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암 선생은 갈치를 무린어, 즉 비늘 없는 생선 종류에 포함시켰는데 피부의 은색 가루가 비늘이다. 구아닌이라는, 색소의 일종으로 회로 먹을 때는 칼로 긁어내야 한다. 호박잎으로 긁기도 한다. 소화가 안 되기 때문. 힘줄도 걷어내야 한다. 익힐 때는 상관없다. 지혈작용도 하는 구아닌은 모조진주나 매니큐어, 립스틱에 쓰인다. 키스는 갈치 비늘을 주고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 (p.19)
내가 좋아하는 국내 작가는 정미경 말고는 없었다. 김훈의 단편 『언니의 폐경』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김훈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고, 그러고보니 내게는 국내작가중에는 이러이러한 작가가 좋다, 라고 말할만한 작가가 별로 없었다. 한창훈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나는 이제 정미경과 한창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행도 여행기도 좋아하지 않아서 여행기를 읽어봤자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 것처럼, 해산물도 별로 좋아하질 않기 때문에 한창훈의 이 책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었다고 해서 책 속에 나오는, -게다가 한창훈이 꽤 자세히 설명해 놓은-그 어류들을 먹고 싶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고집이 센 듯.)
그런데 한창훈의 글이 좋았다. 한창훈의 글이 너무나 맛깔스러웠다. 게다가 그가 이 책속에서 밤낚시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그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은 멋진 남자와 밤낚시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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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낚시의 묘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들 돌아올 때 찾아가는 역행의 맛이 있고 모든 소음을 쓸어낸 적막의 맛도 있다. 넓은 바닷가에서 홀로 불 밝히는 맛도 있고 달빛을 머플러처럼 걸치고 텅 빈 마을길 걸어 돌아가는 맛도 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회 떠놓고 한잔 하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밤에 하는 짓이 몇 가지 되는데 가장 훌륭한 게 이 짓이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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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한번도 낚시에의 로망을 가진적이 없다. 아빠를 비롯한 친척 어른들 모두, 심지어 제부까지 낚시를 좋아한다. 어릴적에는 아빠를 따라 낚시를 몇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얼음낚시 까지도. 그러나 한번도 그 순간이 좋았던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고기를 낚지 않아서인걸까? 낚시가 취미라는 사람을 보면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한창훈이 말한다. 밤에 하는 짓 중에 가장 훌륭한 짓이라고. 밤에 하는 가장 훌륭한 짓을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적막속에서 새벽 다섯시에 회 떠놓고 한 잔 하는 남자. 캬~ 좋다. 그 밤에 온전히 내가 옆에 있어 준다면 그 밤은 찬란하지 않을까. 적막하지만 찬란한 밤. 고요하지만 황홀한 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멋진 남자와의 밤낚시' 에 대한 로망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는 혼자인 쪽을 더 좋아할까, 그 순간 만큼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숱한 이웃들의 작은 사연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미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에 등장하는 사연이다. (그러고보니 어류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한다는 것에서 퍼뜩, 프레모 레비의 [주기율표] 랑 비슷한 전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기율표]의 '티타늄'편을 엄청 좋아했는데!!) 해산물 공장에서 일하는 '은미 엄마'의 이야기인데, 평소에 지각이나 게으름을 전혀 보여주지 않던 그녀가 하루는 늦게 출근하고 기운도 없어 뵌다. 섣불리 뭐라 물을 수도 없어 주변 사람들은 퇴근후, 그녀와 함께 술 한잔을 하며 왜 그런지 까닭을 묻는다. 그녀는 소주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얘기한다.
처녀 시절 은미 엄마는 마을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밤마다 연애바위 뒤에서 만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주겠다는 다짐도 날마다 듣고 언제 김밥 싸서 바닷가로 노래미 낚시 가자고 손가락도 매일 걸었다. 사랑은 소문이 나기 마련이고 소문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p.130)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은미 엄마는 마을 청년과 헤어진 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십년만에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귀찮게 할게 아니니 딱 한번만 만나달라고. 그래서 그녀는 나갔는데 이제는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십년전의 그 청년은 그녀를 횟집으로 데리고 간것이다. 까페가 아니라 횟집을.
"글쎄 말이요. 같이 노래미 낚으러 가자 해놓고서 한 번도 못 가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요...회를 가리키면서 좀 먹어보소, 얼른 먹으시요, 이 말만 서로 하고."
"......."
"내가 가난해서 갔지? 그랬지? 이 소리만 하면서 울더라고. 결국 그 사람만 소주 한 병 마시고 밥상 위에 젓가락 한번 못대보고 그냥 나왔소."
은미 엄마는 축축해진 목소리로 말끝을 맺었다. 궁금증이 풀어진 우리는 건배를 하고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망연자실 한동안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면서 말했다.
"가야겠구만.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자꾸 생각이 나."
철이 엄마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헤어졌으니 생각이 날 만도 하지."
"그게 아니야."
"아니면?"
"노래미회가."
"......"
"먹고 올 것 그랬나?" (pp.131-132)
아, 좋아. 정말 좋다.
소라 편에서는 한창훈의 어릴적 사연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한창훈이 여덟,아홉살 적에 해녀인 할머니를 따라가서 해녀들의 옷을 지켜준다. 옷을 지키면서 그는 무료함이란 걸 알게된다. 갯돌을 뒤지고, 구름을 보고, 비행기가 세대째 지나가고, 그리고 세시간이 넘게 물질을 하다가 육지로 올라온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옷을 갈아입을 때, 어린 한창훈은 그때, 풍성함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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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들의 출렁거리는 젖가슴과 눈부신 엉덩이가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한동안 나타났다 사라졌다 계속 되었다.
한 아주머니는 속고쟁이를 벗으려다 내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히면서 고쟁이를 내렸다. 깊은 무료함 뒤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풍성함이 찾아온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일은 계속해볼 만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생각이 너무 길어 나중에 먹으려고 둔 큰 소라는 그만 까맣게 타고 말았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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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의 담백한 이야기들이, 그 맛깔스런 사투리가 생각났다. 「밤 눈」과 「올 라인 네코」의 그 말랑말랑함도 같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무척 신이 났었는데!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홍합』이 품절이었다. 그런데 어제 다시 검색해보니, 오, 품절 아닌 2009년 판이 뜬다! 앗싸!
브론테님은 어제 이승우를 읽어보겠다고 했는데, 나는 이제 한창훈을 다 읽어보겠다. 아, 신난다!
음, 근데 앞으로 키스를 할 때는 자꾸만 갈치 비늘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갈치 비늘...갈치 비늘....
춥다. 가을이다. 그리고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