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약해지고 가장 추해질때는 관심받고 싶다는 욕망이 극에 달했을 때인것 같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한 사람을 '그런면이 있는지 모를정도로'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사랑하는 순간은 반짝반짝 빛날지 몰라도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더 많은 관심을 욕망할 때에는 바닥으로 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한다. 일전에 봤던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에서 여자가 영아의 시체로 만든 만두소를 넣은 만두를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름다워지고 싶었기 때문이고 아름다워지고 싶었던건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면 더 아름다워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런 욕망이 없었다면 그런 만두를 찾아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자꾸만 자꾸만 저 안에 깊숙하게 밀어두었던 추한면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건,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나는 특별히.
『이혼지침서』의 「처첩성군」에도 그런 여자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녀들이 원래부터 '그런 성격'을 가졌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들이 누군가의 '단 하나의 여인'이었다면 그런 성격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남자의 첫번째 부인, 두번째 첩, 세번째 첩, 네번째 첩이었다. 네명중의 한명이되, 그들중에 가장 특별하기 위해서 그들은 남달라야 했다. 더 예쁘거나 더 표독스럽거나. 자신이거나 자신의 아이이거나 누군가는 특별한 사랑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그걸 원했다. 아, 그러나 너무나 짜증난다. 그들이 사랑을 갈구한 대상은 사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제삼자 혹은 독자인 나의 생각일뿐, 그들에게 그는 단 하나뿐인 남편이 아니던가. 남자에게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았다면 여자들을 그렇게 많이 첩으로 두지 않았을텐데. 여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 현명한 여자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 책을 읽다가 나는 중국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신경질적이냐고 친구에게 물었었는데(소설 한 권 읽고 생각한거임), 친구는 그런 경향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그런걸지도 모르겠다며. 「처첩성군」에는 한 집에 있어야 할 여자의 수가 너무 많아 그들의 나쁜면들이 표출되었다면, 「이혼지침서」에서는 (아마도)사람이 너무 많아 다들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고 해야할까. 왜 한 남자가 이혼하는게 이토록 힘든걸까. 세상에. 그가 집 밖으로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신경질적이다(물론 집 안에서도 그렇지만). 대체 이런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생활하나 싶을정도로. 목욕탕 주인도 짜증을 내고 전차의 차장도 짜증을 내고 매표소의 여직원도 짜증을 낸다.
그런데 그가 돈을 쥔 손을 창구 안으로 집어넣자, 여자 매표원이 힘껏 그 손을 밀어냈다.
"어디다 손을 쑥 집어넣는 거야?"
양보가 말했다.
"표를 사려고요. 베이징행 침대차요."
매표원이 무슨 물건으로 책상을 탁탁 쳤다.
"누가 표가 있대요? 침대차는 다 팔렸어요." (이혼 지침서, p.156)
대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왜 다들 그렇게 짜증을 내는걸까. 세번째 단편인 「등불 세 개」에서는 짜증내는 아버지가 나온다.
달구지 위의 사람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그제야 소녀가 든 물고기를 똑똑히 보았다. 러우샹의 아들이 소리를 질렀다.
"흑어(가물치를 말함-옮긴이)다! 우와, 굉장히 크네!"
러우샹이 몸을 돌려 아들의 뺨을 때렸다.
"흑어든 백어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러우샹이 성을 내며 말했다. (등불 세 개, p.226)
아...신경질나......읽다가 내가 다 신경질이 난다. 왜이렇게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가득가득할까. 이 작가가 소설을 위해 과장한걸까 아니면 정말로 이런 사람들이 태반인걸까. 그들 모두는 정말 사는게 너무 힘겨워서 짜증이 몸에 밴걸까. 게다가 제멋대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이혼하자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잔인한 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애기 낳기 전에 내가 매일 발 씻을 물 떠다준 거 기억 안 나? 임신 8개월 땐 몸도 불편한데 입으로 즐겁게 해줬잖아. 말해봐, 내가 뭘 못 해줬지? 말해보라니까!" (이혼지침서, pp.133-134)
아내가 남편의 이혼하자는 말을 예측하지 못했고, 분하고 억울하고 당황스런 마음이란건 알겠지만, 남자와 여자가 헤어질 때 '내가 너한테 과거에 이렇게 잘해줬잖아' 하는게 그를 붙들어둘 이유가 될 수는 없을것이다. 그건 상대방의 '양심'에 호소하는 일이니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와 헤어질 결심을 한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의 양심이 다시 나를 선택하게 했다고한들, 그 삶은 행복할까? 그 삶은 체념과 단념으로 유지되는게 아닐까. 그런식으로 유지되는 둘의 생활이,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게다가 아내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오빠들에게 폭력을 부탁하기도 한다. 폭력으로 돌린 그의 마음이 다시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볼까?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세상 모두가 그를 나쁜놈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두가 그의 이혼을 막는다. 당연히 그의 이혼을 지지하는 그의 내연녀 조차도 그를 하찮은 남자로 만들어버린다. 이럴땐 어쩌나, 체념하고 여전히 그녀의 남편으로 사는것이 세상 모두가 바라는 일이고, 가장 편한 길인데,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걸까. 도망치는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기꺼이 다른 나라로 도망가 버릴것만 같다. 멀리 멀리.
토요일에 이 영화를 보는 극장안에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여자였다면 멀리 멀리 도망갔을거라고. 여기와는 다른 먼 곳으로. 그것만이 마치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꿋꿋하게 그곳에 남아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려고 노력하지는 않을거라고, 그 힘든 상황을 선택하지는 않을거라고. 차라리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이해받기 위해 설득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은채로 그저 내 삶을 사는쪽을 택하겠다고. 물론 그러기엔 정착할 돈이 없는 상황도 상황이지만, 나는 도망치고 싶어졌을것이다. 그녀가 견딜수 없는 남편을 피해 선택한 이곳은 그렇다고 더 나은곳도 아니었다. 명예살인이 아직 살아있는 이곳에서 그녀는 왜 자신의 가족을 설득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걸까. 그러나 또 어찌 예측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거라고 말했던 가족들이 자신을 내칠수 있었음을.
이 영화에는 내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고마워하는 것들이 담겨져있다. 여기가 아닌 다른곳의 현실을 알려주는 일. 그러나 이 영화는 포스터 제목에 써있듯이 '통렬히 가슴을 뒤흔들'지는 않는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영화였는데, 결말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고 해야할까. 그러니까, 결론이 일어날 만한 상황이란건 충분히 알겠고 이해가 되는데, 그 상황에 맞닥뜨린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왜 그녀는 뛰지 않았을까, 왜 그녀는 지나가는 차들을 멈춰 세우지 않았을까. 왜 그저 그렇게 있었을까. 아무리봐도 그 상황에서 '그럴수 밖에 없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어제 자정을 넘긴 시각, 노크를 하고 남동생이 내 방에 들어왔다. 왜 안자냐고 묻길래 나는 책을 읽는 중이라고 말했고,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미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동생은 '스티븐 킹이야?' 라고 물었다. '아니 요네스뵈' 라고 나는 대답하고 어떡하지 잘까, 했다. 남동생은 그만 보고 자, 꿈꾸잖아. 라고 했고 나는 알겠다며 잘자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러나 책 읽기를 멈추기까지는 또 삼십 분 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이 책은 무섭다. 나는 이제 앞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을거라는 걸 인식한 사람의 공포감이 그대로 전해지고, 숲과 어둠에 대한 공포감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래서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도 자꾸만 책장을 넘기고 있다. 나의 공포심은 136페이지에서 최고를 찍었다. 하아-
빨리 다 읽고 싶을만큼 흥미진진한데 다시 책을 펼치면 그 공포감이 또 전해질까봐 두렵다. 어휴.. 역시 이런 책은 밤에 읽으면 안되는거였어. orz
지난주에 갑자기 윌슨 필립스의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내가 엄청나게 재미있게 봤던 영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삽입되었던 곡.
바람이 몹시 불었는데 이 노래를 찾아 듣고 있자니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오래전에는 이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즐겨듣지도 않았는데, 오래된 노래는 그 자체만으로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어떤 추억도 가지고 있질 않은데, 어쩜 이렇게 반갑고 좋을까.
월요일 아침이다. 어젯밤에 느꼈던 무서움은 이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