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는 가수다]를 보지 않는데, 얼마전에 옥주현이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불렀다길래 youtube 에서 찾아보았다. 이 노래가 이렇게 좋은 노래였던가. 여자의 목소리로 듣는 천일동안은 내게 이승환이 불렀던 천일동안보다 훨씬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특히 나는 자유롭죠~ 하는 부분에서는 그래, 뭔지 알겠어, 싶어지기까지 했다. 모든게 그렇다. 노래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그러니까 타이밍. 언제 만나느냐 언제 듣느냐에 따라서 더 좋고 덜 좋기도 하다. 난 자유롭죠, 하는 옥주현의 목소리를 듣는데, 이 노래는 어쩐지 나의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회에서 옥주현이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검색했더니 「사랑이 떠나가네」라는 제목이 떴다. 어? 누구 노래지? 하고 들어보니 김건모의 노래였다. 하아-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나. 사랑이 떠나가네, 도대체 몇번째야, 이번엔 심각했지, 하는데 정말....
그러다가 나는 어제 지하철안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그만, 당신 손을 놓고 싶었어요. (p.27)
이 문장은 『서울, 밤의 산책자들』中 '전경린'의 「백합과 공룡의 벼랑길」에 나온다.
나는 여러 작가의 글이 함께 실려있는 책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먼저 읽고, 한 작가의 단편집에서는 가장 읽어보고 싶은 제목의 글을 먼저 읽는다. 순서대로 읽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먼저 펼친건 당연히 황정은이었다. 그 다음엔 누구를 읽었더라?
전경린의 글은 가장 먼저 실려있는데 읽으면서 내가 좋아할만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 앞날개에 전경린의 작품을 살펴보니 내가 읽은건 『황진이』가 있더라. 흐음, 그 책도 그저 그랬는데. 하고 책장을 넘기다가 그만, 저 문장을 만난 것. 아, 손을 놓고 싶다니. 내가 내내 생각해왔던 건데. 그래서 나는 편지까지 써두었는데. 네 손을 놓겠다고. 그런데 이 때에 내가 이런 문장을 책에서 접하다니. 지독한 기분이군. 그러다가 나는 이내 이런 문장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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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말이에요. 당신이나 내가 세상과 작별했다면, 우리, 흘러다니는 소문으로 그 소식을 알리지 말아요. 예의를 갖춘 정식 부고를 주고받고 싶어요. 별세의 날이 다가올 즈음 비밀스러운 주소 하나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그 정도 부탁은 가족에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간 뒤에 말이에요. 우리가 낙엽처럼 가벼워져서 한 걸음으로 훌쩍 공기 속으로 넘어가게 될 때요.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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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놓고 싶지 않지만, 손을 놓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당신을 잃는 고통대신에 나는 이제 언제든 어디서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놓았던 손을 세상과 작별하기 전에, 세상과 작별하는 그 순간에, 혹은 세상과 작별하고 나서 다시 한번 꼭 잡아보고 싶다.
예의를 갖춘 정식 부고를 주고받도록 합시다, 우리. 그건 약속해줘요.
나는 이 단편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젠장, 예의를 갖추어 부고를 알리자고 해서, 그래서, 미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아니, 자꾸자꾸 펼쳐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황정은.
아 젠장. 이 여자는 왜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거야. 일전에 『백의 그림자』에서의 무재씨를 기억한다. 그는 조개국물을 먹고 싶다던 은교씨에게 조개국물을 먹게 해주려던 사람이다. 그렇게 따뜻한 남자. 테마소설집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에서는 떨어지면서도 보고싶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그려낸다. 황정은이 그리는 사람은 따뜻하다. 이 소설집에서 그녀의 단편 「양산 펴기」에서도 주인공은 동거인인 녹두에게 장어구이를 사주고 싶어서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나는 몸서리처지게 이 캐릭터가 좋다.
이건 에이에스 되나.
돼요.
되나.
됩니다.
부러지면 새 걸로 바꿔주나.
그 말에 할머니, 하고 정색하고 대답했다.
살살 쓰면 되지 왜 부러져 살살 쓰세요. (p.86)
살살 쓰세요, 하는데 그만 나도 살살 쓸게요, 하고 싶어진다. 살살.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하루 일당과 함께 양산하나를 선물로 받는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은 녹두에게 줘야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게 참 콤팩트한 사이즈에 펼치기는 쉬울지 몰라도 접는 것이 만만치 않은데 녹두의 악력으로 가능한가 하면 또 가능하지 않을 것은 이렇게 연습해보면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팟 이렇게 착. (p.87)
녹두의 악력을 고려하고, 녹두에게 양산 접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위해서 펼쳐보고 접어보고를 반복한다. 팟 이렇게 착, 이라니.
나는 자꾸만 되뇌인다. 팟 이렇게 착, 팟 이렇게 착, 팟 이렇게 착.
잡지 엘르 6월호에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인터뷰가 실렸다는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접하자마자 오만년만에 잡지를 구입하게 됐는데, 포어의 인터뷰는 매우 짧았다. 아쉬워 ㅠㅠ (나는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고 난 뒤에는 이 잡지를 한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버릴까 어쩔까 참..)
거기에는 국내 작가들의 짧은 인터뷰들도 실려있었는데, 기대하는 작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많은 작가들이 황정은 이라고 답했다. 오, 나도 그런데. 나도 황정은을 기대하는데.
「백의 그림자」도, 「낙하하다」도, 「양산 펴기」도 정말 좋았어요. 계속 계속 좋은 글 많이 많이 써주세요, 황정은님. 기대하고 있습니다. 팟 이렇게 착.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냥 '이가희'의 [바람맞던 날]을 듣고 싶어져서 들었다. 들으면서 걷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이런 가사가 나왔다. 니가 올 때까지 기다릴래. 병신아, 기다리지마. 안와. 나는 남자를 기다리며 우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싶었다. 안와, 안온다고. 알아들어? 오지 않는다고!!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일곱시 삼십오분 이었다.
출근은 어제부터 일찍하게 됐는데 어제 내가 일어난 시간은 다섯시 사십분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라디오를 켰는데 라디오에서는 '루시드 폴'의 [고등어]가 나왔다. 세상에. 이른 아침, 다섯시 사십분. 다섯시 사십분에 듣게 되는 고등어라니. 고등어는 저녁 노래잖아, 밤 노래잖아. 그런데 새벽에 고등어라니. 이게 무슨조화야. 참신한데?
그래, 새벽에 일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에게도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 하는 말을 누군가는 해줘야 하잖아. 새벽 다섯시 사십분의 고등어. 좋습니다, 좋아요. 만족했어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앗, 그러고보니 오늘은 다섯시 오십분에 일어났는데 오늘 제일 처음 들은 노래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팟 이렇게 착.
팟 이렇게 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