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한지 이제 막 일 년이 지났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도 될까? 라는 마음이었고, 런데이로 짧게나마 시작해보면서 오오, 이렇게 달리니 되네, 하면서 달리게 된 육체가 기쁘고 신기했다. 나는 평생 못달릴 줄 알았거든. 런데이 아저씨는 이어폰을 통해 계속 달리다보면 체중도 준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오래 걸리나보다 하고 말았는데, 오래 걸려도 체중에는 변화가 없었다. 더 달려야 하는걸까? 그런데 사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체중 감량 때문은 아니었고, 좀 더 건강하게 살고자 위함이었으니, 체중감량이 안되어도 아쉬워하지는 말자고 생각했었다. 부수적으로 체중 감량도 되면 좋겠지만, 안되면 할 수 없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여지는 러너들은 달리고나서 다들 체중이 줄었대. 이들은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왜 저들은 되고 나는 안되지? 갸웃하노라면 내 주변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나는 왜그런지 알겠는데' 했다. ㅋㅋㅋ 넌 정말 달린것보다 더 먹어 ㅋㅋ 이러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간 많이 먹는다. 술 안주는 그렇게 많이 먹는 편은 아닌데(네? 확실합니까?) 밥을 먹을 때면 폭발을 해... 하아- 하여간 많이 먹는데, 그러다보니 이 구절이 생각난다.
긍정적인 신체 이미지를 지닌 여성들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p.30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긍정적인 신체 이미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즐기고 그래서 탈코르셋을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코르셋 조이지 않아도, 주름살 펴지 않고 살 빼지 않아도 이미 내 자신을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늘도 맛있는거 먹여줄게, 나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내가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고,
누누이 말해왔지만 나는 내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고 뭔가 행동으로 바로바로 옮기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론이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뭘 깨닫는게 좀 늦된 사람이다.
달리기만 해도 그렇다. 내 머릿속 달리기는 그냥 유산소 운동이었다. 달리기는 유산소의 대표운동 아닌가.
그런데 내가 달리고나서 한참 후에야, 달리기가 무조건 유산소운동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느만큼 어느 속도로 달리느냐에 따라 달리기는 무산소운동이 되기도 하고 고강도 운동이 되기도 하는거였다. 아?!
아무 준비도 없이 유선 이어폰을 꽂고 달리던 나는 달리면서 하나씩 달리기 장비를 갖추었더랬다. 스케쳐스 고워크를 러닝화로 바꾸었고 유선이어폰을 무선이어폰으로 바꾸었다. 이거면 된줄 알았다가 심박수로 유산소와 무산소를 알 수 있다고 해서 워치도 장만했다. 나에게 맞는 유산소 운동의 심박수를 구하는 계산식은 인터넷에서 검색이 가능했지만, 계산하는거 너무 빡시고 하여간 대충 해봤는데 나 자꾸 고강도운동을 하고 있네..
갤럭시 워치를 사용하는 동생은 항상 달리고나면 얼마만큼이 유산소 운동이었는지 알 수 있던데 애플워치는 그게 안되나? 그래서 검색해보고 친구에게 물어보고 해서 드디어 나도, 이제야, 비로소, 달리고난 후에 내가 유산소를 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달리면서도 그걸 볼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나는 달리기를 유산소로 접근했었는데 그동안 무산소로 달리고 있었고, 일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내가 접근했던 바로 그 유산소로 접근할 수 있게 된거다.
느려..
확실히 느려..
일 년 달리고나서 알게되는거 뭔데.
자, 그래서 최근의 달리기를 보자.

그렇게 좋다는 zone2 달리기를 시도했지만 어느순간 영역 3으로 들어와버리고 한번 영역3으로 들어와버리면 다시 2로 내려가기가 너무 힘들다. 저렇게 유산소로 접근하면 페이스가 8분이 훌쩍 넘어간다. 느리게 달려야 가능한거다. 잘 달리는 사람들은 4분대로 달려도 유산소이던데 나는 거기까지는 아주 멀고 어쩌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내가 택한게 유산소라면, 영역2의 달리기라면, 나는 8분대의 달리기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달려야한다.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결국 빨리 달릴 수도 있다는데, 나는 빨리 달리지 않아도 되니 유산소로 계속 접근해보고 싶다. 이렇게 느리게 달리니 사실 한 시간을 달려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더라.
그동안 달리기할 때면 런데이 아저씨 음성을 듣고 런데이 음악을 듣고 달렸다.
중간에 한 번 빠른 음악을 선곡해서 플레이리스트 만들었었는데 영 집중이 안되는거다. 그래서 음악이나 팟빵같은거 들으면서 달리는 사람들 신기해하며, 역시 나는 멀티가 안돼, 이랬었는데,
최근에는 8분대의 느린 페이스로 달리면서, 흐음, 발라드 들어볼까, 하고는 내가 여행가면 틀어두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오, 개꿀인데? 발라드는 느리니까 달리는데 방해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달리기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것 같더라. 한가지 부작용이라면 어느 순간 내가 목청껏 구슬프게 따라한다는 거?
그렇게 나는 요즘 달리기에서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잘가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를 듣고 있다. <꿈에>를 듣고,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그대라는 사치>를, <기억의 무게를>, <편지>를 듣는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달리면서 발라드 듣는 사람 누구? 바로 나다! 그러다가 따라 부르면서 어어 숨차 따라부르지마, 이러고 그러다가 김광진의 편지를 따라 부른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그렇게 영역2와 3을 잘 유지하는데, 하하하하하,
바로 며칠전.

이 날은 고강도 운동으로 잠깐 달렸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왜그랬냐면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플레이 리스트에 '로제'의 <toxic till the end>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 노래 나오는 순간 나 왜 빨라져. 안돼, 진정해, 이러는데 내 발걸음은 음악에 맞춰서 다다다닥 거리고 워치를 보니 내가 영역4로 가고 있다가 영역 5도 가버리고 만것이다. 오 마이 갓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래 한 곡만큼은 고강도 운동 어떰? 이래서 반환점 돌고 오면서 다시 한 번 로제 노래 재생시켜가지고 ㅋㅋㅋ 영역4와 영역5도 찍어버렸네. 껄껄.
어제는 날도 좋고 양재천 벚꽃도 만발이라, 오호라, 그러면 집까지 한 번 달리기 고고씽! 하고 퇴근 후에 달리기 시작했다. ㅋ ㅑ ~


3km 정도 천천히 달리다가 바깥으로 빠져서 잠실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기분이 끝내줬다.


나 이런데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계속 일정하게 달리지는 못하고 횡단보도 나올 때면 핑계삼아 쉬었다. 길을 건널 때는 걷고 그러다 뛰고 하면서 드디어 잠실에 도착했는데, 회사 앞에서 잠실까지 도착하니 7km 정도를 갔다고 하더라. 막 힘든건 아니어서 집까지도 얼마든지 달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하고 8km 되는 지점에서 멈추고 버스를 타고 강동역으로 갔다. 장칼국수 먹을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호가든이 너무 간절햇지만 ㅋㅋ 이 식당에 호가든이 없기도 할뿐더러 그제도 술 마시고 오늘도 마실건데 달린 날 마저도 마시진 말자, 하고 참았다.
음식이 나와 먹기 시작하는데 바로 내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으셨다.
직원에게 아마도 사이드 메뉴와 소주 한 병을 주문하신 모양이다. 직원분은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아버님, 여기는 밥집이라서 이렇게 술안주로 이거 시키시면 안되고요, 밥을 하나 시키셔야 돼요, 밥하고 반주 하시는건 괜찮지만, 사이드메뉴에 소주는 안돼요, 라고 재차 설명드리니 그제야 할아버지는 사이드대신 국수를 주문하셨다. 직원분은 주문을 받고 잠시후 다시 오셔서 기본 찬을 내주시며 아버님, 소주 먼저 드릴까요 국수랑 같이 드릴까요, 물으셨는데 할아버지는 소주를 먼저 달라 하셨다. 혼자 앉은 할아버지는 나온 소주를 따서 종이컵에 따른뒤-옆의 소주컵은 무시하셨다- 기본찬인 백김치에 깍두기를 안주 삼아 드셨다. 혼자라서 당연히 할아버지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고 조용히 소주랑 안주를 드셨다. 잠시 후에는 할아버지의 국수가 나왔고 할아버지는 역시 국수를 안주 삼아 천천히 혼자 소주를 드셨다.
나는 바로 옆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며 감정이 복잡해졌다. 바로 저 모습이 결국 내 모습이 되는게 아닐까.
혼자서 식당에 가서 안주를 주문하는데 그거 안된다고 얘기를 듣는 일, 그리고 조용히 소주를 혼자 따라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마시는 일. 바로 저 모습이 내 모습이 되겠지. 지금과는 다른 기분으로 그 때는 술과 안주를 먹지 않을까.
저 할아버지가 저렇게 혼자 앉아있게 된 데에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사연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파트너도 없으며 자식도 없으니 아마도 나중에도 나 혼자이지 않을까. 먹고 마시는 일을 모조리 혼자 해내야겠지. 그리고 늙어가면 늙어갈수록 그 일은 더 외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자. 어차피 인간에게 외로움과 고독은 필연적인 것이니 받아들인바 있다. 십년후 이십년후라도 내가 받아들인 외로움과 고독을 잊지말자. 그건 내 친구다. 나는 조그많게 정윤수의 <도시극장>을 들으면서 내몫의 국수를 먹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걸으면서도 역시 정윤수의 도시극장을 듣는데, 강명재 관장이 나와 스페인 마드리드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는 책을 썼다고 했다.
외국어에 항상 관심이 많아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떤 외국어를 선택할까 하다가 스페인에 계신 이모가 스페인어 어떠냐고 물으셔서 그래 그걸 해보자, 하고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전공했으니 이걸 살릴 어떤 직업을 가질까 하다가 KOTRA 에 입사해 남미와 중미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걸 듣는데 참 부럽더라.
일전에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영화 마지막편 볼 때도 대학을 선택하려는 주인공에게 언니가 '그 대학 말고 이 대학은 어때?' 권해주는게 그렇게나 부러웠었는데, 내몫의 생각외에 나보다 더 경험이 많은 누군가가 '이건 어때'라고 조언해줄 수 있다는게 참 부러웠다. 나는 스페인어를 지금 와서 공부한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하면 KOTRA 에 취업해 세계를 돌아다니는 일이 가능할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아, 생을 한 번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세상에 존재하는데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한게 많아서, 너무 모르는게 많아서, 다른 식의 삶도 선택해보고 싶어서 생을 한 번 더 살아보고 싶다. 스페인에도 발령 받아서 일해보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삶에서 한 번도 스페인에서 일하는 걸 생각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는데,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아니까 아, 나도 그런거 경험해보고 싶다, 이렇게 되는거다. 하나뿐인 생이 너무나 아쉽다. 늙어가는 것도 아쉽다. 에휴.. 이런 걸 말하면 누가 이해해줄까?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결국 나는 글로 쓰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고, 그런데 글쓰기가 있는 삶 너무 좋지 않은가!!
아무튼 열심히 달려야겠다.

저 책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