 내가 읽은 책이라면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어떤 책일지는 추측이 가능할 때도 많다. 그렇지만 앉아서 책을 무릎에 펼쳐놓고 읽는다면 그 책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사람이 한 번도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책을 덮지도 않는다면 그건 그대로 미궁으로 ....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책을 읽는 여자가 보였다. 나는 그 근처로 가 섰다. 그런데 그녀가 무릎에 책을 대고 완전 집중해서 책장을 넘기는 거다. 고개를 단 한 번도 들지 않고, 책장을 단 한 번도 덮지 않고! 안그래도 궁금한데 더 궁금해지던 터. 종합운동장역에서 그녀의 옆자리 아저씨가 일어나 자리가 생겨서 앉았다. 그리고 힐끔, 그녀가 펼쳐둔 책장의 아랫쪽을 보았다. 책의 소제목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내가 그 책에 대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밑에 본문모다 크게 쓰여져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보았다. 이런 제목을.
쁠뤼메 거리의 목가와 쌩-드니 거리의 영웅전
사실 정확히 저 제목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쌩-드니 를 본 것 같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읽는 책에서 본 것 같은 소제목이었던거다. 그래서 저건 설마, 레 미제라블? 내가 요즘 본 것 같은 제목인데? 하면서 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본문에 눈을 돌렸더니 이런 단어가 딱! 보인다.
떼나르디에는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떼나르디에는 사기꾼, 꼬제뜨를 구박한 그남자, 사기꾼, 마리우스의 은인. 아, 저건 레미제라블이야! 그런데 판형이 나랑 다르던데. 표지가 어떤걸까, 뭘까, 하고 기웃대봤자 그녀는 여전히 책을 읽기에 열중. 그런데 삼성역에서 그녀가 내린다. 자리에서 일어서고 책을 덮었다. 나는 그녀의 책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읽은 책의 제목은 장발장 이었다. 으응? 저 위에 레미제라블이라고 써있기도 하군. 암튼 엄청 반가웠다. 내가 읽는 책이 물론 훌륭한 고전이기는 하지만, 현재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아닌데, 그 드문 책읽는 사람들 중에 나랑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니, 그녀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니. 반가운 마음이 와락 들어 정말 신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흑흑. 그러니까 지하철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는 일이 가끔, 아주 가끔 있기는 하지만(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를 읽는 여자를 봤을 땐 말걸고 싶었다니깐!),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책을 그 사람도 들고 있는 경우는 처음. 우하하하. 이 사실이 재미있고 즐거웠기 때문인지 급격하게 배가 고파져왔다. 고등어 튀긴거랑 밥 한그릇 뚝딱 먹고 왔는데 왜 벌써...
"날 얼마만큼 사랑해?" 라고 여자가 묻자 남자는 "하몽만큼 사랑해. 난 하몽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라고 말한다. 이건 자막으로 되서 나온 문장이고, 저 질문에 남자는 사실 이렇게 대답했다.
"하몽 .. 하몽."
이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하몽하몽이구나. 여자는 속옷가게에서 일하고 있고 남자는 하몽을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 그녀가 일하는 장면이 보이고, 남자가 속옷 모델 오디션에 참가하는 장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사실 일하는 장면이 그다지 나오질 않는다. 예전의 나였다면 얘네들은 왜 일을 안해, 일터를 그리 오래 비워도 되는거야? 하는 생각을 했겠지만, 스페인에서는 일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아, 저들은 저렇게 만나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락실을 가고 춤추러 가고 술을 마시고 하는 것들이 다 가능하겠구나, 여유롭겠구나 싶었다.
(이제부터 19금 내용 포함. 미성년자는 그만 읽으세요. 보호자의 각별한 지도를 요합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뭐, 뻔하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간략 줄거리는 이렇다. 속옷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는 속옷공장 사장의 아들과 연인관계이며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사장의 아들은 엄마에게 그녀를 허락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자는 점점 불안감을 느끼고, 이 사장(엄마)은 자신의 아들에게서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하몽배달꾼을 찾아가 돈을 주며 그녀를 유혹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하몽배달꾼이 돈을 받고 그녀를 유혹하려고 보니 그녀가 너무 예쁜거다! 그래서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만거다. 자꾸만 그녀를 따라다니며 구애를 한다. 자신의 손가락에 피가 났는데 이걸 니가 좀 빨아달라, 자신이 타르를 밟았는데 니가 이걸 좀 닦아줘라, 널 내여자라고 소문내고 다니겠다 등등. 그러면서 육탄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다. 여자는 계속되는 구애에 그에게로 끌리는 자신을 인정하는데........
영화는 로맨틱한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좀 허무하고 난장판인것 같은.. 여튼, 그런데 포스터의 저 장면. 저건 영화의 한 장면인데. 저 날은 비가 왔다. 여자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당연히 브래지어는 미착용) 비를 쫄딱 맞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구애하던 남자를 찾아간다.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채로. 남자는 그녀를 안고 외부에서(응?) 아니, 야외에서(이것도 아닌가...), 벌판에서(이상한가?) 여튼 바깥에서 그대로 섹스를 하게 되는데,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벽에 기댄것도 아니고 누운것도 아니고 선 채로 저렇게 여자를 안고 했던 것. 저게...가능한...건가? 그러니까 여자가 새털처럼 가벼우면.. 가능한 건가? 여자가 새털처럼 가벼워도 모든 남자들에게 가능하진 않을테고(체력이 약한 남자는 아주 많으니까), 저렇게 맨날 하몽과 마늘을 옆에 끼고 다니는 우람한 남자여서.. 가능한건가? 지면으로부터 들어올리는 것도, 무거운 걸 들고 움직이는 것도 모두 힘든일인데, 어떻게 그 두가지를 같이 할 수가 있지? 영화라서 가능한건가? 뒤에...그러니까 벽에 기댄것도 아닌데....어떻게 저게...되지? 뭔가, 난 좀 패닉..
오래전에 저 영화를 봤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저 남자주인공, 무려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그의 풋풋한 모습(극중 22살)을 보는게 너무 신선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비우티풀』, 『뉴욕은 언제나 사랑중』,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의 그보다는 확연히 젊은 모습이다. 좀 징그럽기도 하다. 뭐랄까. 너무..육덕진 느낌? 여튼 2년전인가,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는 결혼했단다. 실제로. 하몽하몽과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만났던 그들이..정말..결혼에 이르렀단다. 오!
어젯밤에 잠든 후로 오늘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눈을 떴는데 아침이라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주 푹 잘 잤다는 느낌이 들고 슬며시 기분이 좋아졌다. 훗, 한 번도 안깼네. 잘잤다. 어제 하몽하몽을 봤기 때문에 푹 잤나보다. 하몽하몽은 당연히 [19세미만 관람불가] 영화다. 난 이런 영화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