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어느 빌딩의 7층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갔는데, 5층까지는 엘레베이터로 도착할 수 있었지만 6,7 층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나는 내려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6층에 도착했고, 이제 7층으로 가기 위한 계단앞에 섰는데, 하아, 여기는 손잡이가 중간에 끊겨있고 밑이 훤히 보이는거다. 마치 공중에 붕 떠있는 계단인 것 같다고 하면 표현이 될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는터라 더이상 오르지를 못하고 무서워했다. 이 계단만 다 오르면, 한 층만 오르면 그가 있는 곳에 갈 수 있는데,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오르지를 못하고 있었다. 한걸음도 더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좌절스러워서 눈물만 나왔다.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가 도무지 오를 자신이 없어서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고, 다시 엘레베이터를 탔고, 집으로 갔다.
책을 읽고 있다. '일레인 N. 아론'의 『사랑 받을 권리』. 저자는 임상 심리학자이고, 이 책은 사랑받지 못하고 좌절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못난 나'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기'를 하면서 사랑하고 있는데, 그 관계 맺기를 '순위 매기기'로 탈바꿈 시킴으로써 위축된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었다.
물론 '순위 매기기'가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경우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내 꿈이 생각났다. 꿈속에서의 나는 그와 '관계 맺기'를 했어야 했는데, 계단을 오르면서는 '순위 매기기'로 탈바꿈 시켜버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나, 한 층 더 높은 곳에 있는 그사람, 그것은 나에게 절망감을 가져다 줬고 이런 '못난 나'를 그가 사랑할 리 없다는 좌절을 느끼게 했다.
저자는 얘기했다. 수치심을 느끼고 상대에게 위축되면, 상대도 나를 그렇게 본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 그 얘기가 다시 한번 쓰여지고 있는거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한다고.
심리학 서적을 신뢰하지 않는다. 약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읽은 심리치유 에세이라든가 심리학에 관련된 책들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달랐다. 나는 내가 정말 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빅터 프랭클은 내게 문제가 없다고 얘기해줬다. '사라 쿠트너'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에서 흔하디 흔한 남녀간의 문제를 얘기하기 보다는 나에게 '너의 문제는 그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뿐이야' 라고 얘기해줬다. '그러니 이제 제발 생각을 멈춰!' 라고. 오, 나는 이 두책을 읽고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었던지. 읽을 당시의 나에게 이 책은 바이블 같았다.
다시, 『사랑 받을 권리』로 돌아가보면, 이 책을 펼쳐 읽으면서 과연 내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첫장부터 안정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마침 누군가에 대한 호감으로 그의 모든게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이런 문장을 맞닥뜨린다.
우리는 마음 가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며,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한다. 사랑은 관계 맺기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P.20)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듯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책에서 만날때는 그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아주 쉽게 관계 맺기와 순위 매기기에 대해 설명해준다.
우선 함께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보라. 그리고 함께 있으면 기분 나빠지는 사람들의 이름도 적어보라. 나중에 이름 밑에 짤막한 메모를 할 수 있도록 이름과 이름 사이에 공백을 두고 적어야 한다.
이름을 다 적었으면 이제 그 목록을 눈으로 훑어보라. 당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당신과 관계 맺기에 치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당신과 상대의 관계는 이따금 전화를 걸어 따뜻하고 다정한 안부 인사를 건네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주를 이룰 것이다. 반대로 당신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 서로 순위 매기기에 치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을 상대할 때 당신은 평가받고 있는 듯한, 혹은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 경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p.19)
결혼한지 몇개월 안된 친구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친구는 그날따라 유독 피클을 먹어댔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피클을. 나는 친구에게 너 혹시 임신한거니, 물었고 친구는 어떻게 알았냐며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나는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의 인생이 참으로 순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어 처음 연애하게 된 남자와 결혼을 하고, 결혼 하자마자 아이를 갖고, 친정 옆에 집을 얻어 살고 있는 이 모든 현실들이 내 친구에게는 쭉쭉 펼쳐져 있는 것 같았고, 나는 결혼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아이를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아무것도 해놓은게 없다는 무기력함을 느꼈었다.
순위 매기기가 가장 흔하게 그리고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은 관계 맺기에 슬며시 끼어들어 우리 자신의 '못난 나'를 유발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당신이 친구와 점심을 함께 하다 친구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보자. 당신은 친구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해준다. 친구의 기쁨은 곧 당신의 기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지난 5년간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별안간 비참한 기분이 든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자리는 당신과 친구가 함께하는 곳이 아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내면의 '못난 나'와 점심을 함께 먹는 것이 된다. (p.23)
아, 그날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던 것은 내면의 '못난 나' 가 갑자기 친구와 나의 저녁식사에 끼어들었기 때문이구나!
이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자학과 자책, 수치심과 좌절에 대한 구절들이 많이 등장한다. 나만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속의 저자는 그것들을 치유해주기 위해 내면의 순진한 자아와 대화를 시도하라고 말한다. 오, 그러고보니 나는 가끔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내 트라우마가 시작된 그 시점의 나를 나는 다른 시선으로 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못난 나를 극복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또 반드시 도움을 준다고도 할 순 없지만, 어떤 위안을 준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해준다. 게다가 이 책에서 나는 뜻밖의 위안을 얻는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부분에서. 해당하는 질문에 체크를 하는 것인데, 한 번이라도 자신에게 해당되었던 적이 있다면 S 라고 적고(S는 상태 state를 의미한단다), 평소 매우 자주 생각한다면 T라고(T는 고정된 우리의 성격적 자질 Trait을 의미) 적는다.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평가절하하고 있나]
* 사람들에게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듣더라도 믿지 않는다.
*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해야 할 때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서 그런 비교를 하지 않는데도) 여러 사람 중에 누가 더 예쁘고 명랑하고 부자인지, 누가 더 좋은 차를 가졌는지, 누구의 아이디어가 더 나은지 비교하곤 한다.
* 무슨 수를 써서든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와 상대방이 동등한 관계임이 분명한데도 내가 더 열등하게 느껴진다.
* 비판을 받으면 그 출처에 상관없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다.
*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선뜻 나서서 이야기하지 못한다.
* 늘 어깨를 수그린 채 고개 숙인 자세를 하고 있다.
* 식당에서 음식에 문제가 있더라도 식당 주인이 불쾌하게 여길까봐 항의하지 못한다.
* 나 자신이 사기꾼인 것처럼 느껴진다.
* 누군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더라도(부모나 교사가 되거나 지도자로 뽑히더라도) 존경을 받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 누군가 "문제가 생겼어" 라고 말하면 곧바로 그 문제가 내 탓인 것 처럼 느껴진다.
* 나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옹호해야 할지 모르겠다.
* 무엇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다.
* 걱정할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
*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 배우자나 애인,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할 때 질투나 불안을 느낀다.
* 방금 했던 말, 외모, 가족, 과거, 데이트하는 사람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일이 자주 있다.
*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함께 잠자리를 한다.
* 상대방이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계속하는데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한다.
*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할 때 망설이게 된다. (pp.118-119)
S가 10개 이상, T가 2개 이상이면 스스로의 가치를 심각하게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p.119)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이 여러개의 문항들에서 마지막의 단 한문항만이 T이고, S는 2-3개뿐이다. 주변사람들에게 자학하고 자책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온터라, 나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심할거라 생각했는데, 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됐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나는 그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걸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뜻밖의 다독임을 받은 듯 느껴지는거다. 오!
아직 절반정도 밖에 읽지 못했고 그러니 앞으로의 내용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수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 한권이 나를 바꿔 놓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정도의 위안 만큼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걸로 족하다, 나는.
오늘,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나는 무척 피곤했지만, 약속이 되어있으니 억지로 그 자리에 갔다.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린채로 엉망으로 옷을 입고 나갔는데, 그는 양복을 차려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차로 삼겹살을 먹었다. 그는 2차로 옮기자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정말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1차를 계산하고 있는 틈을 타, 나는 도망쳐서 집으로 갔다. 그가 잽싸게 계산하고 따라 나올까봐 뒤도 안돌아보고 쌩- 하고 가버렸다. 오!
그러니까 나는 음, 좋아하는 남자에게 '못난 나'를 느껴서든 혹은 싫어하는 남자에게 '못난 너'를 느껴서든, 일단, 도망은 잘 치는 여자사람인 것 같다. 뭐,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든,
현실이라면, 7층의 그에게 전화해서 '나 만나려면 한층 내려와!'라고 말하고 싶은 월요일이다. 그는 알았다고 할테니까. 나를 만나러 한 층 내려와 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