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십팔개월을 보내고 있는 조카는 '엄마', '아빠' 같은 기본적인 단어 외에 말할 수 있는 단어가 거의 없지만 참 신기하게도 텔레비젼이든 장난감이든 음악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춘다.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팔을 휘젓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한다. 목을 까딱까딱 움직이기도 한다. 모든 아기들이 음악에 반응하는걸까? 음악에 반응하는게 인간의 본능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의 타고난 성향인걸까? 만약 음악에 반응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성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본능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특정한 악기'에 반응하는 건 개인의 성향이겠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특유의 서정적 언어로 아름답게 그려낸 한 소녀의 눈부신 성장기'라고 쓰여져 있는데, 그녀가 납치되었었고 누군가에게 팔려갔으며, 누군가의 괴롭힘을 피해 달아나고, 프랑스의 파리로 도망가고, 남자들의 유혹을 받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래 '성장기' 에 따라오는 자연스런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가 음악을 만나는 부분이다. 그녀는 팝송이나 샹송에 이끌리는게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하철 역에서 두드리는 북소리에 이끌린다. 정확한 단어를 구사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자신의 입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뜻모를 중얼거림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타악기들의 소리에 이끌리고 그 장소를 매일 찾는다. 나에게 이것은, 그러니까 '소녀가 타악기의 소리에 이끌리는' 것은 꽤 신선해서 이 소설이 여느 성장기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의 고향, 자신이 돌아가야 할 그 모든 장소는 결국은 아프리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피부색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들려주는 음악에 이끌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밤이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되었다. 그리하여 톨비아크, 오스테를리츠, 레오뮈르 세바스토폴 역으로 다른 바퀴벌레들을 만나러 갔다. 우리만이 아는 길을 통해 지하철 통로 안으로 들어서면 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마술적인 소리였다.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음악에 이끌려 바다와 사막을 건넜다. (p.154)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묘하게도 전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가장 닮아있는 듯한 영화, 『비지터』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영화 『비지터』에서도 타악기를 두드려대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곳으로부터 이 땅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속의 주인공은 그 소리에 이끌린다. 그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그러니까, 피아노가 아니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이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행위에, 소리에 열중하고 빠져들게 된다.
악기에 끌리는 것은 대체 어떤것일까. 그것은 언제 어떻게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끌리는 악기는 내가 만나야 하는 악기인가.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악기인가. 나는 어릴때 몇 년간 피아노를 배웠다. 텔레비젼에서 피아노 치는 여자가 나오는 걸 보고 막연하게 저걸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고 그래서 열심히 했다. 나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피아노의 천재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후에야 나는 피아노에 재능이 없는 아이였다는 걸 깨닫게 됐다. 나는 악보를 외우지도 못했다. 처음 보는 악보를 훌륭하게 연주하지도 못했다. 내 주변에서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가 어떤 악보든 한번에 척척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왜 저 아이는 저게 되고 나는 저게 되질 않는것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던 친구들은 몇개의 악보를 외우고 연주할 줄 알았다. 나는 외워서 칠 수 있는 것이 단 한 곡도 없었다. 나는 피아노에는 영 재능이 없는 아이었는데, 왜 그때는 내가 스스로를 피아노의 천재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피아노로 진로를 정하지 않은것은 다행중에 또 다행인 일이다. 물론 내가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했다면 아마도 주변의 모두가 말렸을테지만.
어쩌면 내가 반응하는 악기는 첼로가 아닐까, 바이올린이 아닐까. 비탈리의 샤콘느를 들으면서 생에 처음 좋아하는 클래식곡이 생겼으니까. 미카의 「any other world」를 들으면서 나는 (아마도)첼로 소리에 반했으니까. 어쩌면 나는 현악기에 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닐까?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책 속에서 소녀는 어릴적에 납치를 당해서 팔려갔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에서 '아기를 파는 일'에 끼어들게 된다. 물론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도 아니고 소녀가 한 일은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를 소개시켜주는 일이었지만, 내가 또 소녀가 놀란 건 소녀가 누군가에게 '팔린'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팔렸었는데 누군가를 파는 일을 돕는다는 것이 소녀에겐 어떤 것이었을까. 이 장면은 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는데, 우리는 자신이 '아직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들중 하나였다. 만약 내 눈앞에 닥쳤을 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됐을지, 대체 어떻게 우리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도 없는 가난한 아기를,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잣집에 파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해해야 할 부분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비난해야 할 부분인걸까? 이 일은 이 책속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것도 아닌데 나는 또 머릿속이 복잡해져가지고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자유로운 세계』를 떠올리고 말았다.
이 영화속에서 여자는 돈 없는 노동자였다. 착취당하는 것이 일상인 가난한 삶을 살던 그녀는 자신이 노동자와 일터를 연결해주는 중간일을 맡기로 하고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게 된다.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많이. 그녀가 가져가는 돈은 많아지고 급기야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게 된다. 그녀의 행태가 못마땅했던 친구는 그녀에게 니가 하는 짓은 나쁜짓이다, 고 말하며 비난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바꿀 생각이 없다. 노동자들은 그녀에게 항의하지만 그녀는 자꾸만 불어나는 돈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자신의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다, 여유롭게 살고 싶다. 노동자들이 지금 살고있는 이 삶을, 고통과 착취의 일상을 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아는데, 그런데 그녀가 그런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준다.
그 상황에 놓여있지 않을 때 그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다. 내가 선택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정작 그것이 나의 일에 되었을 때, 그때도 나는 정의로울 수 있을것인가.
또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소녀는 친구의 할아버지를 매일 찾아가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에서 등장인물 중 한명인 할아버지는 범인에게 '너에게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해줄 어른이 없었던거야'라는 말을 한다. 성장할 때 필요한 건 좋은 음식이고 좋은 환경이고 좋은 교육이고 좋은 친구이고 그리고 좋은 어른이다. 좋은 어른은 아이에게 좋은 음식이고 환경이며 교육이고 친구, 바로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좋은 어른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힘든일인가. 이렇게 말해주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세상을 조금 더 밝게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라일라야, 너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멀리까지 그것들을 찾아 나서게 될거야." 마치 그가 내게 축복을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한 경의와 사랑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p.147)
나는 여전히, 피아노는 가장 완벽한 악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악기를 다시 배우게 된다면 어김없이 피아노를 선택할 것이다. 바이올린과 첼로에 내가 반응하는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듣는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 상황에 놓이지 않은 채 함부로 정의를 입밖으로 내지를 않을것이고, 나는 나의 어린 조카에게 세상은 무섭고 잔인하다고 가르치는 대신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그런 어른이 될 것이다. 나의 조카가 나로부터 축복을 내리는 것 같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 아이가 내게 느끼는 것이 경의와 사랑이 아니더라도 좋다. 그러나 내가 내리는 축복은 알아채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