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친구가 팟캐스트로 김영하의 책읽는시간을 다운 받고 있다며 리스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와 '존 쿳시'의 『추락』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김영하에도, 그리고 팟캐스트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그냥 친구의 말을 듣기만 하고 말았는데, 오늘 오전에 잠깐 외근 나갈 일이 있어 어, 걸으면서 그걸 들어볼까, 싶어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가방에 있던 아이팟을 꺼내어 팟캐스트를 검색해 몇 개를 다운받았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와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무얼 들어볼까, 고민을 했다. 김영하가 책에 대해 소개를 해주고 감상을 얘기해주는걸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채로 그저 그렇게만 짐작하고, 올리브 키터리지를 선택했다. 선택하여 터치를 누르는데 어쩐지 설레였다. 아, 이건 뭐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 이건 감상을 얘기해주는게 아니라 순전히 그냥 책을 읽어주는 거였다. 꺅 >.< 신난다! 좋은데?! 나는 막 흥분했다. 아 좋다 조으다. 짱이다. ㅋㅋㅋㅋ 그런데 정말이지 얼마 되지 않아 좀 시큰둥해졌다. 김영하가 책 읽어주는 목소리가 그다지 썩......................내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아니네? 게다가 이 목소리는 올리브 키터리지에 어울리질 않아;; 그래서일까, 책의 내용에 집중이 되질 않고 겉돌았다. 아, 집중 안되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는 걸 듣기 보다는 내가 책을 읽어주는 쪽을 더 좋아하는게 아닐까, 하고. 이 생각을 하자마자 너무너무 책을 읽어주고 싶은거다. 김영하가 읽어준다면 나도 읽어주겠다! 막 의욕이 앞서서 나도나도 팟캐스트로 올려야지, 다락방의 책 읽어주는 여자, 라고 해서 시그널도 깔고 아주 잘 읽어줘야지, 하는 생각이 막 샘솟아서 미치겠는거다. (이래뵈도 **은행의 지점장이 자기네 지점에 와서 직원들한테 말하기 교육 좀 시켜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 있음 --V) 외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어디 조용한데 들어가서 소리내어 책을 읽고 그걸 녹음하고 싶은거다. 그런데 나는 ㅠㅠ 팟캐스트에 어떻게 올리는지 몰라...나는 울트라슈퍼컴맹 ㅠㅠ (혹시 아시는 분 계시다면 좀 알려주세요. 저 진지해요.) 나 어쩐지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아........아쉬워. 나 진짜 하고 싶은데........
그러다가 이 책은 다른 남자가 읽어줬으면 좋겠다,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했던 그 남자. 그 남자 목소리라면 참 좋을텐데. 아니 그건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해서 그런건가? 갸웃 갸웃 하다가, 그와 통화했던 어느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늦은 밤이어서 나는 침대에 앉아 수화기를 들고 있었고, 그는 늦게까지 근무중에 나랑 통화를 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늦은 밤, 갑자기 사무실에 어떤 일이 생겨 그는 수화기를 입에서 조금 떨어뜨린 채로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지시하는 말이 내게 작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나랑 통화할 때와는 다른 억양, 다른 말투, 다른 목소리. 그때 갑자기 그로부터 힘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있는 어떤 이보다 그가 더 힘이 세다는, 그가 더 직위가 높다는, 그가 더 권력을 가졌다는 그런 느낌. 그 느낌이 내게 어떤 거부반응을 주는게 아니라 굉장히 섹시하게 느껴지는거다! 그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아, 나는 권력을 좋아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힘있는 자에게 끌리는가, 나는 강한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세상에,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그 순간의 그가 좋아서,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걸 듣고 나는 순간 쑝가서, 아, 정말 미치겠는거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내가 그때 그런 마음이었다고, 그런 두근거림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나만이 이렇게 가끔 떠올리면서 또다시 두근두근 할 뿐이다. 그 때 생각을 하면 정말 미칠것 같아.
그러다가 다시 김영하가 책 읽어주는데 집중을 하려고 하는데 마침 올리브가 디저트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내오고 있는 장면을 읽어주고 있었다. 헨리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드니즈도 자신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는 별 느낌을 받지 않았지만, 이 장면이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무척이나 좋다고 말했던 B 님이 떠올랐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이 장면, B 님이 엄청 좋아하는 장면인데...
그러자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 대해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그가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를 않고, 그래서인지 그 내용에 집중도 안되지만, 그가 읽어주는 걸 듣고 있노라니 내가 하고 싶은 어떤게 떠오르고,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남자와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고,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러니 이것은 퍽이나 의미있는 게 아닌가. 김영하가 주려고 했던 의미와 내가 받은 의미는 전혀 다를지 몰라도, 내 의미는 어차피 내가 만드는 것 아닌가. 김영하는 거기에 아주 중요한 매개체를 제공해 주었다.
미처 다 듣지 못하고 정지를 누른 그 때, 그 순간은,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