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가 읽기에 무리가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호자의 지도가 필요함을 말씀드리며, 가급적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다락방)
어젯밤에는 늦게까지 잠이오지 않았다. 자고 싶어 미치겠는데 눈이 말똥말똥.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나는 갑자기 찾고 싶은 문장이 있어서 새벽 한 시를 넘긴 시간,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 안의 불을 켜고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금세 찾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쿠야,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책에 내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은 이지경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 포스트잇이 붙여진 곳을 죄다 넘겨보게 됐는데, 하하하하하,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맞어, 이 책은 웃겼지. 너무 재미있었어. 이 책을 읽다가 너무 웃겨서 언제고 한 번 페이퍼를 써야지 싶었었는데 잊고 지냈구나. 어제 침대에 앉아서 내가 밑줄 그어둔 문장들을 보면서 그 새벽에 혼자 웃었다.
사춘기는 남녀가 짝짓기 경쟁의 무대에 진입하는 시기이다. 그들은 배우자 선택과 배우자 호리기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면서 활동을 개시한다. (p.41)
하하하하하. 보이는가. 배우자 '호리기'! 맙소사. 이게 그러니까 책에 나와도 되는 단어인건가? 이때부터 이 책은 보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는데, 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섹스에 대해 말하는 책이니만큼 성기와 처녀막에 대한 문장도 여러번 등장하는데, 그중에 남자의 성기에 대한 이런 문장이 있다.
매스터스와 존슨은 300개 이상의 축 늘어진 페니스를 조사했는데 가장 큰 페니스는 길이가 14센티미터(브라트부르스트 소시지 크기 정도)로, 그 물건을 보유한 남성의 키는 168센티미터였다. 미발기 상태의 가장 작은 페니스는 길이가 5.7센티미터(아침식사용 소시지 크기 정도)였고, 다부진 체구의 그 남성은 키가 178센티미터였다. (p.230)
아.......정말.................브라트부르스트 소시지는 대체 어떤........내가 뿜은 부분은 '아침식사용 소시지 크기'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하아- 나는 아침을 소시지로 먹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일반적으로 아침에 먹는 소시지는 크기가 매우 스몰한가보다. 수제소세지.......인가? 그냥 궁금하네. 하하하하하.
이뿐만이 아니다. 사실 내가 소리내서 웃은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아, 미치겠어.
휴가로 떠난 그리스의 해변 휴양지에서 파비오란 남자와 벌인 격정적 정사를 몇 년이 흐른 뒤 집에서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은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 대고, 개새끼는 산책을 시켜 줘야 하며, 두 배우자 모두 일로 녹초가 된 상황에서 말이다. (p.237)
아 진짜 어떡해. 저 '개새끼' 란 단어는 내가 쓴 게 아니다. 정말로 책에 저렇게 표현되어져 있다. 원문을 읽어보지 않아서 대체 어떤 단어가 쓰여져 있길래 저렇게 표현된건지는 모르겠지만, 격정적 정사 대신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아주 잘 담겨져 있지 않은가. 만약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면 '기르는 개를 산책 시켜 줘야 하며' 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무려 개.새.끼.를 산책시킨다. 아, 나 진짜 미칠뻔 했어.
작가나 혹은 번역자 혹은 둘 다가 유머감각이 대단한 것 같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여자들이 고기 제공 능력을 성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들은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성행위 파트너를 후릴 때 고기를 이용하며 다른 남자의 배우자를 빼앗을 때도 고기를 이용한다. (p.273)
웃긴건, 41페이지에서는 '호리기'라고 표현했으면서 273페이지에서는 '후리기'로 표현했다는 거다. 호리기와 후리기의 기술은 차이가 있는걸까? 하하하하. 게다가 파트너를 후릴 때 고기를 이용..............아 나 진짜 돌아버리겠다. 다른 남자의 배우자를 빼았을 때도 고기를 이용................나는 이런식의 섹스에 관련된 어느 설문조사에도 응한 적이 없는데, 273페이지의 인용문을 보노라니, 흐음, 나의 도플갱어가 대답해줬나 싶다. 아...쓰러지겠다. 성행위 파트너를 후릴 때 고기를 이용.......
이 책은 무려 이런책인거다!!
자, 이 웃기는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찾고자 했던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옛날 남자친구 얘기를 해 드리죠. 그는 온라인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답니다.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는 채팅을 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살았어요. 나는 환상 속의 그녀를 누르기 위해 관능적인 짓은 그 어느 것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녀는 남자친구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뭐든지 얘기해줬어요. 말하자면 그녀가 그의 판타지를 충족해 준 셈이죠. 실상 한 번도 존재해 본 적이 없는 누군가와 내가 경쟁을 했던 겁니다. 그 경쟁은 그랑 하는 게 아니라 그녀랑 하는 시합이었어요. 그가 이 "환상 속의 여인"과 나를 비교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나느느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줄곧 노력해야만 했죠. -이성애자 여성, 41세 (pp.171-172)
싸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위의 인용문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환상 속의 연인'이 그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의 여자'가 그러하다. 그들과는 싸울 수가 없다. 나는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해야한다. 물론 싸우지 않는게 가장 현명하다. 싸울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환상 속의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들을 듣고 심드렁하게 가만히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하지 않은 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져서 내 스스로가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갑자기 이 문장이 생각난 건, 요 며칠 내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일곱번째 파도』를 자꾸만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다음이야기이고, 또한 이 책을 읽었다면 알 수 있듯이, 새벽 세시속의 레오와 에미를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팬서비스 같은 이야기이다. 내가 요즘 생각한 건 이 책속에서 레오와 에미가 드디어(!)만남을 가진 후, 바로 그 직후의 에미와 레오이다. 그들은 '처음으로' 얼굴을 맞닥뜨렸고 함께 차를 마셨으며 함께 이야기했다. 그러나 레오도 에미가 자신을 만난것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에미 역시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점이 그들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메일로 충분히 교감하고 사랑했으니까. 서로에게 집 같은 존재였으니까.
레오는 그 첫 만남후, 에미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메일함의 어떤 것도 카페 테이블로 옮겨지지 않았어요. 에미 당신의 기대는 무엇 하나 채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레오 라이케라는 현실의 인물에 관한 한 어느 정도 실망했어요. 아니, '실망'은 지나치게 후한 평가일 거예요. '깼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적절하죠. 정신이 번쩎 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진짜 그 남자야. 레오 라이케. 아, 그래, 그렇지 뭐." 당신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요. 맞죠? (p.58)
에미 역시 그에게 말한다.
축하해요, 레오. 내 외모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고 그래서 당신은 몹시 당황했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p.61)
정말이지 아주 갑자기 이 부분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의 나를 떠올렸다.
온라인 상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 공간을 통한 만남을 가져봤을 것이다. 에미와 레오가 그랬듯이 이메일로 사랑에 빠져보기도 했을 것이며, 만나고 싶어서 간절해지기도 했을것이다. 만나서 실망해본 적도 있을것이고, 만나서 사랑에 빠졌던 적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 때의 나는 그와 이메일로 사랑에 빠진 상황도 아니었고, 그의 글을 보며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든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기대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아, 그때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정말이지 '큰일났다' 하는 느낌에 사로잡혀서 긴장이 됐다.
I loved you from the first time I saw you.
아니, 나는 그 날, 그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정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큰일났다, 만나지 말걸. 속으로 욕을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젠장.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 걸 원치 않는데. 나는 냉정해지고 싶었고, 중심을 잡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무엇보다 너무 강했고, 그런 넘치는 의욕은 언제나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내내, 내가 그를 실망시켰다는 생각때문에 몹시도 괴로웠다. 마음은 진정할 줄을 몰랐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냥 우리는 이걸로 끝이구나, 하는 생각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아팠다. 아니, 뭘 기대했니. 넌 뭘 어쩌려고 나간 건 아니잖아. 스스로 타일러 보아도 위로가 되질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이어서 더 답답했다. 우리의 만남은 그때가 전부였구나 싶었다. 어떻게든 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내가 얼마나 떨리고 흥분했는지, 얼마나 설레였는지를 그대로 다 드러내면 오히려 부담스러운 여자가 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이미 첫만남에서 나에게 실망을 한 그에게 다음 만남을 제안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지만 연락하지 못했다. 며칠을 전전긍긍하다 내린 고민은 그를 그냥 거기에 그대로 두자, 였다. 그것말고는 달리 더 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를 만나기전처럼, 그렇게 지내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하루를 이틀을, 그리고 얼마가 될 지 모를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가,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손끝으로 삼십 초에 한 번씩 상상 속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는 그 에미를 생각해요. 사물들을 마침내 자기가 글로 묘사할 때처럼 날카롭고 명확하게 보고자 눈에서 베일을 벗겨내려는 듯이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자꾸 쓸어넘기던 그 에미를요. (p.72)
레오는 에미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미가 자신에게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미는 레오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가 자신에게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실망은 그들이 준 게 아니라 내가 혼자 느끼는 것일 뿐이었다.
그 다음,
그 첫 만남이 있고난 후에 레오와 에미가 어떻게 됐는지는 『일곱번째 파도』를 읽으면 알 수 있을 테고, 내가 그와 어떻게 됐는지는.. 훗.
나는 그 날, 우리가 처음 본 그 날,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그런건, 그냥 아는거야.
방금 외근 다녀오는 길에 찍은 사진.
그나저나, 나는 왜이렇게 봄만 되면 미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