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고 있는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다. 오늘까지는 다 읽으려니 싶었는데, 어제는 내 방 도배를 한 후 책장 정리를 하느라 못읽고, 오늘은 어제 책장정리의 후유증으로 팔에 알 배겨서 쓰러져 있느라 못 읽고 있다. 내가 읽은건 현재 124 페이지 인데, 앞의 긴 서문을 제외하면(지겨워서 안읽었음) 아주 일부분만 읽었다고 하는게 맞을테다. 그러나, 이만큼 읽었을 뿐인데, 아우, 완전 쑝가는 표현이 나온다. (사랑합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라고? 그의 이름인가 보군?" 헨리 경이 화실을 가로질러 바질 홀워드를 향해 걸으며 물었다.
"맞아, 그의 이름이라네. 자네에게 굳이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왜 말하지 않으려 했나?"
"오, 나로선 설명할 수가 없어. 난 어떤 사람을 무한히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남들에게 절대 밝히지 않아. 그건 마치 그들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 같거든. 난 내밀한 것을 점차 애호하게 되었지. 현대의 삶이 신비하거나 경탄할 만한 것이 되려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거든. 가장 흔한 것은 그것을 감출 경우에만 환희를 줄 수 있다네. 내가 만일 이 도시를 떠난다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네. 혹시라도 그 말을 입 밖에 냈다간 나의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릴 거야." (p.47)
나도 바질 홀워드와 같다. 내가 무한히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남에게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다. 바질 홀워드가 말했듯, 그건 마치 그들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그런 이유뿐만은 물론 아니다. 내밀한 것을 애호하게 되는것도 맞지만, 그 이름은 내게는 아주 커다란 의미인데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그 의미가 줄어들 것 같아 그것이 두렵고 싫다. 나는 내 안에서 아주 커다란 의미를 가진 그 이름을 오로지 나 혼자 간직하고 싶다. 그러니 내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심장 떨리는 일인거다. 그런 이름을 다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불러대는 것도 끔찍하게 싫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때때로 나를 정신없게 만든다. 일을 하다가 문득, 메신저 창에 로그아웃으로 설정되어 있는 그의 이름을 볼라치면, 갑자기 쿡쿡 가슴이 쑤셔와서, 나는 그를 퍽이나 좋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삭제해버릴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삭제하고 나면 또 그의 이름이 나의 메신저 창에 없다고 가슴 아파할거면서. 그래서 그의 이름을 메신저 창에서 보는 순간, 나는 병신이 된다. 하릴없이 그의 이름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 순간의 나는 머저리같기만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것들에서 그렇듯이 이 이름에 있어서도 내 기준과 상대의 기준이, 그러니까 내가 이름에 대해 가지는 의미와 상대가 이름에 대해 가지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운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상대가 내 이름을 부를때, 내가 가지는 만큼의 감정을 담기를 바란다.
딸을 가진 여동생에게 주고, 또 나도 읽어보라고 친구에게 이 그림책을 선물 받았다. 사실 나는 그간 친구들에게 그림책을 선물 받고, 그 그림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던 적은 없다. 나는 그림책이나 시집을 제대로 읽거나 감동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또 그림책을 읽고 나서 대체 이 책에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하며 그 의미를 찾을수가 없었는데,
이 책은 달랐다.
이 책은 한장 한장 넘기면서 참 좋다고 탄식했다. 게다가 어찌나 딸을 낳고 싶어지던지!
어느 날 네 손가락을 세어 보던 날
그만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맞추고 말았단다.
어느 날 우리가 함께 길을 건너던 날
넌 내 손을 꼬옥 붙들더구나.
조그만 아기였던 네가
이제 아이가 되었구나.
언젠가 나는
네가 네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는 걸
보게 되겠지.
이 책이 좋아서 집에 와있는 여동생에게 읽으라고 주며 좋지? 했더니, 동생은 제목만 봐도 슬프고 짠하다고 했다. 왜?
내 딸내미도 언젠가 생리를 하게 될거 아니야. 휴..
그렇지,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여자로 커가는 거잖아.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책장 정리를 해야 했다. 책장에 책을 쑤셔 박으면서, 대체 어떤식으로 정리해야 하는거야, 신경질이 났다. 책들을 꽂는데 갑자기 확 열받아서 다 태워버릴까, 하고 욱,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장 한칸, 여기는 다른 책이 꽂히지도 않을 것이고 겹쳐서 쌓지도 않을, 소중한 한 칸이다.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책은 여기에 꽂아 두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이 순서는 상관없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일곱번째 파도』, 『채링크로스 84번지』, 『모든것이 밝혀졌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서재 결혼 시키기』,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 『올리브 키터리지』, 『축복 받은 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와, 다니엘 글라타우어와, 조나산 사프런 포어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아무때고 수시로 꺼내어 들추어본다. 어떤 문장이든 처음 책을 읽을 그때의 그 느낌을 주고, 또다른 느낌까지 덤으로 준다. 소중한 사람이 내게 만나자 청해올 때, 나는 이 책장에서 한권씩 꺼내가지고 가는 길에 읽으며 만나서는 상대에게 주고 오고 싶다. 그 사람의 책장 한 칸이 내가 준 책으로, 그것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책들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면서. 그 책들을 볼때 그리고 그 책들이 꽂힌 책꽂이를 볼때는 내 생각을 하기를 바라면서.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현재 51%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엊그제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전, 동방신기가 춤 추는 걸 조금 보여줬는데, 아이고, 정말 팔뚝이 근사해서 미치겠다.
오랜만의 빗소리는 듣기에 좋았다.
나는 오늘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는 새벽을 보내야지.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