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의 어느날, 회사의 남자직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2차를 갔는데, 거기는 여자사람이 접대를 해주는 곳이었다. 술을 따라주고 비스켓에 치즈를 발라주는 그런 곳. 나는 그런곳을 처음 가봤고 꽤 난처했는데, 이런데서 내가 난처해하면 그 직원분이 더 난처할까봐 난처하지 않은 척 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런곳인줄 진작 알았다면 나는 그들만 가라고 했거나 다른곳엘 가자고 했을텐데 이미 자리에 앉아 술을 주문한 뒤에야 그런곳인줄을 알게 되어서 중간에 일어날 수도 없었다. 남자직원들은 셋이었는데 둘은 나보다 직급이 아래였고 한명은 나와 같았다. 그곳에 있는 여자라고는 접대를 해주는 직원과 나, 둘 뿐이었는데,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는 자연스럽기 위해 노력했는데 나중에 그 자리가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길에서야 내가 자연스럽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직업적으로 차별한것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내가 차별하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이 오히려 차별을 의식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니까.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게 더 나았는지를 모르겠다. 뚜렷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한 명의 여자는 술을 따라주고 한 명의 여자는 접대를 받고. 그곳에서는 그녀가 직원이고 나는 고객이니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차별하지 않는것이었을까. 그자리에서 어떻게 하는것이 최선이었을까. 어떻게 하는것이 현명한 것이었을까. 우와- 진짜 머리 깨지게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도 그리고 다른사람들에게도, 그게 왜, 어디가 어때서, 라고 말은 하지만 내 머릿속은 차별하고 있었던거다. 그래서 '자연스러워야지' 라는 다짐을 했던거다. 내가 그녀의 직업을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참담한 기분도 난처한 기분도 느끼지 말았어야 했겠지, 자연스러워야지 라는 다짐 따위도 필요 없었겠지. 나란 인간도 별 수 없구나.
갑자기 이 일을 떠올린건,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읽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의 이 부분.
히긴스 네가 돌아온다면 나는 언제나 너를 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대할 거다. 나는 내 성격을 바꿀 수 없고, 매너를 바꿀 마음도 없거든. 내 매너는 피커링 대령의 매너와 똑같은 거란다.
리자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분은 꽃 파는 소녀를 공작 부인처럼 대해 주세요.
히긴스 나는 공작 부인을 꽃 파는 소녀처럼 대한단다.
리자 알았어요. (차분하게 돌아서서는 유리창을 바라보고 오토만 의자에 앉는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한다 이거죠.
히긴스 바로 그거야.
리자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죠.
히긴스 (웃으면서, 약간 누그러져서) 모든 면에서 그 비교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일라이자, 네 아버지가 속물이 아닌 것은 맞는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신의 특이한 운명이 인도하는 대로 인생의 어떤 상태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거다. (진지하게) 중요한 비법은 나쁜 매너, 훌륭한 매너 또는 어떤 특별한 매너를 지닌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매너를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마치 3등칸이 없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똑같이 소중한 천국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pp.187-188)
나는 그녀가 3등칸에 탔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3등칸의 존재자체를 내가 인식하고 있으며 그녀가 3등칸에 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3등칸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처음엔 그토록 재미없더니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나는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에는 흥미가 없지만 유독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에게는 관심이 많다. 이 책에는 무려 천사가 나온다. 정말로 날개달린 천사. 그 천사와 괴물종족인 키메라의 싸움,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키메라가 괴물이어서 괴물이 아니라 천사가 그들을 괴물이라 부르기 때문에 괴물이다. 어쨌든 이 책이 갈수록 흥미있어지기는 해서 중간즈음을 지날때는 다 읽기는 읽되 앞으로 나올 시리즈는 책으로 읽지는 말고 영화 개봉되면 보자 싶었다. 그런데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자 다음 시리즈도 책으로 살까 싶어지기는 한다. 하하. 뭐, 아마도 책을 안살 것 같기는 하지만 또 모르지.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하긴하다.
마음에 안드는 점도 몇 가지 있다. 주인공이 빼어난 미녀라는 것도 그렇고 그런 그녀를 시샘하는 안예쁜 이복자매가 나오는것도 별로다. 왜 늘 안예쁜 애만 예쁜 애를 시기해야 하는걸까? 예쁜 애가 안예쁜 애를 시기하면 좀 안되나? 게다가 열 일곱살 소녀가 유산상속으로 인해 돈 걱정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것은 유독 거슬린다. 아 싫어..물론 그녀가 일가친척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야 하니 돈벌이 까지 하게 된다면 더 고통스럽고 그런 현실도 짜증났겠지만, 마법을 쓸 수 있는 소녀가 부자이기 까지 하다는 건 좀 신경질난다. 프라하에 거주하면서 친구의 생일 선물을 프랑스 파리에 가서 사오다니, 이건 정말 판타지이니까 가능한거 아닌가. 흥!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건 슬프다. 시 하나 하나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못 알아먹겠다. 이해 자체가 불가. 그래서 슬프다.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내가 그걸 이해만 한다면 굉장한 시가 될 것 같은데, 도무지 무슨말인지를 모르겠다. 뭘 뜻하는지도. 이 얇은 시집을 읽는내내 양미간은 찌푸러져 있었을 것이다. 집중 빡 하고 읽었는데도 도대체 무슨말인지를 모르겠어....하아-
영화속에서 하정우는 채식주의자다. 최근에 헤어진 그의 前여자친구는 그에게 "니가 감자탕만 먹을줄 알았어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게 그렇다. 별 거 아닌것 같은 이유다. 돈 때문에, 식성 때문에, 종교 때문에 헤어졌어, 라는 말은 제삼자가 듣기에 그게 헤어질 이유가 되니?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테지만, 당사자에게 그것은 단지 그 표면적인 이유보다 더 내밀한 무엇이다. 감자탕을 못먹기 때문에 헤어질 수 있냐고? 있다, 물론. 나는 그녀가 그에게 감자탕만 먹을 줄 알았어도, 라고 말하고 돌아서는게 이해됐다.
물론 감자탕은 애인이 아닌 친구1과 먹어도 되고 직장동료 2와 먹어도 되며 식구들과 먹어도 된다. 그렇지만 매번 매순간을 그렇게 하다가도 불쑥,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것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것이다. 보글보글 끓는 감자탕 냄비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감자와 미나리를 듬뿍 그릇에 퍼주고 싶은 그런 마음, 가장 큰 뼈다귀를 골라 나의 그릇에 떴을때의 그의 표정을 보고 싶은 마음, 소주를 곁들여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그런 마음, 나의 외투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의 외투에서도 감자탕 냄새가 나는것을 느끼고 싶은 그런 마음. 내가 감자탕을 먹고 싶을때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식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물론 감자탕 뿐만이 아닌 다른 자잘한 이유들이 그 뒤에 줄을 서 있었겠지만 '감자탕만 먹을 줄 알았어도!' 라는 표면적인 그녀의 이유를 나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싱글이 짱이야..
친구가 코털정리기를 사달라고 해서 오늘 주문해서 보내줬다. 하하하하하. 부디 나의 선물로 인해서 코털이 코 바깥으로 삐져나오지 않는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할텐데.....( '')
토요일밤 열한시 이십분. 집에 돌아왔는데 너무 너무 라면을 먹고싶은거다. 이시간에 라면을 먹고싶다, 고 문자를 보내면 모두가 내일 아침에 후회할테니 참고 자라고 말할것 같아서 나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라면을 먹었다. 먹지말라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러브 픽션』 얘기하면서 겨드랑이 털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는데 ... 그건 다음기회에 해야겠다. 너무 길어졌으니까 패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