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서면 인터뷰
진행: 문학동네
번역: 홍은주
© Ivan GimNinez - Tusquets Editores
Q. 무라카미 씨가 데뷔하신 지 40년이 되어갑니다. 데뷔작부터 가장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지난 작품들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반면, 무라카미 씨의 문학세계에서 사십 년 동안 바뀌지 않은 핵심은 무엇일까요?
A. 첫 소설을 썼을 때가
29세였는데 지금은 68세가 되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합니다. 스물아홉 때는 ‘소설 같은 건 앞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순여덟이 되고 보니 ‘남은 인생에서 소설을 몇 편이나 더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커다란 차이입니다. 대신
그만큼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으로 작품을 쓰게 됩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즐긴다는 점만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같습니다. 글 쓰는 일은 변함없이 즐겁습니다. 마치
악기를 자유로이 연주하는 것처럼 말이죠.
Q. 『1Q84』
이후 7년 만의 본격 장편소설입니다. 처음 구상에서 탈고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합니다.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구상의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경험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A. 대략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기분전환으로 번역을 조금
한 것 말고는 거의 다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구상이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글이 ‘써진다’ 싶으면 집필을 시작하고, 매일 계속해서 써나가고, 다 쓸 때까지 쉬지 않습니다. 자유로울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의 경우 구상 같은 것은 대체로 방해가
될 뿐입니다.
Q. 냄새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경우 엄마를 떠올릴 때 엄마의 체취가 아닌 그때 내리던 비의 냄새를 기억하고, 아키가와 쇼코는 재규어의 냄새에서 아버지를 추억합니다. 또한 주인공
‘나’가 메타포의 땅에서 현실세계에 다가가는 순간도 ‘냄새다운 냄새를 맡는 순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음악과 음식이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다양한 음악과 음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는 유독 후각에 대한 예민함이 곳곳에 보입니다. 후각이라는
감각이 유독 이번 책에 두드러진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공간을 혹은 어떤 인물을 기억할 때, 후각이 크게 영향을 주는지도 궁금합니다.
A. 저는 되도록 오감을 전부 활용해 글을 쓰려 합니다. 물론 후각도 오감 가운데 하나지요. 특별히 후각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Q.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 ‘자신을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품 속 화자인 ‘나’도 ‘믿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요. 어찌 보면 단순하지만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믿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라카미 씨는 살아오면서 자신이 믿는 바대로 나아갔는지, 작가로서 스스로를 믿는 힘이 주인공 ‘나’처럼 단단했는지, 아니면
멘시키처럼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에 달고, 끝나지 않는 미묘한 진동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내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일상생활에서는 제 의견이나 신념을 꽤 확실히 지니는 편입니다.
그러나(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믿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런 의견이나 신념을 한순간에 무화시켜버리는, 나 자신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흐름 같은 것입니다. 그런 힘을
정면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혹은 그런 힘에 순순히 몸을 맡기지 못한다면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Q. 이번 작품 출간 이후 일본 극우파로부터
적잖은 공격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좌우 갈등의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평행선을 그리는 역사관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렇다면 거기에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A. 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리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순수한 흑이냐 백이냐’ 하는 원리로
판단이 이루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이 딱딱하게 굳어 죽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말을 마치 돌멩이처럼 다루며 상대에게 던져댑니다. 이것은
매우 슬프기도 하거니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소설(이야기)은 그런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소설이 일종의 (좋은 의미의) 전투력을 갖춰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다시 한번 말을 소생시켜야 합니다. 말을 따뜻한 것,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양식(decency)’과 ‘상식(common sense)’이 요구됩니다.
Q. 한국 국민들은 2014년에 4월 16일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하여 수백 명이 물속에 가라앉은 사건을 공동체적 트라우마로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 문단에도 큰 영향을 끼쳐 ‘세월호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동일본 대지진이 다루어지기도 하는데요, 재난 이후 문학 그리고 문학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까요?
A.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크고 깊은 집단적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가
유효하게 표현하고, 나아가 치유할 수 있을까? 이건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여러 차례 시도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으로서는 대부분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가지 기억해둬야 할 것은 ‘어떤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쓰인 소설은 대부분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진 중대한 과제입니다. 목적을 품되 목적을 능가하는(혹은
지워버리는) 것.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이런 시도에 꼭 도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구축해야 합니다.
Q. 소설가로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라카미 씨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남다른 믿음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소설’이라거나 ‘문학’이라기보다는 굳이 ‘이야기’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같은
질문을 달리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이야기의 무엇이 우리에게 그토록 절실한 것일까요? 여태껏 작품활동을 해오시면서 이야기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체험이 있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제 정의에 따르면 이야기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몸속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넘쳐나는
것입니다. 의미나 정의, 무슨무슨 주의(主義) 같은 것을 아득하게 넘어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선악의 개념마저 초월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선량한 힘’을 지닌 것입니다. 그런 힘을 지니지 못한 소설은 아마 독자를 끌어당기지 못할 테지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의 힘을 생생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뛰어난 능력과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을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 나름대로 노력을 거듭해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
Q. 이 질문지를 준비하는 현재 한국은 『기사단장
죽이기』 예약판매중인데요. 벌써 반응이 뜨겁습니다. 한국에는
무라카미 씨를 무한 신뢰하고 애정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수많은 독자들이 무라카미 씨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한국을 방문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A. 언젠가 그런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공적인 행사를 썩 좋아하지 않고 미디어에 출연하는 일도 거의 없기에 아무래도 결국 이런 초대를 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 독자 여러분께는 늘 각별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제 책을 변함없이 열심히 읽어주셨습니다. 이번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도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