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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만약 그때 누군가 연희에게 한 가지 소원을 물었다면 서슴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생의 가장 마지막 순간을 그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것. 자신도 세중도 저마다의 삶을 다 살고 나서, 이번 생에 부과된 사회적 의무나 가정적 책임, 주어진 과업을 각자 완수한 다음, 한 일 년쯤 여분의 삶이 허용된다면 생의 가장 마지막 네 계절쯤을 그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것.(p.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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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이 책의 저 구절에 밑줄을 그은게 2004년 이다. 당시에 나는 헤어진 남자를 잊지 못하고 꼭 저런 마음을 가진 상태였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가 아이가 있다고 해도 또 내가 아이가 있다고 해도 다 뿌리치고 네 계절을 그와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거다. 그리고 반드시 그러리라고, 그도 아마 동의할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2011년 3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것도 그리고 이 책에서 꼭같은 마음을 발견하고 밑줄을 그었던 것도 기억나지만, 지금은 전혀 그때의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니, 하고 좀 생뚱맞은 생각이 든다. 내가? 그랑? 그때의 나는 분명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사랑은 다시 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데, 십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때의 생각은 실천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며, 우리가 했던게 사랑인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 만약 누군가와 생의 마지막 사계절을-겨울을, 봄을, 여름을, 가을을- 보내야 한다면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택하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나는 그때 나의 생각을 그에게 말했는지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 사랑이란 부질없는 것. 언제고 잊혀지고 마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이 영화를 볼때의 나는 연애중이었다. 그리고 그때 연애중인 남자와 처음으로(마지막이 되기도 했지만) 본 영화였다. 극장안에 들어가서 그와 나란히 앉아 있는데 몹시 긴장이 되고 또 신경이 쓰였다. 그건 사귄지 얼마 안되는 남자와 여자가 어두운 극장안에서 할 수 있는 스킨십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이 남자가 나의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우리는 어떤 대화를 했고, 그는 말 끝에 '나한테 기대서 봐요' 라는 말을 했는데, 아, 정말 싫은거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그저 웃었지만 그때부터 걱정이 되서 영화에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나의 손을 잡을까봐, 제발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경직된 몸으로 꼿꼿하게 앉아서 영화를 봤다. 내 몸은 그가 있지 않은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이 남자와 이 연애를 계속 하기 어려울 거란 걸. 시간이 지나도 나는 이 남자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 혹은 이 남자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을 거란 걸.
예스라고 말하지 말걸, 사귀지 말걸. 그랬더라면 나는 연애를 한번 덜 한 대신 이별도 한번 덜 했을텐데. 그 이별도 나름대로 아팠는데.
영화 [만추]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포크신이나 하오/화이 씬이 아니라(그 장면도 좋았지만!), 몇번 언급했듯이 버스 이별장면 이었다. 버스안의 탕웨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현빈. 탕웨이가 돌아보면 또다시 그자리에서 손을 흔들어 주던 현빈. 그러니 마지막, 탕웨이가 기다리는 장면도 나는 해피엔딩으로 보였다. 현빈은, 그러니까 돌아볼때마다 그자리에서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줬던 현빈은 돌아올거라고 나는 믿었으니까. 그 믿음으로 그녀는 며칠이고 몇년을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무슨일이 있어도.
이 영화 [프로포즈 데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벤치에서 잠깐 자고 눈을 뜬 남자가 여자가 없어진걸 알고 마침 그때 떠난 버스를 보며 안타까워하던 장면이다. 잠시 커피를 사러 갔다 돌아오던 여자는 떠나버린 버스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게 되고,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멈칫 한다. 내가 탕웨이라면 자꾸만 그 자리에서 손 흔들던 현빈에게 '이 남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어' 라고 느끼게 됐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안에서도 나는 바로 이때, 이 여자가 이 남자에게 사랑을 느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내가 떠난 줄 알고 안타까워하는 남자. 그의 등을 두드리며 내가 사온 커피를 내미는 그 순간, 그 순간은 정녕 행복이지 않을까. 그의 안도, 그리고 그녀의 웃음.
얼마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내게 '사계절이 있다는게 좋지 않아요?' 라고 물었었다. 맞다. 정말 좋다. 그와 함께 살아볼 수 있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다는 게 좋다. 혹은 그와 함께 살지 않아도 그를 좋아하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된다는 게 좋다. 나는 그의 외투 입은 모습을, 긴팔을 입은 모습을, 반팔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전화를 할 수 있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문자메세지를 보낼 수도 있다. 이건 사계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점심을 아주 맛없게 먹었다. 점심을 맛없게 먹으면서, 한숨을 쉬면서, 뜨거운 후렌치 후라이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약간 김빠진 콜라와 함께. 뜨거운 후렌치와 약간 김빠진 콜라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하나씩 집어먹고 또 빨대로 빨아 먹으면서, 봄과 여름에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도 내내 좋아했던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사계절 내내 좋아하던 그를 기다리는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 나라면,
탕웨이랑 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