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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은 내가 하루키의 책 중 세번째로 읽게 된 책이었다. 대학 재학중이었고, 『렉싱턴의 유령』을 읽기 전까지 나는, 『상실의 시대』를 읽고 어리벙벙 했었으며,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어려워했었다. 그래서 하루키는 나랑 친해질 수는 없는 작가일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책 몇권이 새로 들어온거다. 그때 들어온 것 중에 하나가 『렉싱턴의 유령』이었고, 그렇다면 나는 오만년만에 하루키를 다시 읽어볼까, 하면서 이 책을 꺼내들었던 것이다. (내가 읽은건 왼쪽의 구판이다.)
와- 정말 대단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실린 단편 중, [일곱번째 남자]를 읽고 나는 특히 특히 좋아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릴때 바닷가에 살던 아이가 태풍의 눈에 휩쓸려 죽게 되는 친구를 목격하게 된다. 그때의 충격으로 이 아이는 어릴때 살던 고향을 떠나고 오십대가 다 되어도 고향에 한번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 남자에게 내내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태풍의 눈을 같이 맞았는데 친구는 죽고 자신은 살아있다는 것. 그는 오십대가 되어서야 그때 이후로 처음 다시 그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서서 파도를 보며 그 파도에 자신의 상처가 휩쓸려가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때, 바로 그 때. 나는 마치 내 상처가 씻겨져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이 작가는 뭐지?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나는 『상실의 시대』를, 『양을 쫓는 모험』을 다시 읽었고, 대학 졸업때 선물을 사주겠다는 친구에게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댄스댄스댄스』를 사달라고 했다. 하루키의 문장은 『렉싱턴의 유령』그 이후부터 나에게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상실의 시대』에서 내가 놓쳤던 아주 많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와타나베가 '내 시간을 좀 내어 미도리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 같은 것들. 그때 미도리는 아마도 잠이 부족하다고 했던가.
오늘 태풍을 뚫고 출근하면서 『렉싱턴의 유령』이 생각났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는 친구가 떠올라서 나도 와타나베처럼 말해주고 싶었다.
내 여유를 당신에게 좀 나누어 주고 싶어요. 원한다면, 다 가져가도 좋구요.
그러나, 여유라는 걸 내가 줄 수 있는게 아니란걸 안다. 『렉싱턴의 유령』의 일곱번째 남자가 상처를 치유한 건 다른사람들이 도와줘서가 아니라 파도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시간을 좀 내어서 미도리를 자게 해주고 싶지만 시간을 내어줄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일' 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중학교시절, 『여명의 눈동자』를 읽었다. 총 열권짜리였는데, 나는 7권까지밖에 읽지 못했다. 내게 계속 그 책을 빌려주던 친구가 전학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여옥(채시라), 대치(최재성), 하림(박상원)이 나왔던 드라마 와 책의 내용은 좀 달랐는데, 책속에서 박상원은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부드럽기만 한 남자는 아니었다. 책 속에서 박상원은 일본인들에게 끌려가 그 앞에서 여옥이와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맺게 되는데(그러지 않으면 일본군이 직접 한다고 했다), 드라마에서 박상원은 채시라와 전혀 육체적인 관계가 없다. 최재성이 거친 남자로 채시라를 사랑했다면, 박상원은 부드러운 남자로 채시라를 사랑했다. 채시라는 최재성을 사랑했는데, 그런 채시라를 박상원은 바라보기만 하고, 이런 박상원을 고현정이 사랑한다.
고현정은 박상원과 함께 살게 되는데, 박상원이 자신과 함께 살면서도 언제나 모든 우선순위를 채시라에게 맞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고현정은 박상원에게 묻는다.
"그녀는 당신에게 조국 같은 존재인가요? 그런거에요?"
나는 박상원이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지만, 거짓말을 해주길 바랐지만, 박상원은 조금쯤 대답을 망설이다가, 고현정에게
"그런것 같아."
라고 얘기한다.
아! 그 때 고현정의 기분은 어땠을까. 박상원을 살려주려고 노력한 것도 고현정이고, 옆에서 박상원을 도와준 것도 고현정이고, 박상원을 사랑해주는 것도 고현정이다. 고현정의 조국은 박상원이다. 그런데 박상원은 고현정에게 당연히 고마워하고 잘 대해주면서도 사실은 늘 채시라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고현정이 박상원에게 아무리 아무리 모든걸 갖다 퍼부어 봤자 채시라를 당해낼 수 없었다.왜냐하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니까. 내 옆에 있는것도,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고현정이라는 걸 박상원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채시라를 사랑하는거다. 어쩔 수 없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박상원이 사랑하는건 채시라라는 걸 잘 알면서도, 고현정은 박상원을 사랑한다. 어쩔 수 없이. 제기랄.
나는 오늘, 그런 기분을 느꼈다. 고현정 같은 기분. 나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너를 위로하고 싶고, 너에게 힘을 주고 싶고,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한방을 당해낼 수가 없는것 같은 그런 기분. 그래서 결국은 당신에게 그사람은 조국 같은 존재인가요? 라고 물었는데, 그런 것 같아요, 라는 대답을 들은, 그런 기분.
내가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 그런게 있는거다. 그사람의 마음이 이미 다른 쪽을 향해있다면, 그 사람의 조국은 이미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그를 살리려고 애를 써서 목숨을 구해내도 나는 어차피 내쳐지고 마는 것이다.
그럴때는, 그러니까 그의 조국이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나 역시 내 조국을 버리고 이민을 가는 수 밖에 없다.
이민을 가기 위해서는 역시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작은 의식이 필요하겠지.